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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있다
  • 년도2018
  • 기관명광주북구일터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이문수
  • 조회수737

  저는 1953년 5월 15일 조금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순탄하게 성장기 시절을 보 내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광주시청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광주시청에 취직한 후에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루하루 시청에서 일을 배워나가고 성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좋게 보지 않은 상사가 한 분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항상 불친절했던 그 상사가 저에게 또다시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잘 참아왔던 저인데 그날은 저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그 상사와 사무실에서 치고받는 싸움을 하게 되었고 직장에 자진 사직서를 제출하고 시골인 전남 해남으로 낙향하게 되었습니다.

 

  도시생활에만 익숙해져 있던 제가 고향인 해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저와 와이프는 ʻ무엇을 할까?ʼ 머리를 맞고 궁리한 끝에 소를 키워보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가 2003년 6월경이었습니다. 처음에 송아지 암컷 2마리로 시작을 하습니다. 송아지가 커서 어미 소가 되고 이 어미 소가 새끼를 낳고 그렇게 5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암소와 송아지가 14마리가 되었습니다. 이 5년 남짓 고향에서 소를 키우는 시간은 보람과 환희의 연속이었고 새로운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부자는 아니더라도 먹고 살기에는 문제 될 게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자식들에게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더 뿌듯했습니다. 그렇게 소들을 키우면서 해남에서의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4월 18일 미국 부시 통령과 이명박 통령이 미국 소를 수입한다고 발표를 하습니다. 축산업을 하는 제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때마침 북미 지역의 광우병 소식이 전해졌고 국내에서 이 소식을 접 한 국민들이 광우병을 우려한 나머지 「미국 소 수입 결사반!」 구호를 내걸고 적으로 시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광우병하고 전혀 무관한 한우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하락하고 사룟값은 계속 상승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소를 키우는 부분의 축산인들이 위기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들을 내다 팔아야만 했습니다. 정들었던 소를 2008년 7월경 모두 정리하습니다.

  마지막 소를 팔던 날은 지난 5년간의 갖은 고생과 노력이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변질되어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소를 모두 정리 하고 와이프를 시골에 두고 나 홀로 광주로 올라왔습니다. 저는 다시 재기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빨리 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판매, 업을 선택했고 다단계 업체에서까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과 노력과는 달리 판매, 업을 통한 돈벌이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실적을 올리려고 필요 없는 물건을 사재기하면서 빚을 지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정신을 차리고 아파트 경비, 학교 지킴이, 주차타워 주차요원 등 일자리가 생길 때마다 일을 했습니다. 그러 나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고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갔습니다. ʻ왜 나는 항상 마이너스 인생일까?ʼ 이런 생각이 자꾸 떠올라 인생의 패배자가 된 듯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궁여지책 끝에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된다는 것이 정말 수치스러웠습니다. 저는 근로능력이 있어서 조건부수급자가 되었고 자활사업에 참여해야만 생계급여가 나온다고 하습니다.

 

  그래서 2013년 11월 하순경 광주북구일터지역자활센터에 오게 되었습니다. 자활사업에 참여하면서도 늘 불안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Gateway『여럿이함께』사업단에서 1달간 자 활 입문 교육과 공동체 교육을 받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도 만나게 되고, 때로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보면서 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힘을 내보자 생각하고 이곳 자활센터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리라는 다짐을 하고 자활근로 사업단에 배정되어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2014년 1월 ʻʻ미르가구공방ˮ이라는 편백가구 및 소품을 제작하는 자활근로 사업단에 배정되었습니다. 아니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Gateway에서 맘먹었던 다짐들이 미르가구공방에 오니 또다시 물거 품이 되었습니다. ʻ젊어서는 사무만 보다가 황혼에 이 무슨 꼴이람!ʼ 하고 회의감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나이도 있고 여기서 낙오되면 나는 이걸로 끝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가구 제작의 기초인 재단작업부터 사포질, 트리머 사용법, 가구 조립법 등을 차근차근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나랑 전혀 맞지 않을 것 같던 목수 일이 조금씩 재밌어지기도 하습니다. 역시 사람이 맘을 먹으면 못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잘해보자는 맘을 먹으니 일이 잘 되어지고, 일이 잘되니 재미가 생기고 재미가 생기니 일을 더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품에 한 기술이 숙련되고 완성도 높은 제품이 개발되고 판매가 조금씩 늘어갈 때마다 뿌듯함이 생겨났습니다. 그래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뭔가 일 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미르가구공방에서 생활한 지 2년이 다 되어갑니다. 아직도 전문가라고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모습과 우리 미르가구공방 식구들의 모습을 봅니다. 전문 기능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려 일자리도 만들고 어려움도 함께 극복해나가는 모습 속에서 이제는 동료의 정을 듬뿍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기술을 습득하여 지금 함께 생활하고 있는 미르가구공방 식구들 모두와 자활기업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오늘도 자활센터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일궈가며 가슴속으로 나의 신조를 읊조려봅니다.


나의 신조

1. 한번 마음 먹으면 기필코 성취를 한다.

2. 최고의 제품으로 고객들의 만족을 시킨다.

3. 나만의 시장을 개척한다.

4. 준비는 철저하고 시작은 과감하게 한다.

5.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6. 목공예일이 위기나 난관에 부딪혀도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해서 절 대 포기는 하지

   않는다.

7. 시장에 민감하고 목공예 성장을 위해 전력투구한다.

8. 목공예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소명의식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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