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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의 전환점
  • 년도2018
  • 기관명여주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현정
  • 조회수1,185

  1982년 10월 30일 서울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나 어른들에게 맏며느리 감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포동포동 살이 올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키 155센티미터에 70킬로그램을 육박하는 몸으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이어트는 생각도 안 해봤을 정도로 생각 없이 살았다.

 

  그러면서 20살 어린 나이에 한국야쿠르트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고, 친구로 지내던 아이와 부모님의 반대에도 안산의 어느 지하 단칸방에 살림을 차렸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함께하고 싶어 아이까지 낳았는데 아이 백일 때 2천 원짜리 떡을 사들고 온 시댁 식구들은 뚱뚱한 날 보며 “넌 혼자 뭘 먹는데 이렇게 뚱뚱하냐. 내 아들은 굶기는 것 아니냐.”라며 핀잔을 주고는, 좁아서 더 있기 싫다며 2시간 만에 가셨다.


  그렇게 1년이 흘러 아이들이 돌이 될 때쯤 친정 부모님이 집에 와보고는 왜 이러고 살고 있냐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 어쩔 수없이 친정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밥을 먹을 때마다 술을 마셨는데 한 달 만에 글라스에 따라 마시기 시작하더니 석 달 후부터는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와 마시기도 하고, 6개월 후에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술을 마신 지 7개월이 지날 무렵 주정을 하고 친정 부모님께 폭력을 쓰기 시작했다.

 

  친정 부모님이 옛날 분들이라 술 마시고 그러는 것을 못 마땅해 하셨고, 12달 만에 집을 얻어 나가라고 하셨다. 돈이 없어서 쌍둥이를 데리고 가려면 대출을 받아야 했고 3천만 원을 대출받아 이사를 했다.

 

  아이 아빠로서 착실하게 살겠다고 다짐까지 받았지만 3개월도 못 가서 실망으로 다가왔다. 일을 나가서는 직장 동료와 싸워서 병원비를 물어줘야 했고 그 결과 기저귀 값, 전기세, 가스비 등을 친정 엄마에게 보내 달라고 해야 했다.

 

  반복되는 술주정에 우울하고 외롭고 슬픈 일이 너무 많아서 혼자 있을 때면 눈물을 흘렸다. 작은 소리에 놀라 밖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에도 두려워했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면 저 사람이 나를 욕하는 것만 같았고, 아이들에게 예쁘다고 말을 걸어도 피했다. 점점 행복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니까 살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일을 해야 했다.

 

  110킬로그램이 나가는 내게 일을 시켜 주는 곳은 없었고, 텔레마케터 일은 그나마 전화로 말하는 직업이라 입사하기 쉬워 이천에 있는 가로수 신문에 입사했지만 업이 쉽지 않아 2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간호조무사를 모집한다는 과 취업이 잘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고, 학원에 등록한 후 1년 만에 자격을 취득했다.

 

  간호조무사로 바로 취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력서를 10군데 지원했지만 한 군데도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학원에서 소개해 준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이 자주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수요일 저녁 교회에서 엄마들 모임을 하는데 올 수 있냐는 말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남편과도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간호조무사 일도 적응해 가며 그렇게 쌍둥이들은 9살이 되었고, 남편은 침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일하던 병원이 경제적인 문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해야 했지만 쉽지 않아 텔레마케터로 호텔에 취직했다. 일을 다닌 지 두 달쯤 후에 속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놀고만 있을 수 없어서 임신 8개월까지 일했는데 직장에서는 왜 자꾸 살이 찌냐면서 그만 좀 먹으라고 했지만, 해고가 두려워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이는 다행히 3.92킬로그램으로 아주 건강한 딸이었다.

 

  셋째를 낳은 후 산후 조리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남편이 잘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일용직을 하겠다고 했다. 황당하고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수없이 동의를 해주었고 그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 달에 10번 정도 일했는데 그마저도 일당을 술값으로 날리고는,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이거면 한 달 살지?” 하며 30만 원을 던져 주었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상황에서 한 달 수입 30만 원으로 생활비와 대출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또다시 일을 해야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일하기가 어려워, 12살인 큰아이들에게 셋째를 부탁하고, 물류 창고에 일당 6만원을 받고 나갔다. 빚은 늘고 매일 대출금에 생활비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 아빠가 집을 나간 것이다. 아이가 우는 것도 짜증나고 집구석도 짜증난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나간 사람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고 합의 이혼을 했다. 이혼한 후 동사무소에서 한 부모 가족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혼 당시 내 앞으로 빚이 1천5백만 원 정도는데 아이 아빠가 빚을 못 갚아 주겠다고 해서, 그 당시 아이 아빠 명의로 되어 있는 집에 사는 조건으로 이혼하고 그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럴 경우 이혼은 했지만 동거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묻자, 월세에 살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겠지만 아이 아빠의 명의니 도와줄 방법이 없다며, 더 이상 방법을 알려주지도,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혼할 당시 난 넷째를 임신한 후고 그 몸으로 물류 창고에서 일하며 세 아이와 빚에 치이며 지쳐 갔다. 임신 9개월이 되어 아이를 낳기 2주 전에 친정 엄마의 도움으로 여주로 이사해야 했다.

 

  이유는 아이 아빠가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팔려고 그 집에 살고 있던 나를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무단 침입을 했다고 신고해서 어쩔 수 없이 2주 후에 태어날 아이를 위해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고, 무보증 15만원 월세 방을 얻어 이사했다.

 

  이사 후 주소를 이전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오학동 사무소에 수급자 신청을 하면서 상담을 받았고, 사회복지사와 사례 관리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동안의 일들을 물어보기에 사실 그대로를 말했고 그 후 출산 비용과 생활비가 지급되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후 다시 연락이 왔고 몸조리 잘하라며 기저귀와 물티슈, 주변의 도움으로 아기 옷까지 들고 몸조리 중인 나를 찾아 왔다. 곧 겨울인데 아이들을 생각해야 한다며 모자원 전화번호와 신청서를 건네주었다.

 

  따듯한 말과 격려를 건네 준 오학동 사회복지사와 사례 관리사님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내 삶의 목표는 사회복지사로 변경되었다.

 

  모자원 입소를 결정한 후 두 차례 면접을 보았고, 넷째 아이를 낳은 뒤 백일쯤 모자원에 입소했다. 수급자이면서 아이가 넷이고 1천5백만 원의 빚이 있는 나로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해야 했고, 태어난 지 4개월이 지난 막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간호조무사로 한 요양원에 취직했는데, 당시 직원들 사이에 분란이 끊이지 않아 새로운 직원들을 모집하던 중 간호조무사까지 그만두는 바람에 면접 다음날 출근을 했지만 한 달 반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

 

  내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해고를 당해서 억울하기도 하고, 사회가 아직은 이혼녀라는 딱지를 안 좋게 생각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나 같은 사람이 손가락질 안 받는 사회는 언제 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얼마 후 옆집에 살던 언니가 자활센터에 가면 돈도 주고 교육도 시켜 준다며, 동사무소에 알아보라고 했다. 그 길로 동사무소에 자활 근로를 신청했다. 얼마 후 상담을 받고 자활 사무실로 출근했다.

 

  게이트웨이를 거쳐 돌봄 사업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집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출근하게 되었다. 그리고 1천5백만 원이라는 빚도 2년 2개월 만에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은, 여주 지역자활센터의 일자리 팀장님 덕분인데, 게이트웨이를 거치는 동안 빚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내게 직접 법률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소개해 주었다. 그분을 통해 원주신용회복위원회를 알았고, 필요한 서류를 제출한 후 이자와 원금을 감면받아 1천5백만 원에서 4백만 원으로 줄여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하느라 내 자신보다는 아이들을 우선으로 하고 살았지만 여주 지역자활센터 게이트웨이 팀장님을 만나면서,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고 때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일을 겪으며 난 공부도 꿈도 포기하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요양 보호사 교육을 통해 과장님은 내가 꿈과 용기를 갖게 해주었고, 일자리도 소개해 주었다. 사이버 대학을 생각하고 있던 중 팀장님의 조언으로 세계 사이버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고, 현장 실습을 나가는 15일간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세계 사이버 대학을 졸업한 후 계속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서울 사이버 대학 3학년 복지 시설 경 전공 과정에 편입했다. 팀장님의 배려와 응원을 받으면서, 배운 것을 공유하고 싶어졌고 인터넷상에 시설 정보나 일자리 정보 또는 사회복지 정보 등을 여러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복지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 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관공서에서 공지하는 정보를 공유하고 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삶의 즐거움을 알았고 누군가가 나의 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정보네요’라고 댓을 달면 정말 행복했고 더 많이 알아줬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 경험이 더 필요했고,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돕고 싶어 사회복지사로 취업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천시노인종합복지관에 당당히 사회복지사로 입사했고 자활센터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현재 나는 네 아이의 엄마이자 사회복지사로 당당하게 자립하고 있다. 오늘이 있기까지 따뜻한 사랑과 격려로 힘을 실어 준 여주 지역자활센터의 센터장님과 직원분들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린다.

 

  자활센터 여러분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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