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홍보

자활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 년도2018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안미숙
  • 조회수967

  자활은 제게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간만에 쉴 틈이 생겨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높고 파란 하늘을 쳐다봅니다. 뭉글하게 올라오는 여유로움이 괜스레 웃음을 짓게 만드네요. 창문 사이로 들어온 갈바람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의 내 모습을 되짚고 있자니 새삼스레 지나 버린 소싯적이 떠오릅니다.

 

  뜻하지 않은 상황이 생겨 가정이 해체된 적이 있었습니다.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을 형편도 되지 않아 월 10만 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 아이 셋을 데리고 어렵사리 살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겐 아이들의 보호자만이 아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 또한 존재했기에, 살아가려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새벽 신문 배달을 시작으로, 아침부터 밤까지는 주유소 주유원으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조금 숨통이 트인다 싶을 때는 아이들을 최대한 늦게까지 돌봐 줄 수 있는 어린이집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보호자란 엄마뿐이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큰아이가 공부방을 다니겠다고 말하더군요. 바로 자활센터에 속해 있는 공부방이었습니다. 바빴지만 엄마로서 내 아이가 다니게 될 곳이 어떤 곳인지, 무엇을 하는지는 알아야 했으므로, 주유소 퇴근 후 찾아가 보았습니다.

 

  공부방은 3층이어서 1층과 2층을 지나야 했죠. 첫 방문이었던지라 어디가 어딘지 도통 알 수 없던 저는 2층에 있는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바로 지금의 자활 사무실입니다. 그때 제가 그곳에서 처음 만났던 분! 퇴근 시간이 지나 한적한 사무실에 홀로 있던 당시의 실장님이었습니다.

 

  입구를 잘못 찾은 저는 아이가 다닐 공부방이 궁금해서 방문했다고 말했고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대화가 끝나 갈 즈음, 실장님은 따가운 햇볕에 익어 까매진 제 얼굴을 보고 제 처지를 어렴풋이 짐작한 건지 자활 근로에 대해 간단히 알려주기 시작했고 상담을 받아 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자활센터를 이용하는 분들이 대개 사회 취약층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거든요. 저는 둘째와 셋째가 어린데 쉬는 날 없이 주유소에서 근무하는 게 무척 고민되었던 터라 그분의 제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사업 담당 팀장 분과 상담을 진행한 결과 간병 사업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제 나이는 서른. 아마 제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아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돌봄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픈 사람을 돌본 경험도 없었거니와, 이용자가 남자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걱정까지 들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하루 종일,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고민한 끝에 저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다른 요인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제게는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주말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크게 와 닿았거든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어떤 고비나 장애물도 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또 설마 죽기까지 하겠나 싶었으므로 용기를 내 자활 간병 사업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자활과 서서히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했지요.

 

  생계를 위한 곳이고 아이들과 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직장인만큼 매일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활센터는 단순히 일만이 아니라, 운전면허 취득 기회 등 다양한 교육을 진행해 자립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도움을 받아 꾸준히 교육에 참가하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한 기반을 다져 갔습니다. 교육도 일도. 나름 모범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동 목욕 반장까지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저는 조금씩 자활 참여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위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은 분명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남의 눈에 잘 띄는 생김새라 그랬던 걸까요? 사업단 반장과 자활 참여자 대표, 강원도 자활센터 간병인 협회장 등 일반 참여자보다는 다양하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선배 실무자님이 이끌어 준 덕분에 2007년 사회 서비스 바우처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바우처 사업을 전담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을 도와주는 일이 숙원 사업이었고, 꼭 해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이때가 실질적인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자활을 통해 실제적인 사회복지 쪽으로 인생길을 걷게 된 큰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질적으로 나은 실무자가 되고자 간호조무사 자격을 취득했고, 여건상 포기하고 있던 대학교에도 다시 편입해 자격을 잘 갖춘 실무자로 변신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야간이면서 워낙 오지에 있는지라 교통수단이 없으면 사실 다니기 쉽지 않은 곳이었는데, 갖춘 것 없이 마음만 앞서 추진하다 보니 애들 셋을 보호자 없이 밤에 놔두고 학교를 다닌다는 것과,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내 이기심이 빚어낸 자신의 초라함이 자책으로 이어지면서 자퇴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시기적으로 아니었나 봅니다. 하지만 기초 생활 수급자로서 앞만 보며 엄마는 엄마대로 자활 사업에 충실하고, 아이들도 국가로부터 지원받으며 살다 보니 할부로 조그마한 차도 구입할 만큼 조금의 여유가 생겨 3년 만에 재입학을 했습니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공부할 수 있을 때 다시 시작하게 된 거죠. 남들은 2년이면 끝나는 학교를 저는 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고 졸업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미래의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제대로 보여 주면서, 기초 생활 수급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아이들에게 잘 살아가는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자활 사업에 참여했을 때 선택이 힘겨웠지만 간병 사업단에 들어간 것이 제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돌봄 서비스에 대한 인프라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고 제가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자활 시절에 실기 강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서, 저는 10년째 장애 활동 보조인 양성 과정 강사 및 돌봄 서비스 직무 관련 강사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전담, 대리, 팀장, 선임 팀장……. 위치가 바뀔 때마다 하는 역할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책임감도 따라서 더욱 무거워졌죠. 아마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는 자활센터의 돌봄 서비스 분야의 업무 지식이나 관리자로서 리더십을 현장에서, 그리고 실제 경험을 통해 차근차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회복지 서비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돌봄 사회 서비스 관련 일을 하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꽤 괜찮은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무얼 하면 좋을까?’

 

  자활의 울타리는 안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는 자활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행동했고, 멘토인 센터장님도 제 의견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사회복지의 길이 있기에, 그리고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기에 작지만 내 나름의 돌봄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도서나 벽지 지역을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시작과 함께 손길이 닿았던 도서 벽지 지역을, 사업을 시작한 지 만 4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는 누구나 할 기회가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또한 열심히 하고 잘하는 것도, 즐기는 것을 이길 수 없듯이 저는 이 일이 아주 즐겁습니다. 현장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장 이용자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어려운 일들도 함께할 때 제일 보람을 느낍니다.

 

  저는 지금 돌봄 사회 서비스 센터를 운하고 있는 센터장입니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해체되었던 가정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어렸던 아이들은 대학교 4학년과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지역사회에 재능 기부도 하고 꽤 괜찮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정말 제 나름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롤 모델을 말하라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저를 롤 모델로 적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입니다. 선생님들의 반응은 더 하더군요. “너희 엄마 정말 멋진 분이구나.”라고 한답니다.

 

  2년 전 대학원 실습 차원으로 자활센터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마치 친정에 간 기분이었습니다. 멘토였던 관장님과 알던 동료들을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자활 시스템도 다양했고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경험자였던 제가 보기에도, 자활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자활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참여자의 의지가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요.

 

  일부러 기초 생활 수급자의 삶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자활 사업을 통해 탈수급으로 가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설정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꾸준한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활 참여자 중에는 아직도 많은 분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판하고 과거에 집착하면서 퇴보적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앞으로의 비전을 바라보면서 역경들을 잘 극복해 나가야 하는데 말이죠. 사실 제일 힘든 부분이죠.

 

  저는 사회복지사 앞에 물음표에서 느낌표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궁금증으로 시작했다가 과정을 겪고 결론쯤 가면 모두 느끼게 되거든요. 그것이 바로 사회복지라고 봅니다. 현재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분명히 알고, 가슴은 뜨겁더라도 머리는 냉철한 진정한 사회복지사. 현장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남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진정한 사회복지사가 아닐까요?

 

  자활은 제게 진정이 느껴지는 사회복지사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길을 열어 주고 잘 이끌어 주었던 멘토님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항상 고맙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