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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에서 찾은 나의 꿈
  • 년도2018
  • 기관명광주서구상무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수진
  • 조회수967

  “안녕하세요? 저는 천연 비누 강의를 도와 드릴 상무 지역자활센터 드림공방사업단의 김순(가명)입니다.” 자활센터 공방팀장님과 강사님의 권유로 처음 강의를 하던 날, 강의하는 내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진행했는지 정신이 하나 없어 기억이 희미했습니다.

 

  다만 강의를 끝내고 강사님과 사례 관리 선생님, 게이트웨이 선생님께서 “잘했어요. 와~ 정말 잘하시는데요.” 하며 연신 잘했다고 칭찬해 주던 기억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저는 강의할 생각에 마음이 설레며,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해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강의를 할 날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지독했던 날들, 그리고 만남

  우리 집 가정사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언니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너를 도와줄 분을 찾았어. 한번 만나 보자.” 그리고 며칠 후 언니가 안다는 자활센터 사회복지사님을 언니와 함께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낯가림이 있는 저를 편안하게 해주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는 우리 집 사정 얘기를 나도 모르게 처음 만난 분 앞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너무나 하고 싶어 자신 만만하게 대출까지 받아 시작한 대망의 레스토랑 사업!! 여기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 하는 사업은 겉으로 규모는 커 보지만 지출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빚이 쌓여 갔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는지, 남편의 친구들은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고향 친구, 학교 친구들까지 가게를 자주 찾아왔고, 마음 착한 남편은 아쉬운 소리 하는 친구를 거절하지 못해 돈을 꿔 주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어느 새 남편은 저도 모르게 거액의 빚보증마저 서주었습니다.

  살던 집의 보증금을 빼서 빚을 갚아도 밑 빠진 독의 물 붓기인 경우고, 할 수 없이 손아래 시누이, 시동생에게 손을 벌려 단칸방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은 친구의 배신과 자신의 과오로 자식과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동안 술만 먹으면 미안하다고 엉엉 울었고,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공황 장애라고 했습니다. 아픈 남편만 믿고 있을 수 없어 식당에서 일용직으로 주방 설거지뿐만 아니라 홀 서빙까지,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불행이 있었는지…….

 

  일하던 식당의 커다란 통유리창이 깨져 내 몸을 덮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많은 피를 흘렸으며 유리 파편들 때문에 온몸이 찢기고 오른쪽 손과 팔의 신경과 인대, 근육 등이 다 끊어졌고, 요골신경이 마비되는 장애를 얻었습니다.

 

  이후 무리하게 힘주어 팔을 사용하다가 어깨와 팔 관절에 이상이 생겨 당분간 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 형편은 점점 더 힘들어졌고, 아픈 몸을 이끌고 가끔 일하려 나가는 남편의 일용직 수입으로 근근히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방송국 합창단에 들어가 맘껏 노래를 부르고 공연도 했습니다. 그러다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무너지니 아이들을 그만두게 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재작년 아들은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 군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성악도 공부도 곧잘 했던 아이라 너무 미안합니다. 아들이 “엄마, 나는 포기했지만, 어려워도 동생은 성악을 계속하게 해주면 안 될까? 힘들까?” 속 깊은 큰아이의 말이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늘 마음이 아립니다.

    

 

자활에서 찾은 나의 꿈

  그때 자활 사회 복지사님이 알려준 대로 구청과 동 주민 센터에 자활 참여 신청을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자활 선생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활 사회 복지사 선생님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카페에서 만났을 때 손재주가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던 선생님은 공방 사업단을 안내했고, 제가 관심을 보이자 바로 사업단 팀장님과 상담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마침 운 좋게도 공방에 인원이 한 명 비어 있어 바로 출근할 수 있었고, 낯가림이 있지만 기존에 계시던 분들이 전부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라서 막내 왔다며 반겨 주고 잘 가르쳐 주어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공방 사업단에 근무하면서 사례 관리 선생님과 사업단 팀장님이 정기적으로 상담을 해 주고, 늘 저를 지지해 주었습니다. 힘들고 암울하던 저는 예전의 밝고 긍정적이었던 ‘순이’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례 관리 선생님이 학원비를 지원할 방법을 모색할 거라며, ‘천연 비누 강사 자격증’을 취득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저는 강의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생각해 보겠다며 거절했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렘으로 집에 오는 내내 흥분되었습니다.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해보자, 해보는 거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하겠다고 어렵사리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잘했다며 학원 정보와 학원비 지원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천연 비누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냅킨 공예 강사 자격증도 취득하면서, 제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좋아하는지 자신을 알아 가고 있을 무렵, 게이트웨이 과정에서 소양 교육으로 진행하는 비누 공예 시간에 제가 강사 선생님을 돕는 보조 강사 역할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보조로, 게이트웨이 과정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의 수업을 조금 거들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가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고, 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례 관리 선생님은 그런 저를 늘 옆에서 지켜봐 주면서 강사라는 꿈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복지관의 프로그램과 게이트웨이 과정 참여자 교육에서 강사(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며 내년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광역 자활센터에서 ‘전문 비누 공예 강사 자격증’ 학원비를 지원해 주었고, 11월이면 또 다른 강사 자격증이 나옵니다. 그리고 저는 살며시 또 하나의 꿈 ‘자활 기업 창업’을 꿈꾸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상무 자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들이 먼저 성악을 포기했고, 딸도 포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딸은 완강히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 한번 시험이나 보자.” 했던 것이 전교 1등을 했습니다. 아들이 포기한 꿈이 너무 마음 아파 어렵더라도 딸은 “그래, 갈 때까지 가 보자.” 하고 예술고등학교를 보냈습니다.

 

  어려운 형편을 알게 된 사례 관리 선생님은 지원해 줄 곳을 찾아보겠다고 하며, 딸아이의 활동사진, 상장 등 이것저것 자료를 모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 법인 우리누리에서 3차에 걸친 심사에 통과해, 졸업할 때까지 매월 20만 원과 후원 활동을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선정되던 날 사례 관리 선생님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해 주었습니다. 꾸준히 잘하는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했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사실 우리 집 경제 사정이 좋아졌다거나 어려움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구 상무 지역자활센터 드림공방 사업단에 들어오면서부터, 아니 자활센터 선생님을 만난 그날부터, 절망으로만 걸어가던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이 이제는 희망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꿈을 갖고 더 열심히 배울 것이며, 강사로 봉사자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도 자신들의 소중한 꿈을 더욱 크게 키울 것이고, 남편도 점점 건강해질 것입니다.

 

  선생님들께 받은 긍정적인 생각들과 삶의 태도는 하염없이 지치는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찾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찾은 그 희망을, 꿈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선생님들과 센터에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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