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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상, 행복한 동행
  • 년도2018
  • 기관명광주북구동신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이철
  • 조회수1,231

  나는 노숙인이었다. 노숙인은 흔히 말하는 공원 벤치, 지하철역, 길거리 등에서 아무렇게나 잠을 자고 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없으면 며칠씩 굶는. 내가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집과 연락을 끊다시피 하고 살았다. 아버지는 알코올과 우울증으로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폭언을 했다. 매일 술만 먹으면 소리를 지르고 때렸다. 가족 모두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으며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형은 중학교 때 가출한 뒤로 현재까지 연락이 없고, 남동생은 형편상 너무 어려워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대구로 입양되었다.

 

  나도 가난과 불우한 환경을 견디다 못해 형처럼 중학교 졸업 후 집을 나왔다. 서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상경해 전자 부품을 조립하는 공장에 취업을 했고, 2년 정도 일했다. 이후 중국집 배달, 이삿짐센터, 일용직 및 공공 근로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다 세상 물정 모르던 스물두 살 어린 나이에 서울역에서 좋은 곳에 취업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명의를 빌려줬는데, 알고 보니 명의 도용 사기다. 이로 인해 나는 약 10억 원의 빚을 떠안았고 결국 신용 불량자가 되었다.

 

  당시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나는 빚에 시달리고 일할 의욕도 상실한 채, 너무 힘들어 다 내려놓고 싶어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시원 주인의 신고로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그러기를 세 번을 반복했다. 그때는 살고 싶지도 않았고, “왜 내게만 이런 일이…….”라는 생각에 매우 절망적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시 살아나서 얼마나 다행이었나 싶다.

 

  당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노숙인으로 살았다. 서울역에서. 사기를 당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떠나고 싶었고, 지긋지긋한 서울역 노숙 생활도 마감할 겸 2015년 1월 무작정 발길 닿는 곳으로 간 곳이 대구다.

 

  동대구역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젊은 남자 두 명이 다가와 하루 일당이 6~7만 원이며, 월급을 180만 원 줄 테니 가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월급만 생각하고 무작정 따라갔는데, 목포에 있는 어느 직업소개소에 나를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해서 팔려 간 곳이 신안 어느 섬의 염전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염전으로 팔려 간 사실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세히 물어 볼 만도 한데 그때 아무 의심 없이 따라 갔던 것은 그만큼 내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12월이라 춥기도 하고 일도 없어 일을 시키지 않고 한 달 동안 밥 먹고 놀기만 했다. 그렇게 안심을 시키고 1월부터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염전 일을 했다. 고된 염전 일에 밤에는 너무 힘들어 기절해서 바로 잠이 들 정도였는데, 힘들어도 월급을 받아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버텼다.

 

  그런데 염전 사장님은 내가 월급 이야기를 하면 저축하고 있다고 말했고, 통장을 보여 달라고 해도 보여 주지 않았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월급은 주지 않고 고된 일만 계속되었다.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지만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신고하겠다고 몇 번을 싸우고 이야기 한 끝에 겨우 차비만 가지고 목포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가 6월이었다. 6개월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죽도록 고생만 하고 가슴에 상처와 실망만 가득 안고 광주로 왔다.

 

  돈 한 푼 없이 그렇게 광주로 와서 터미널과 근처를 이리저리 노숙하며 돌아다니다 광고에서 무등 종합 사회 복지관 내에 노숙인 쉼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방문하라고 해서 바로 가서 상담을 했고 그 길로 쉼터에 입소했다.

 

  노숙인 쉼터에서는 오래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낮에는 근로를 해야 하고 자립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일을 찾았지만 한계가 있어 취업이 쉽지 않았다.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면 나라의 보호 속에 근로가 가능하다는 무등 복지관 노숙인 쉼터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받아 북구청에 상담을 했다. 그 결과 기초 생활 수급자 신청을 했고 조건부 수급자가 되어 지금의 광주 북구에 있는 지역자활센터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5년 11월에 게이트웨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열심히 일 해서 노숙인 쉼터에서 나와 자활·자립을 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 했다. 두 번 다시 노숙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50분 거리를 왕복 걸어서 출퇴근하며 교통비를 아껴 돈을 모았고 이후 다행히 인큐베이팅 트랙에 참여해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업단으로 배정되어야 하는데 사업단에 결원이 없었다. 이번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제주도에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알아보던 중 그동안 결근, 지각 한 번 없이 내가 보여 준 성실성에 담당 팀장님이 같은 지역의 타 센터를 연결해 주었다. 그곳이 지금 참여 중인 광주 북구 동신 지역자활센터이다.

 

  4월에 신규로 시작하는 파일럿 사업에 결원이 있다고 해 사례 관리 담당 팀장님과 상담을 했고 사례 회의 후 연락을 준다고 했다. 이후 파일럿 사업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업장이 담양군 고서면에 위치해 거리상 조금 멀고 환승을 해야 해서 교통비가 많이 들어 잠시 고민했지만 채반 파일럿 사업단에 새로운 희망을 안고 4월 1일부터 참여했다.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무엇보다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지 해서 빨리 안정을 찾고 싶어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채반’ 사업단은 식품 건조 및 판매를 하는 사업단으로 표고버섯, 팽이버섯, 비트, 여주, 작두콩 등을 건조해 판매한다. 주로 차로 쓰이는데, 원재료를 구입하러 공판장에 가고 파일럿 사업이라 장비가 부족해 일일이 손으로 썰어서 건조장에 말리고, 포장하고 판매해야 하므로 각각의 효능 및 효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시장 조사를 해야 한다.

 

  파일럿 사업이라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인지, 환경이 열악해서인지는 몰라도 판매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 그로 인해 잦은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가 서먹서먹하거나 낯설지만 그래도 나는 젊으니까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면 언젠가는 마음을 알아주고 같은 마음이 될 거라 생각하며 오늘도 아자아자!! 힘을 내본다.

 

  자활 사업단에 참여한 것은,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우울했던 내 인생, 긴 방황 끝에 한줄기 빛처럼 찾아온 기회이다. 어떤 일이든 아침에 눈을 떠서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지금처럼 열정적이고 안정적으로 일한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처음 시작하는 만큼 우리 스스로 모든 걸 채워 나가야 하고, 센터에서도 사업단에 큰 관심을 가져 주었고 노력한 만큼 이번 9월 1일부터 신규 사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름 열심히만 한다면 자활 기업으로 창업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비전도 있다. 이런 믿음과 확신으로 오늘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일터를 향해 달려왔다.

 

  노숙인 쉼터에서는 일정 기한이 지나면 독립해야 하므로 매달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고부터 급여 85만 원 가운데 45~60만 원 정도를 매달 저금했다. 돈 한 푼 없어 노숙을 하던 내가 지금은 정말 아끼고 아껴서 약 5백만 원 정도를 저축했다. 또한 LH 임대 아파트도 신청해, 올해 11월에 입주할 예정이다.

 

  사업단에 참여하면서 안정된 일자리와 일하는 즐거움으로, 깡말랐던 내가 6킬로그램이나 살이 쪄서 주위 사업단 내 참여자들과 팀장님이 모두 몸도 좋아지고 얼굴도 너무 밝아 보인다고 한다. 사실 이건 다른 이유도 있다.

 

  처음 광주로 와서 지역자활센터 게이트웨이에 참여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현재 임신 8개월로 다른 지역자활센터 사업단에 참여 중이다. 11월이면 아파트에 입주해 태어날 아이와 셋이 함께 살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저축한 5백만 원 중 250만 원은 LH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나머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태어날 아이를 위해 생활비로 쓸 생각이다. 이제 내 나이 서른아홉. 나는 지금 새로운 인생을 위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자활에 참여하기 전 나는 한때 노숙 생활을 했고,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자살을 시도했으며, 염전에 팔려 갔다. 그렇게 바닥을 치던 내가 지금 현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자활센터에 들어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일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며, 돈을 벌 수 있는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 참여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믿어 주고 공감 및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지지해 준 센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또 다른 도전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보려고 준비 중인데 그중 하나가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는 일이다. 이미 학원에 등록해서 현재 진행 중이다. 사업단에 운전자가 없어 지금은 담당 팀장님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운전을 해주고 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어서, 내가 운전 면허증을 취득해 사업단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필요한 기술을 취득해, 우리가 함께 만들어서 키워 가는 자활 기업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내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한다. 앞으로 내게 더 이상 포기나 좌절은 없다. 왜냐하면 이제 난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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