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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 년도2018
  • 기관명인천미추홀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현주
  • 조회수914

이혼녀 

  그랬다. 나는 4살짜리 아들을 혼자 부양해야 하는 이혼녀로 한 부모 가정이 되었다. 남편은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었는데 성실해 보고 서로 열심히 노력하면 잘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웠지만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고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 이후 출근한다고 나가서는 친구가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밤을 새며 내기 게임을 즐겼고, 도박에 빠지면서 일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잦은 지각과 결근으로 결국 남편은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나는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생활 능력이 없던 남편이 아이가 생기면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가 생겨도 변하지 않는 남편에게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의 방탕한 생활은 카드빚으로 이어졌고 카드 돌려 막기로 생활하던 끝에 결국, 결혼하면서 힘들게 얻었던 전셋집이 빚잔치로 날아갔다.

 

  당장 옷가지만 챙겨 보증금 2백만 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부엌이 딸린 단칸 월세 방을 얻었지만 아이가 어려서 집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당장 생활비며 집세, 공과금 등 경제적인 문

제는 무계획이 계획이었다. 나는 굶어도 아이를 굶기는 엄마는 아주 큰 죄인 아닌가?

 

  결국 남편과 이혼했다. 더 이상 미련도 애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5년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당장 아들과 단칸방에서 살아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떼어 놓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루하루를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다. 친정 엄마에겐 손도 내지 못했다. “남의 새끼 왜 달고 와서 사서 고생이냐”며 당장 시댁으로 보내라는 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에서 지켜보던 집 주인 아주머니께서 직장 구할 때까지 만이라도 세차장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분은 세차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급여를 당일 지급해 준다고 했다. 돈이 필요했던 나는 무조건 한다고 했다. 당장 다음 달 월세 걱정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생전 해보지도 않던 세차 일을 시작했다. 손과 발은 항상 물에 젖어 퉁퉁 불었고 가늘던 손가락은 어느덧 굳은살이 박이고 손마디는 굵어졌다. 하루하루가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도 참아 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고통과 절망이 뼛속까지 몰려 와도 이를 악물었다. 당장의 생계 수단은 이 일뿐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감내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오후가 되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데, “엄마! 보고 싶었어!”하며 달려오는 아들을 보면 웃을 수 있었고 힘도 났고 용기도 생겼다. 주인아주머니의 배려로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바로 퇴근할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 시간, 아들의 해맑은 미소에 하루의 모든 시름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몸에 문제가 생겼다. 허리가 너무 아파 병원을 찾은 내게 의사는 디스크라고 했다. 하늘이 하얘졌다. 당분간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우선 약물 치료와 주사 치료부터 해보고 호전되지 않으면 수술까지 생각하라고 했다.

    

 

다시 일어섬

  당장 먹고 죽을 돈도 없는 마당에 치료비에 게다가 수술이라니, 눈물이 났다. 우두커니 앉아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아들이 따라 울었다. 조막만한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며 “엄마, 울지 마.” 한다. 얼른 눈물을 닦았다.

 

  이혼할 때도, 단칸방으로 이사 올 때도,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을 때도, 이보다 더 심한 고통과 시련이 계속 나를 시험했지만 그래도 울지 않았던 나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아팠나 보다. 그동안 참아 왔던 설움이 봇물 터지듯이 한 순간에 려왔다.

 

  아들한테 미안한 생각이지만, ‘신이여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요, 차라리 저를 거두어 주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별의 별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눈앞에는 온통 새까만 절망의 벽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러면 아이가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마, 울지 마.” 하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순간의 생각이었지만 아이에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아이 앞에서 다신 울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다음 날 주인아주머니께 당분간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안타까워하며 걱정해 주는 아주머니가 고마웠다. 그러면서 “내가 동사무소 사회복지사와 잘 알고 지낸다.”며 내 얘기를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동사무소에서 가정방문을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가정방문 상담 후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난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었다. 의료비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고마웠다.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다시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하며 조금씩 허리 통증이 나아질 즈음 동사무소 사회복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역자활센터 자활 사업단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고. 봉제 일을 하는 곳인데 앉아서 하는 일이라 허리에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했다. 기술도 배우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에 흔쾌히 일을 하겠다고 했다.

 

  인천 남구 미추홀 지역자활센터 담당 팀장과의 상담 후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봉제 일을 하는 미추패션 사업단에 첫 출근을 했다. 현장 분위기는 밝았고 언니들도 따뜻하게 반겨 주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툰 것도 많았고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차근차근 알려주고, 재봉틀 다루는 법도 친절히 설명해 주는 언니들이 고마웠다. 장녀던 내게도 언니들이 생겼다.

 

  처음엔 재봉틀이 겁도 나고 바늘에 찔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했다.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이 생겼고 일하면서 보람도 느껴졌다.

 

  “혼자서 아이 키우느라 힘들지?” 하며 담당 팀장님은 내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원을 못가는 아들을 위해 매년 EBS 교재를 지원해 주었고, 지역사회 내 푸드뱅크를 통해 식료품 등을 수시로 지원해 주었다. 또한 한부모 여성 가장 건강 검진권도 신청해 주었다. 참 고마웠다.

 

  일이 제법 손에 익어 갈 무렵 팀장님이 ‘내일키움통장’이라는 것이 있다며 가입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내가 입금하는 금액에 사업단에서 발생하는 수익금 일부를 가산해서 3년 후에는 목돈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빠듯한 살림에 적금은 엄두도 못 냈던 내게 새로운 목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재봉 기술도 늘었고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이것저것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돈 주고 학원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난 돈 벌면서 배웠다. 3년이 흘러 사업단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팀장님이 사업단 언니들과 나를 불다.

     

 

활 기업 창업을 제안 받다

  팀장님은 자활 기업 창업을 제안했고, 나는 거절했다. 사업단에서의 안정적인 삶에 안주해 있던 내게 창업이라니. 두려웠다. 무슨 돈으로 창업을 할 것이며, 말이 자활 기업이지 공동 사업이었다. 동업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 보다. 하지만 센터장님의 적극적인 지지와 훈련 교육, 팀장님의 끝없는 격려에 힘입어 사업단 언니들과 나는 용기를 내어 도전 정신을 갖고 창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센터 창업 지원금 5천만 원과 기금 대출 6천만 원으로 기계, 원단, 자재 등 비품을 구입하고 작지만 번듯한 상가도 얻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새롭게 시작했다. 드디어 사업자가 된 것이다.

 

  사업단 이름은 올바른 실력, 바른 실을 뜻하는 바실패션으로 센터장님이 정해 주었고 남구청 팀장님 이하 직원, 담당 팀장님의 아낌없는 지원 속에 사업자 등록을 내고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조촐하지만 개업식을 열었다. 반드시 마음먹은 대로 이루리라 모두가 결심했고 파이팅을 외쳤다.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울음도 나왔지만 이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들이 4살 되던 해에 혼자되어 외롭고 힘든 모든 고통을 홀로 감내해야 했고, 작은 가정이지만 힘들게 꾸려 온 지난 세월 동안 아들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이제 나도 누군가 앞에서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는 여성 가장이고 사업가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내 삶의 버팀목이 되었고 행복을 위해 봉사도 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 사업은 언니들과 계속해 오던 일이라 어려움은 없었다.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되었다.

 

  그해 5월, ‘내일키움통장’도 만기가 되어 1천2백만 원이라는 큰돈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LH주택공사에 전세 임대를 신청했다. 계약금이 없어 엄두도 낼 수 없던 전셋집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다달이 임대료를 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집다운 집으로 이사했다며 좋아하는 아들을 보니 나 또한 행복했다. 더 이상 월세 방을 전전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덧 창업한 지도 두 해가 다 되어 가고 있다. 아직 큰돈을 벌만큼 사업이 번창하진 않았지만 지역자활센터와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탄탄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일도 꾸준히 하고 있다.

 

  자활 기업이지만, 그리고 창업을 하고 운을 하는 것이 힘은 들지만 노력 없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에 이제 한 걸음 옮겨 두 걸음이 시작되었다. 사업을 확대해 스포츠 용품 제작과 애견 용품 사업에도 도전 중이다. 나아가 앞으로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꿈꾸며 계속 도전할 것이다. 인생도 사업도.

 

  나 같은 사람도 일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또한 지금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싱글 맘, 싱글 대디들이 한걸음 더 나아가길 바라며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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