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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센터와 함께한 나의 두 번째 인생 이야기
  • 년도2018
  • 기관명진안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수현
  • 조회수818

  나는 베트남에서 베트남 사람으로 살았던 팜튀티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사람이 된 김수현입니다.

 

  베트남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모국이었지만, 동시에 어떤 희망도 꿈꿀 수 없었던, 그저 가난한 현실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농사일,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도 작은 액세서리 하나 맘대로 살 여유가 없었던 가난한 현실. 그런 베트남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동네에서는 나보다 어린 많은 여자들이 결혼하러 한국으로 갔고, 나도 내 나이 스물여덟인 2005년에 한국에 가기 위해 결혼 정보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20명이 넘는 남녀가 이틀 동안 어울리며 짝을 찾았고, 한국 남자 한 명이 나를 맘에 들어 했습니다. 나도 그가 싫지 않아서 이틀 만에 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서류를 준비해 드디어 온 한국. 한국어가 서툰 내게 한국은 설렘의 대상이기보다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렇게 낯선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만난 남편은 건강해 보였습니다. 이틀 동안 자신의 아픈 모습을 보여 주거나, 아프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겠지요. 남편은 간경화 환자습니다. 한국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간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3개월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병원을 다녀야 했고, 일상생활도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9개월 만에 아이를 임신했고, 어떻게든 남편이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약을 먹으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결혼 생활이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났지만 여전히 생활은 힘들었고 남편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어 하던 제게,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다닌 다문화센터에서 진안 지역자활센터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곳에는 저처럼 결혼 이주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사업단이 있다고 해서 고민 없이 2010년, 자활센터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자활센터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제게 일과 함께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해 주었습니다.

 

  수급자던 남편에게 나라에서 주는 돈은 모두 남편 통장으로 들어가 술 마시는 데 다 썼지만 자활센터에서 번 돈은 내 이름으로 된, 내 통장에 입금되었으므로 아이를 보살피는 데 필요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활센터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해 국적을 취득했으며, 자활센터에서의 일은 하루하루가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인 2012년 10월, 간경화가 심해진 남편은 제 나이 서른다섯, 결혼 6년 만에 결국 내 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떠나자 내게는 돌봐야 할 늙으신 시어머니와 6살 딸아이만 남았습니다. 비록 아픈 남편이었지만 내게는 딸아이의 아빠고, 내 한국 생활의 유일한 끈이었던 남편이 떠나자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한국에서 내가 살아가며 견딜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장례를 마친 내게는, 출근해야 할 직장이 있었습니다. 자활센터였습니다. 자활센터로 돌아가니 내게는 할 일이 있었고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활센터로 출근하는 날 아침, 사업단 팀장님이 내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혼자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활센터와 사업단 동료들이 있으니 울지 말라고.

 

  자활 사업을 하는 동안 남편 말고도 한국과 연결되는 끈이 생겼고, 그것이 더욱 두꺼워져 있었던 것을 내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한참을 더 울고 나서,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타국에서 외롭게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떠나고 나는 다시 힘을 냈습니다. 곁에 있는 동료들과 웃고, 일하고, 교육받으면서 한국어도 늘고 사업단에서 하는 바느질과 재봉 실력도 늘어 자활센터에서 주는 우수 참여 주민상도 탈 만큼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이었고 자활 사업 안에서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안정된 생활을 꿈꿨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진안 지역자활센터 사례 팀과 꾸준히 상담을 했습니다.

 

  때마침 내일키움통장사업 덕분에 취업과 목돈 마련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내게 너무 큰돈이었지만 10만원씩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저금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내일키움통장사업의 돈을 받기 위해서는 자활 근로 사업을 끝내고 취업을 하는 것, 내가 낸 돈만 돌려받고 자활센터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난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자활센터에서 일하는 동안 자활 사업은 내게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자신감과 용기로 나는 취업을 결정했습니다.

 

  2017년 3월, 저는 드디어 늘푸른농조합에 취업했습니다.

  이곳은 면접도 필요 없는 단순한 일용직 직원을 구하고 있었으나 자활센터의 도움으로 면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면접을 통해 제 자신을 소개할 기회를 가졌고, 성실하게 일했던 자활센터 근무 현황 자료 덕분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면접을 보면서 어느새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한국 사람, 김수현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벌써 취업한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직장 생활은 자활센터에서의 생활처럼 따뜻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햇볕과 적당한 물을 먹고 잘 자란 나무가 가뭄에 잘 버틸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자활센터에서의 경험과 교육으로 지금의 직장 생활을 잘 지탱하고 있습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저는 이제 수급자가 아닙니다. 나라에서 주는 경제적 보탬 없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제게 있다고 판단해서겠지요. 하지만 저는 수급자가 아닌 지금,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힘들 때 자활센터를 만나, 세상에 나올 양분을 몸에 지니게 되었고, 이제 세상에서 스스로 살고 있고, 또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저는 지금 더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5학년인 딸아이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 엄마로, 매일매일 출근이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힘들기도 한 직장인으로, 한국에서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는 타국에서 온 사람에서 한국 사람으로, 기초 생활 수급자에서 일반인으로, 자활센터 참여 주민에서 직장인으로 자활했습니다.

 

  지역자활센터에 다니면서, 그리고 자활 근로 사업에 참여하면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었고, 아이와 함께 먹고살 수 있었으며, 내게는 없을 것 같았던 미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한국에서 아이와 함께 당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걸어 주었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잘 지내냐고, 직장 생활은 어떠냐며 안부를 물어주는 진안 지역자활센터에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 스스로 내 삶을 살아가는 중이며, 앞으로도 내 삶을 스스로 그려 가며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나는 지금 행복한 한국사람, 김수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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