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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또 다른 도전을 하려고 합니다
  • 년도2018
  • 기관명목포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춘남
  • 조회수794

  나무마다 서서히 오색의 색깔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계절, 나뭇잎에 맺힌 이슬방울의 흔적이 영롱하다 못해 눈이 시려오는 가을의 아침이다.

 

 

남편과의 이별

   7년 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더운 불볕더위에 아들 둘을 동시에 군 입대 시키기 위해 남편과 신병훈련소에 갔다.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던 남편의 모습, 그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애타게 보고 싶어 했던 두 아들!, 군복 입은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남편은 나이 오십에 우리 곁을 떠났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만큼의 세월동안 만성신부전증으로 투병생활을 해 오던 남편이 하늘여행을 떠나기 위해 힘들어 하던 날,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마약 진통제며, 각종 진통제 종류를 다 투여 했지만 완화 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진통은 계속 되었다.

  어머님이 마지막 가는 아들 모습을 보고 싶다며 병원에 오셨지만 남편은 “이런 모습을 어머님께 보여 줄 수 없다.”며 정신이 혼미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고통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님께 잠잔다며 그냥 가시라.”고 말하라고 할 때는 뭐라고 표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진통이 계속 되었고, 중환자실의 면회는 제한되어 있었다. 사정을 해서 한 두 시간 면회가 허락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군복 입은 두 아들이 왔을 땐 남편은 이미 혼수상태, 아니

심장이 멎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을 셋이나 남겨 둔 채 남편은 어머님과 우리 가족들의 가슴에 흔적을 묻고 그렇게 머나 먼 여행을 떠나가 버렸다.

 

   사랑하는 남편을 머나 먼 곳으로 여행 보낸 지 7년이 다 되어 가는데, 몇 십 년이 된 것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언제나 남편 핸드폰에 1번 “우리 집 왕비”라고 저장해 놓고, “항상 우리 서로 아이들 보는 앞에서 행복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 주자”고 했던 사랑하는 남편이 지금이라도 옆에 와 살포시 손을 잡아 줄 것만 같다.

 

 

가장이 되다

   나와 남편은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마음을 이해하며 신앙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고, 조그만 하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자의 길”을 갔다.

 

  그런데 결혼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고 해서 병원을 갔더니 “신장기능이 90% 이상 망가져서 작은 병원에서는 치료 할 수 없으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파란 하늘이 왜 노랗다고 표현을 하는지를 실감 할 수 있었다. 당시 큰 애가 3살, 돌이 갓 넘은 둘째, 그리고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이 어린 것들을 어디다 맡기고 병간호를 해야 될까를 고민하다가 둘째는 할머니 댁에 맡기고, 임신 4개월 된 몸으로 큰애와 함께 병원의 작은 보조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며 남편 병간호를 시작했다. 대학병원은 늘 절박한 환자들이 오고가는 곳이라 아비규환의 현장, 전쟁터와 같은 곳이었다.

 

  남편은 4시간에 한 번씩 복막투석을 하게 되어 목회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사표를 내고 남편 고향인 목포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다섯 가족의 여성가장이 되었다.

 

 

지역자활센터와의 만남

   남편의 병간호를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고정적으로 일하는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동사무소에 가서 상담을 하였다. 동사무소 사회복지사님의 권유로 지역자활센터를 알게 되었다.

 

  지역자활센터 팀장님과 상담을 통해 “사회적 일자리형”인 어린이공원청소사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린이공원 청소사업은 목포시에 있는 어린이공원 50개소를 8개팀으로 나누어 순회하며 관리하는 일이었다.

 

  자활센터에 들어와 일을 하며 그 동안 병원 생활로 인해 힘들었던 몸과 마음도,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회복 할 수가 있었다.

 

   처음엔 동료들과 낯설었지만 엄마처럼, 때론 언니처럼 서로를 보살펴주며 잘 대해 주었다.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도 있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순수하면서도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추운 겨울 눈 덮인 앙상한 나뭇가지 곁에서 보온도시락으로 점심을 함께 먹으며, 추웠지만 행복을 이야기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꿈을 이야기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일하던 중 남편과 이별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는데 지역자활센터의 직원과 동료들은 나에게 격려와 위로를 통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청소사업으로의 전환

   2010년, “현재 위치에서 머물러 있기보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며 시장진입형인 청소사업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팀장님께서 사업단 전환을 권유했다. 앞으로 전문적으로 일을 배워 놓으면 경험도 쌓이고 취업과 연계도 용이할 거라는 생각에 청소사업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청소사업으로는 학교청소 정기파견, 입주청소, 학교대청소 등을 하였는데 나는 학교청소에 파견되었다.

 

  학교 청소는 상주 파견근무라 처음에는 초등학교 전체를 혼자서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고, 두렵기까지 하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힘겹게 쓸고 닦고를 반복했다. 내 집 화장실 한 곳도 청소하기 귀찮은데 수백명이 사용하는 100여 개가 넘는 화장실을 깨끗이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해보면 술 취한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아이들이 사용했던 흔적인지, 토사물과 일보고 물을 내리지 않아 주변이 냄새로 진동할 때는 너무 힘들고 역겨워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나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초등1년 남자아이가 급하게 변을 본다는 게 그만 옷에 실례를 한 일이 있었다. 뒷마무리와 함께 아이를 씻긴 후 선생님한테 말씀드렸다.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처리할 수 있었고, 그 아이가 벌써 5학년이 되었다. 그 아이와 나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만날 때마다 감사의 인사를 한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또 변비 때문에 힘들어 울고 있는 아이에게 시원하게 해결될 때까지 그 옆을 지켜주었던 일도 있었다.

 

 

청소자활기업 스쿨클린 출범

   그렇게 청소사업에 3년여를 참여하고, 2012년 11월 학교청소사업에 참여했던 인원 중 6명이 함께 뜻을 모아 ‘청소자활기업 스쿨클린’이라는 자활기업을 창업하였다. 일자리창출형 자활기업이라 자활기업의 대표로서현장일을 병행하며 업무를 하고 있다.

 

  자활기업의 일원으로써 내가 하고 있는 학교청소일과 동일하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내가, 우리가 주인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또 다른 하나의 일자리가 생긴다.’라는 주인의식도 생겨났다. 6명에서 10명으로 일자리를 늘리며 우리는 현장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청소사업에서 자활기업까지 학교청소를 하며 7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났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그 지겹던 일들이 나의 작은 수고로움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뿌듯한 보람도 있었다.

 

  ‘청소라고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과 기술로 하는 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제 나름 요령도 생겼다. 남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하찮은 밑바닥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며 자긍심마저 느낀다. 그리고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사회복지학과 진학 및 자격 취득

   30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늘 간직해 온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이 들어 불가능하게 느껴졌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상담할 때마다 팀장님과 주위 직원들의 권유에 처음에는 ‘이 나이에 내가?’ 하며 반신반의 했지만 용기를 내어 입학원서를 쓰고 ‘도전해 보자.’는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2013년, 평소에 사회약자인 아동, 노인, 장애인 관련 공부를 하고 싶어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쉽지만은 않았지만 2년

동안 한 번의 결석 없이 교수님들의 강의에 집중 할 수 있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어버리게 하는 행복한 순간이었으며, 2015년 2월 사각모자를 쓰고 졸업사진을 찍는 순간 감격스러워 한없이 울었었다.

 

   20여년 동안 병중에 있었던 남편과 세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입히고 먹여야 하는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에 늘 긴장하며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 나는 대로 자격증에 도전했었다.

 

  한식조리사 자격증, 요양보호사 1급 자격증에 이어 보육교사, 사회복지사, 돌아보면 ‘아, 나도 헛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내 자신이 대견해지기도 했다.

 

 

이주민 쉼터에서의 봉사활동

   낮에는 학교 청소를 하고 밤에는 남편폭력이나 가정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이주여성들을 보호해 주는 ‘이주민인권센터’의 다문화가족, 외국인들의 쉼터에서 1년 가까이 봉사를 하고 있다. 남편 폭력 때문에 집을 나와 경찰서를 통해 인계되어 온 이주여성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해 주고, 심리적 안정을 위해 상담도 해주는 곳인데 타국에서 힘들게 생활하는 그들에게 미약하게나마 힘이 되어주고 조력자가 되어 주고 싶다.

 

 

자녀들의 성장

   청년실업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시대에 우리 아이들은 아무런 말썽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님 추천으로 바로 취직이 되었다. 큰 딸은 웹디자이너로 전문 분야에서 일하고, 큰 아들은 컴퓨터를 전공하여 각 기업이나 은행에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고 네트워크를 설정해주는 일을 하며 인도네시아 지사에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다. 개구쟁이 말썽꾸러기 막내도 목포 근교에 있는 “무안 공항”에 취직이 되어 소방관련 일을 하는 전문인으로 열심히 일하며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한 순간의 필름처럼 지나가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무수한 고뇌, 인내, 괴로움, 아픔이 있었기에 그 보람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새로운 꿈을 꾼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팀장님, 실장님, 서로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청소자활기업 스쿨클린의 우리 가족들이 있었다. 죽을 만큼 힘들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손 내밀어준 ‘목포지역자활센터’가 있어 꿈과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았고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희망키움통장을 불입한 지 2년, 1년 후에 나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계획하려고 한다. 내가 힘들 때 기초수급자로서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남을 위해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자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깊이 있는 언어로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나의 “삶”의 발걸음을 한 발짝 내 딛을 준비를 해 본다.

 

삶이 힘들고 어렵고 두렵다 해서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힘든 절망의 순간을 잘 이겨 내고 나면

우리의 존재와 가치는 더욱 성숙해지고

절망의 순간을 잘 대처하고 나면

“삶”의 지혜와 보람이 한 웅큼 쌓이게 됩니다.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절망과 환희도 모두 나의 몫이며,

꼬~옥 끌어안고 묵묵히 걸어야 할 길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행복한 바보의 지혜로운 삶”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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