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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 두 번째 문을 두드리다
  • 년도2018
  • 기관명익산지역자활센터
  • 제출자나혜옥
  • 조회수865

나는 김제에서 태어나 22살의 철부지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저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저녁을 차리고 남편과 따뜻한 저녁식사 시간을 가지고, 남편과 사랑하는 자식과 가지는 주말 휴일의 여행 등...,

 

나름 행복한 상상을 하며 이른 나이에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결혼 전과 너무나 달라진 신랑, 틀어진 고부관계는 자꾸만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말다툼만 하던 싸움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가정폭력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아이들까지 구타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아빠의 퇴근시간 만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점점 아빠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정서불안에 웃음을 잃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틀어진 가족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상담도 받고, 주말이면 같이 있고 싶어 여행도 다니는 등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끝은 항상 상처만 남았다.

 

이렇게 12년을 살면서 상처만 깊어진 아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던 어린 엄마인 나는 결국 혼자의 삶을 결심하게 되었다. 내 나이 32살,두 아이의 엄마가 이혼 후 가지고 있던 재산은 500만 원이 전부였다. 작은 원룸으로 이사 온 첫날,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에 울먹이며 큰 아들에게 방도 하나인 작은 집으로 이사 오게 해서 미안하다 하였더니, 큰아들은 뜻밖에도 이 집이 좋다는 말을 나에게 했다. 이혼 후 막막해 했던 나에게 아들의 말은 엄청난 힘이 되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하였다.

 

다행히 아는 지인의 소개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지는 않지만 우리 세 가족이 먹고 살기에는 괜찮을 정도의 월급은 되었다. 하지만 주, 야 교대 근무와 주말에도 일을 해야 했기에 가정에는 조금씩 소홀해 지는 시간이 많아 졌으며, 초등하고 5, 6학년인 아이들이 집에서 엄마 없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 져 자연스럽게 밥을 굶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아이를 위해서 이혼을 결심했던 내가 오히려 애들을 방치하고 가정에 소홀해 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지금처럼 생활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인생에 또 다른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다행히 내가 사는 곳에는 한부모가정 및 저소득층에게 자립을 도와주는 지역자활센터가 있어 그 곳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익산지역자활센터에 들어와 택배사업단에서 일하며 남는 시간을 아이들에게 할애할 수 있어 나름대로 만족한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의 시설에 오랫동안 있을 수 없기에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계획하며 꾸준히 상담을 하였다. 남편과 시댁복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사람 복이 많았던 것 같다.

 

익산지역자활센터의 도움으로 창업을 하게 되어 이제 스스로 독립을 했다고 믿었다. 내가 선택한 창업 아이템은 과일가게였다. 유동인구가 있으면서도 주변에 과일가게가 없었던 아파트 및 상가 주변에 가게를 열었다.

 

처음에는 나름 고생한 만큼 수익도 있고, 애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인생의 2막을 시작했다. 당도 높고 신선한 과일들을 진열하면서 싹싹한 나의 성격이 나오다보니 단골도 생기고 동네의 사랑방 장소가 되어 가면서 여러 사람에게 입소문으로 자리를 잡는 듯 했으나 여자 혼자의 힘으로 역부족인 일들이 많았다.

 

새벽에 일어나 과일을 가져와야 했고, 늦은 시간 술에 취한 취객으로 부터 이유 없는 시비에 하루 이틀 시달리면서 예전의 힘든 상황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결국 개업한지 1년 후 가게는 문을 닫아야 했으며, 이혼 후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에게 너무나 벅찬 빚까지 생기게 되니 우울증까지 왔으며 모든 걸 끝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힘들어 할 때 마다 두 아이들은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아이에게만은 부끄러운 엄마로 남기 싫어서 다시 한 번 익산지역자활센터에 문을 두드렸다.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나는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했으며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적은 금액의 자활 급여를 받으면서도 아이들이 커나가는 것을 보니 아이들에게 대학교를 졸업해서 자랑스럽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 이혼까지 하면서 힘든 시기를 겪다보니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원광보건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다니기로 결심을 하였다.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새벽에도 쉴 수가 없었다. 남들이 아직 하루를 시작하기 전인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며 우유배달로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였다. 우유배달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있을 때는 전봇대에 기대어 잠이 들기도 하였고, 계단을 뛰어 내려오다 굴러 넘어져서 우유가 여기저기 흩어지기도 하였다.

 

낮에는 자활센터에서 주어진 업무를 하고 저녁에는 야간 대학을 다니는 등 24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활용 해야만 했다. 바쁘고 힘든 하루하루 였지만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 거라는 희망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2년의 시간이 흐르고 졸업식 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큰아들이 용돈을 아껴 사온 꽃다발을 건네주며 나를 안아주었고, 막내아들은 그날 저녁에 축하 편지를 건네며 “자랑스러워요, 우리 엄마”라고 수줍게 말하였다. 그동안의 고생과 눈물이 헛되지 않게 느껴지면서 두 아들이 너무 든든하고 뿌듯하였다.

 

졸업의 기쁨도 잠시 나는 다시 한 번 현실의 문제에 직면 할 수밖에 없었다. 익산지역자활센터에서 내가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한정이 되어 있었기에 미래에 대해 틈틈이 고민을 해야만 했다.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경제적인 문제가 나의 마음을 더욱더 무겁게 하였으나 다행히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내일키움통장에 가입하게 되었다. 내일키움통장은 자활을 떠났을 때 나만의 아파트를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첫째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게 되는 상황이어서 탈 수급에 대한 가능성이 커지다 보니 나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고, 일반시장 취업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활센터의 도움을 받아 취업 자리를 알아보았고 자동차 부품 만드는 곳에 일반취업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교대근무의 힘든 근무조건이지만 자활센터에서 받던 80만 원의 급여를 훌쩍 뛰어 넘는 급여를 손에 쥘 수 있었고, 첫째아들도 졸업 후 순조롭게 취업이 되어 생각보다 빨리 탈 수급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활센터를 떠나 일반 시장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지만 노력한 만큼 경제적 어려움이 어느 정도 해결 되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을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3D 업종이긴 하나 직원 복지며 급여수준이 높은 편이여서 아이들과 편히 쉴 수 있는 나만의 집에서 아이들에게 주지 못했던 추억을 만들고, 자동차를 구입하여 아이들과 하지 못했던 여행을 하며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나의 작은 꿈을 이루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라 생각했다.

 

취업 후 올해 드디어 나의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구입하게 되었다. 비록 대출을 받았지만 우리 세 식구만의 작은 보름자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힘들게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잠들 때면 나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이 흐르곤 한다.

 

이혼 후 9년, 나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때로는 행복했으나 반면 지옥의 끝을 보는듯한 고통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삶을 포기 하지 않았고 나의 선택이 어리석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을 했었다.

 

지금의 나는 두 번의 용기로 자활의 문을 두드린 결과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3막은 이렇게 시작 되었으며 지금도 쉼 없이 노력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가며 생활하고 있다. 앞으로 내 앞에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지금껏 그래 왔듯이 힘들 때나 기쁠 때나 항상 똑같은 마음으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노력하며 정면으로 돌파할 것이다.

 

내 인생의 드라마는 아직 ~ing 진행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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