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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 끝에서 진짜 나 만나기
  • 년도2018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전인숙
  • 조회수837

   어려서부터 나는 말 그대로 ‘우울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 새벽부터 바닷가로 나가 밤늦게까지 조개를 캐어 팔며 하루하루 힘들게 6남매를 키워나가셨던 어머니의 긴 한숨과, 매일 술을 마시고 온갖 화풀이를 가족에게 하셨던 아버지의 고함과 한숨 섞인 신세타령이 가난한 집구석에 그득그득 박혀 있었던 어린 시절 기억은 3남 3녀의 막내인 나를 숨 막히게 하고 주눅 들게 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중학교 가정 선생님과의 만남은 악연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로 “나는 아무것도 잘해내는 것이 없고,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각인 되었습니다. 나 스스로를 평가할 때 아무 쓸모없는 존재,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스스로를 판단하며 남들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린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엄마와 나는 많은 갈등을 하였습니다. 큰 오빠는 아버지 대신 장남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엄마와 바닷가를 나가서 조개를 캤습니다.

 

  큰 언니는 가난이 싫어 일찍 시집을 갔고, 작은 언니는 공장에, 둘째 오빠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상황에도 대학교 시험을 몰래 보고 와서 대학을 다니고 싶다며 으름장을 놓고, 막내 오빠가 고등학교를 다니는 상황에서 나까지 고등학교를 간다고 하니 엄마는 속이 상해서 앓아 누우셨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 아버지는 딸인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 들기를 바라셨기에 상급학교 진학을 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저의 외침을 못 들으신 듯 행동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몹시도 미웠지만, 한편으로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 보이고 안쓰러웠기에 고등학교를 간다고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낮엔 일하고 밤에는 고등학교 수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천에 위치한 카스테레오를 만드는 공장에 여공으로 취업하면 주공야독이 가능하였기에 엄마의 편찮음과 아버지의 무관심, 가난한 집을 뒤로 한 채 크지도 않은 나의 짐을 버스에 싣고 고향을 떠나왔습니다.

 

  버스 밖에 서있던 엄마에게 손을 흔들며, 마음속으로는 울고 겉으로는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를 위로하였습니다. 엄마는 ‘우리 막내,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며 적은 월급이지만 적금도 들고 생활을 하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몸이 차서 한의원에서 임신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진맥을 받은 터라 첫 아이의 임신은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IMF가 행복해 지려는 나의 삶을 또 한 번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실직자가 되었고 연년생 두 아이의 분유, 기저귀는 커녕 우리부부는 매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던 남편은 주차장 알바를 하면서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우유대리점을 한다는 계획을 진행하였습니다. 내가 가족의 돈까지 빌려서 무리하게는 하지 말자고 해도 남편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시작한 우유대리점, 젖먹이 두 아이를 데리고 새벽부터 사무실로 출근해 밥을 하며 뒷바라지를 하였고 남편도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매일 현금을 내 손으로 만지니 부자가 된 느낌이었으나 대형 마트가 생기자 점점 적자가 시작되었습니다.

 

  차도 속을 썩이고 계속 적자가 불어나 우리의 꿈이었던 대리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고, 잔금으로 가족에게 빌린 돈을 갚아도 남은 건 채무뿐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업에 실패하고 또 다시 고개를 드는 남편의 두 번째 사업구상은 다른 사람들과 동업으로 짜장면 장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업은 하지 말자고 급구 말렸지만 남편은 꿋꿋하게 일을 벌였습니다. 음식장사는 음식을 만들어 본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남편은 동업자의 말에 푹 빠져 “형님이 음식을 만들고 나는 배달을 하면 된다.”고 우겨대며 두 번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인 나는 두 아이는 학교에, 막내는 어린이집에 보낸 후 가게에 나가 전화주문을 받으며, 홀에서 일하며 주방에서는 면을 삶는 보조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식재료 값이 우루루 올라가 장사는 잘 안되었고, 인건비 줄 돈이 없어서 급한 대로 대출을 받아서 쓰다 보니 적자가 이어져 2년을 유지하다 버틸 수가 없어서 접었습니다.계속 사업구상을 하는 남편이 너무 싫었고 미웠습니다.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남편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 6개를 모른 척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니 참고 견디며 아이들을 잘 키워보자는 마음으로 생활하였지만 현실은 궁핍함과 우울함뿐이었고, 어둠의 터널을 걷고 있는 내 인생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자꾸 일을 벌려 실패를 하니, 나라도 나서서 우리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주민 센터로 가서 살 수 있게 일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여 2009년 10월 자활센터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상담을 받고 도우미사업단에 소속이 되어 어린이집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아이들과 생활하며 잠도 재우고 청소도 하는 도움 선생님으로 세 달을 하고 나니 사업단이 종료 되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도움선생님으로 계속 근무를 하고 싶었지만 보육교사자격증이 없던 나는 기대를 접어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자격증이 있으면 취업에 용의할 것이라는 상담팀장님의 말씀에 인큐베이팅사업단에 소속이 되어 요양보호사 과정을 훈련받고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야간에는 요리학원에 다니며 자격을 취득하여 학교 급식소에 지원을 하였지만 키가 작고 몸이 약해서 할 수 있겠냐며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학교급식소를 목표로 잡고 자활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요리학원을 다니며 힘들게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하려고 했던 목표와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왜 안 될까하는 생각에 자아감이 상실되었을 때 사무실에서 행정업무 보조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자신이 없어 몇 번을 망설였지만 팀장님의 격려로 큰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습니다. 전화응대, 서류작성 등을 하나하나씩 배워가며 행정업무를 익히던 중 센터에서 대학진학 설명회를 진행하였습니다. 현재의 삶이 무거워 대학이라는 곳은 감히 들어갈 수 없다고 접었는데, 현재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면서 조금씩 함께 가보자는 상담 팀장님의 지속적인 설득으로 화신사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어렵고 힘이 들어 1학기 때 포기하려는 고민도 하였으나 팀장님이 잡아주셔서 학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의 즐거움을 통해 행복감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농협으로부터 등기우편 최후 통지서가 왔습니다. 남편이 우유대리점을 하면서 맞보증을 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유대리점을 접으면서 보증금을 해결 했었는데 상대방은 이자도 안내고 10년 동안을 버틴 것이었습니다. 매일 걸려오는 전화독촉, 채무통지서를 보면서 마땅한 해결방법을 찾지 못해 불안한 하루하루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센터에서 소양교육으로 신용회복위원회를 초청하여 채무에 관한 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교육을 받았지만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내가 처한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 내용이 절실했고 마음속으로 상담을 받아 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남편을 설득하여 신용회복위원회에 가서 접수를 하고 기다려 ‘맞보증 금액은 오백정도인데 이자를 안내어서 총 천만원의 돈을 갚아야 되는 상황이나 우리는 3년의 기간 동안 한 달에 사만원정도의 금액을 갚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는 결과 통지를 받았습니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교육이 아니었다면 해결을 하지 못하였을 텐데 자활센터에서 신용정보 교육을 듣게 됨으로써 해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자활센터에서 소양교육을 의무적으로 참석시키는지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 나에게 자활은 한 줄기 빛이며,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기회의 장소였습니다. 자활이라는 복지서비스가 없고 자활이라는 곳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거에 얽매여 매일 우울함과 남편을 원망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을 겁니다.

 

   자활 참여를 통해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닌 나도 할 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작지만 자활에서의 근로활동 수입과 자활에 계신 팀장님들의 도움으로 장학금 및 기타 후원 연계를 통해 아이 둘을 대학에 입학시킬 수 있었습니다.

 

  나 또한 ITQ, 요양보호사, 한식요리사, 스포츠마사지, 대학입학, 상담심리 등 다양한 자격증 취득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으며, 자활한마당, 얼렁뚱땅캠프, 문화공연 등을 통해 힐링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졸업을 못할 것 만 같았던 내가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센터의 배려로 사회복지 실습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센터 사무실 행정보조 일을 하면서 팀장님들의 업무처리 능력에 존경심을 배웠고, 두렵지만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도전의식도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의 삶을 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울한 인생, 쓸모없는 인간, 낮은 자존감에 갇혀 지냈던 어둠의 시간터널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나를 자활이라는 한 줄기 빛이 성장시켜 주어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진정한 나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나는 이제부터 앞으로 더 나아가는 삶을 살 것이라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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