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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소녀 꽃 중년으로 다시 피다
  • 년도2018
  • 기관명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이현선
  • 조회수881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상을 폈다. 종이와 펜을 준비하고 가만히 내려다본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스스로 기억상실 환자가 되어 살아 왔는데...

 

   나는 남편집의 반대로 무턱대고 동거부터 시작해 아이를 낳았다. 내가 부모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였다. 참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그것은 넓디넓은 이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픈 내 어린 시절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 세상물정 몰랐던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안도감과 위안도 잠시뿐..., 아이를 낳고 누구나 그럴법한 평범한 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접대라는 명분을 내세워 외박을 시작했고, 뜬 눈으로 기다리는 날이 거듭되었다.

 

  어린 아들을 사이에 두고 고함이 오가는 싸움 끝에 급기야는 집어 던진 물건에 맞아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으나 부모형제 하나 없는 나는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마음 깊은 한 편에 억울함 막막함 슬픔이 켜켜히 쌓여만 갔다.

 

   남편은 사업이 핑계였을 뿐 술과 여자에 빠지더니 심지어 도박까지 손을 댔다. 남편은 도로공사를 하는 건설업을 했는데 경기가 좋지 않은 때에 저러다 사업이 제대로 될까 싶어 조마조마 했다. 아니다 다를까, 끝내 부도가 났다.

 

  여기저기 빚을 쓴 채 한 마디 말도 없이 나와 아들을 팽개치고 사라졌다. 중국여자와 도망갔다는 소문만 무성히 들려왔다. 결혼 후 애써 모아 산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세간 살림살이에는 붉은 딱지로 도배가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카드사에서도 돈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를 하며 욕설을 해댔다.

 

  “남편의 배신에 남겨진 빚과 독촉... ”

  “다섯 살짜리 아들과 남겨진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나...”

 

   “이곳은 지옥이다.” 다섯 살짜리 아이를 혼자 데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다는 생각에 소주를 세 병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평소 입에도 대지 못하는 술에 취해 용기가 났을까? 손목을 그었다.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감당하기 힘들었고 도망치고만 싶었다.

 

   아이의 울음소리, 떨어지는 피에도 아무 감각이 없었는데 아이의 눈물 한 방울이 주체할 수 없는 통증으로 내 닫힌 마음에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그제서야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아픔보다는 부끄러웠다.

 

  치료실에서 마취도 안하고 한 바늘씩 손목을 꿰맬 때 한 땀 한 땀 다짐했다.

  다신 부끄러운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경매인이 딱한 내 처지를 알고 고맙게도 삼백만 원을 주어 다행히 원미동에 월세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주민센터의 소개로 간병교육을 받고 간병사가 되어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 당시 40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남자환자들이 심한 농담도 했지만 무시했다.

  난 엄마니까...

 

  그 후 재가요양보호사로 가정집에 파견되어 어르신을 돌보는 일을 했지만 어르신들과의 생활이 점점 지쳐만 갔다. 어르신 집과 우리 집을 멍하니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얼굴빛은 흙빛으로 어두워져 갔고 매사에 짜증이 늘어갔다. 어르신 집을 들락거리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괴로웠다.

 

  “참자, 참자, 참아야한다 !”

 

  웃음으로 때우며 4년 동안 일하고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다짐했지만 웃음소리는 없어지고 입만 뻥긋거렸다. 웃어도 눈은 그대로인 삐에로,난 “삐에로”였다.

 

   변해가는 나를 보며 다른 일을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간병사 일을 그만두고 이마트의 계산대 파트 타임직으로 취직을 했다. 다른 환경이라 조금씩 활기를 찾아갈 수 있었지만 힘없는 파트 타임직이라 거의 마감을 도맡아 해야 했고, 집에 가면 12시가 훨씬 넘었다. 늦은 귀가에 아이는 꼬질꼬질한 얼굴로 벌써 잠들어 있었고 아침이면 비몽사몽 부스스한 모습으로 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난 힘들어도, 잠이 부족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되었는데 나는 그걸 미처 몰랐다. 아들은 점점 말 수가 줄고 폭력적으로 변해 거칠어지고 있었다. 화가 나면 자기 뺨을 때리고 나에게 마구 욕을 했다. 아파도 혼자 끙끙거리며 내색하지 않던 순한 아이였는데...

 

  그 애가 무서웠다.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학생심리검사 결과 “자살 고위험군”에 속한

다고 했다.

 

   겨우 대화를 하여 아들이 원하는 것이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서 반겨주는 것과, TV를 보며 같이 즐겁게 밥을 먹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돈을 많이 주는 것이 아닌 옆에서 다정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엄마이길 바라는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갑상선 저하증임에도 피곤한 몸을 이끌며 아들하나 잘 키우기 위해, 동료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늦은 밤까지 쉬지도 않고 일했건만 내가 얻은 것이 질병과 문제아가 된 아들이란 말인가? 아들을 위해 돈 벌려고 바둥바둥 거린 내가 정말 바보스럽고 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지도 않았던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다시 수렁에 빠졌다. 아이와 눈도 마주칠 수 없었고, 미안함과 동시에 그동안의 곤한 내 삶이 부질없었다는 허무함으로 나를 짓눌러 와 진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예전에 손목을 꿰맸던 치료실에서의 그 아픔이 밀려오면서 문득 그때의 다짐이 기억났다.

 

  “이대로 다시 무너질 수 없다.”

 

  힘든 상황이지만 나의 건강과 아들의 안정을 위한 길이 무엇이며, 우리 가족과 나의 행복을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주민센터에서 상담을 했다. “자활사업에 참여하면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사례관리를 통해 여러 지원을 받고, 향후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다.”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래 지금처럼 살다가는 내 몸도 아들도 버틸 수 없다.”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의 자활사업에 참여하여 게이트웨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재무교육, 공동체교육, 자아존중감교육, 취업교육 등 여러 교육이 예전과 달리 새롭게 다가왔고 그 중에 내일키움통장이 있었다.

 

   “그래 이거다”하고 다시 목표가 생겼다.

 

   근무시간도 퇴근하고 오면 오후 6시여서 아들을 돌볼 수 있고, 열심히 근무를 하면 내가 한 저축에 이자처럼 그 곱을 받게 된다고 하니 3년 후 아들의 대학 학자금도 어느 정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간병 일을 하며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그동안 간병일이 부담스럽고 꺼려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게이트웨이와 사업단 팀장님들께서 시간을 배려하며 수차례 상담을 해 주셨고, 현장에서 일하시는 간호부장님이 전문역량 강화교육과 현장실습을 꼼꼼히 진행했다.

 

  “이렇게 마음을 써주시는데, 좀 더 용기를 내서 해보자!”

 

  세월이 지나서인지 경험이 더해져서인지 팀장님들과의 상담과 교육, 실습을 통해 차츰 자신감이 생겼다. 내일키움통장의 결실을 얻으면서 전문 요양보호사로 취업할 계획을 세웠다. 게이트웨이 교육이 끝나고 복지간병사업단의 간병사가 되었으나 막상 다시 병원에 들어서려니 약간의 불안감이 들었다. 첫 근무하는 날, 병원의 청소하는 아주머니께서 나를 보고 자꾸 웃으시며 아이는 많이 컸냐고 물으신다.

 

  아, 10년 전 처음 병원에서 일할 때 계셨던 분이셨다. “이젠 아줌마가 다 되었네”라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셨다. 10년이 넘었는데 날 기억하고 계시다니... 그 긴 세월 그곳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신 여사님이 존경스러웠다. 사업단 반장님과 동료들이 출근시간 전에 일부러 찾아오셔서 이것저것 친절히 알려주며 안심하도록 격려해 주셨다.

 

  “그래, 나도 해보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니 다 잘 될 거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자.”

 

  이렇게 생각하니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니 나에게도 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센터에서 신청해 준 대전여민회 여성가장 건강권 지원 사업에 선정 되어 무료로 70만 원의 정밀 건강검진을 받아 위선종을 발견하여 제거 수술까지 받을 수 있었다. 담당 의사선생님께서 “모르고 그냥 두었으면 위암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운이 좋다. 수술도 깨끗이 잘됐다.”고 하신다. 아들도 나의 수술과 치료 기간 동안 “엄마 나는 아무걱정 말고, 엄마 몸만 신경 쓰세요.”라며 의젓한 말을 한다. 센터의 배려로 충분한 휴식기간을 가져 몸이 잘 회복되었다.

 

   지금 난 누구보다 씩씩하다.

 

   한부모 모임에 가입하여 회원들과 수다를 떨며 비즈공예, 손 뜨게 등을 만들기도 하고 미술심리치료, 관계형성 등의 교육도 받게 되었다. 어색하게만 생각했던 회원들과 생전 처음 연극도 보고 광명동굴기행 탐험 캠프와 같은 문화생활을 함께하며 친해지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11월에는 댄스동아리 강사료를 지원해 주는 직장부모커뮤니티에서 계획 진행하는 리더쉽 캠프가 있다. 다른 회원들과 자녀가 함께하는 1박2일 여행인데 나와 아들도 참여하기로 했다.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던 우리가족에게 이런 즐거운 날이 오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지금은 댄스동아리 회원이 되어 운동도 열심히 한다.

 

  지난 추석, 나눔자활센터에서 한가위 나눔행사가 있었다. 많은 나눔식구들 앞에서 용기 내어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댄스 시범공연을 하게 되었다. 아, 문득 기억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예일중학교 응원단 응원소녀였다는 사실, 얼짱 응원소녀, 잊고 있었던 기억 등...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모든 것이 나를 깨운 자활센터의 교육과 지지의 힘이라 생각된다. 단지 일자리를 주는 것이 아닌 바르게 사는 법과 나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알게 하고, 미래를 설계하여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에 몸담게 되어 너무나 다행이다. 이곳 선생님들의 노력에 대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 난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아들의 뽀뽀를 받고 잠자리에 든다.

 

   이번 10월 14일, 수원에서 진행되는 경기지역자활한마당에 한부모모임 댄스동아리 참한댄스팀이 장기자랑에 출전한다. 다시 한 번 과거 얼짱 응원소녀의 힘을 과시해 보려 한다.

 

  응원소녀 꽃 중년으로 다시 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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