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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따스한 집으로 우리 이사 가요
  • 년도2018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정정희
  • 조회수765

  누가 봐도 세상을 다 얻은 자의 밝은 미소를 띠고....남편과 나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벌써 부동산을 2시간째 헤매고 있습니다. 사랑방신문과 땀에 젖은 손수건을 두 손에 꼭 쥐고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간간히 부는 바람결이 이렇게도 곱고 달콤하다는 것을 새롭게 느끼며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우리가족 모두의 미소가 되고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포근하고 멋진 보금자리를 만들어 줄 그런 꿈의 약속을 하게한 희망키움통장이 드디어 3년의 길고 긴 시간터널을 지나 만기 지급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금 2천5백만 원, 고맙습니다.’

 

  매일 거친 현장 일을 끝내고 퇴근한 우리 부부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기쁘게 발품 팔며 폼 나는 사장님, 사모님처럼 당당하게 우리 가족이 함께 살 집을 보러 다니고 있습니다.

 

 

용기와의 만남

   2013년 열대야로 잠 못 이루던 밤, 아들과 딸의 등록금과 늦둥이 막내딸의 교복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밤새 울다 잠이 들었습니다. 퉁퉁 부은 얼굴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민센터로 향했습니다.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는 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창피해 죽을 만큼 울기만 하다 그냥 나왔습니다. 그것이 주민센터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다음 날 오랜만에 옷을 차려 입고 화장을 한 후 시골에서 가지고 온 참기름 한 병을 들고 ‘죽기 아니면 살기다’는 맘으로 용기를 내어 주민센터를 다시 찾았습니다. 주민센터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사회복지담당 선생님이 얼굴을 기억하시고 아무 말 없이 가느다란 손으로 내 어깨와 손을 잡아 상담실이라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가까운 사람처럼 반갑게 맞아 주시며 노란 오렌지 쥬스를 내밀던 고운 미소가 있어 희망도 있었습니다.

 

   처음 방문 때처럼 또 얼마나 울었을까, 티슈를 건네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순간 죄송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잘 아는 동생에게 하소연 하듯 주저리주저리 눈물 콧물 닦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따뜻한 미소로 넋두리를 들어주신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또 기만 하다가 돌아와 다시는 주민센터 근처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설회사 대표였던 남편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지고 아파트 미분양사태가 일어나면서 부도와 파산으로 하루아침에 다섯 식구가 거리로 나 앉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이야기가 실감 났습니다. 그나마 빨간 딱지에서 벗어난 가재도구와 겨울 옷 박스를 친정집으로 보내고, 직장을 옮기는 후배가 팔려고 내놓았던 빌라를 월 50만 원에 빌려주어 찬바람이 부는 날 이사를 하여 지금까지 6년을 살고 있습니다. 남편의 얼굴하나 보고 빌려준 후배가 고맙기만 합니다.

 

   넓은 집에 살던 5식구가 세 개라고 할 것도 없는 방과 화장실이 하나인 빌라에서 숨소리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들을 볼 때 산송장을 보듯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당장 갈 곳이 없으니 후배를 볼 때마다 고맙다고 수 십 번 절하며 살고 있습니다.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 큰 딸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들리지 않았고 늦둥이 막내의 툴툴대는 모습 외에는 집안 어느 곳에서도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남편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고 한숨을 몰아쉬며 한탄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가깝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그래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다 그렇게 살아 특별한 사람 없어, 한 번 사장이 영원한 사장은 없지!” 라고 위로를 하며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던데..., ’처음부터 부자 없지...‘라며 하는 뒷얘기들 이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지, 그럴 때마다 순간순간 우리와는 다른 나라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알아주는 대기업 사장에서 실업자로 변한 남편이 심한 스트레스로 어지러움을 참다 병원을 방문했는데 심장병과 고혈압으로 지속적으로 약을 복용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식 때문이었습니다. 건강하던 남편이 하루 아침에 백수로 병까지 얻어 심적 고통은 배고픔 보다 더 컸습니다. 어떻게든 회복시켜 본다고 아픈 다리를 끌고 이리 저리 뛰어다녀 보았지만 결과는 늘 실망뿐이었고, ‘걱정마라 나 이대로 죽지 않는다.’ 라고 큰소리치는 남편이 오히려 가엽고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강한 엄마가 아닌 한심한 엄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상의 중심에 우리 가족이 있었다

   주민센터는 우리 가족에게 망망대해에서 길을 밝혀주는 등대와 같았습니다. 주민센터를 세 번 방문하고 난 후에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우리 가족에게 있는 것 같고, 우리 가족을 중심으로 온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이 분주해졌습니다. 수급자 신청을 안내해 주고, 긴급생계비에 관한 서류, 교육비 관련 등...“세상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좋은 나라였구나!” 감탄을 연발하며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마음도 변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선정 결과에 대한 안내문이 오고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전해준 천사의 목소리를 가진 사회복지사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오세요.”라는 얘기를 듣고 그 동안 종종거리며 초조했던 마음에 위로를 받아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시 시작해 보자. 할 수 있어.” 남편은 일용직 전기 감리원으로, 나는 어린이집 조리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게 용기를 준 주민센터 사회복지사를 찾아 갔을 때 담당은 바뀌어 새로운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언제나처럼 주책없는 눈물을 흘리고 그 동안의 상황을 말씀 드렸더니 ‘희망키움통장 사업안내’라는 자료를 주시며 “가입 하세요, 두 분 다 일을 하시니 통장 만기 3년 후면 전세 보증금은 될 수 있을 거예요”

 

  듣는 순간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잃어버릴까봐 가슴에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와 다섯 식구가 밤새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습니다.

 

  “아빠, 그럼 3년 후에 옛날 우리 집으로 다시 갈 수 있는 거야?” “그래”

 

  막내의 물음에 웃으며 가볍게 대답하는 남편의 얼굴에 희망이 보였습니다. 남편과 나는 날마다 출근할 곳이 있으니 아침이면 분주히 씻고 또 거울 앞에 서서 머리도 빗고 옷매무새도 만지는 일이 계속되면서 집안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건축학과를 졸업하며 건설회사에 당당히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고, 딸은 간호대학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2015년 2월 소득과 가구원 변동으로 수급자에서 벗어나 이행특례대상자로 변경되었으나 희망키움통장은 만기까지 계속 가능하였습니다.

 

  2016년 2월 큰 딸은 국가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간호대학 졸업하여 지금은 광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학병원 정규직 간호사로 당당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계단 쌓기

   매달 20일을 손꼽아 기렸습니다. 그 달에 본인적립금을 입금하고 나면 다시 다음 달에 입금할 돈을 미리 챙기고, 3년 동안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이 봉투에 따로 담아 두었습니다.

  어느 날은 교통카드를 충전해야 한다는 딸의 말에도 귀를 닫고 보름이나 더 남아있는 적립금 납부금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부끄럽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집니다.

 

  매달 초에 누적금액이라고 하나은행의 담당자로부터 문자가 올 때마다 식구들 모두 “와~ 정말? 와~ 정말? 이게 정말 우리 돈이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거지?”하며 기뻐했습니다.

한 달 한 달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오늘 남편은 과거의 사장이 아닌 현장근로자로, 저는 어린이 집 조리사에서 야간 보육교사인 선생님으로 당당히 일하고 있습니다. 실용음악이 하고 싶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막내딸은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몸이 많이 약했던 탓에 지금도 한 학기에 한 달 이상 힘이 없다며 결석하는 일이 다반사이나 그래도 우리가족의 마스코트이자 웃음씨앗 역할을 톡톡히 하는 예쁜 딸입니다.

 

   얼마 전 ‘포카혼타스’의 OST ‘바람의 빛깔’이라는 곡에서 ‘얼마나 크게 될지 나무를 베면 알 수가 없죠!’ 라는 가사가 지금 이 순간 귓가를 울리는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이야기하는 속에서 듣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가족이 얼마나 변할지 아직은 알 수가 없으나 희망이 있습니다.

 

  막내 딸 고등학교, 대학교도 가야하고, 아들 녀석 장가도 보내야 하고, 큰딸은 아빠처럼 좋은 남자 만나 시집도 가야하고 아직 해결해야 할 일, 헤쳐 나가야 할 일들과 쌓아야 할 계단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계단은 하나부터 쌓아가야 하고 급히 서두르면 다시 쌓아야 하니 천천히 갈 것입니다. 그 끝은 ‘햇살 따스한 우리들의 보금자리’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키움통장은 우리 다섯 식구의 기쁨이고 희망이고 꿈의 보금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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