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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두렵지 않아요
  • 년도2018
  • 기관명 부평남부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지영희
  • 조회수951

  자활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사연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으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지금 나의 가족은 20살 아들과 18살 딸, 이렇게 3인 가족이다. 아들은 멋진 대학생이고 딸은 고등학생이다. 자활에 참여하여 이 아이들을 다 키웠다.

 

   남편과 이혼한 후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살던 곳을 떠나 친구가 있는 광주로 이사를 했다. 그 곳에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가 잘되어 돈을 좀 벌 수가 있었다. 밤낮으로 장사를 하다 보니 어린 아이들을 챙길 수가 없어 하던 장사를 접고 다른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나는 많은 돈을 날렸다. 아이들과 살던 전세금까지 빼서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친정 여동생이 인천으로 와 직장을 잡고 다시 시작해보라고 하여 친정식구들이 있는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친정집 살림도 넉넉하지 않아 아이들과 내가 친정의 도움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기에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시 아이들은 7살, 5살로 유치원도 보내야 했고 막막했던 와중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해보라는 지인의 권유에 동사무소에 가서 신청을 하고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부 수급권자가 되었다.

 

   자활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역자활센터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기초수급자 결정이 나고 기다리던 중 부평남부지역자활센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상담을 해야 한단다. 그렇게 부평남부 지역자활센터에서 집수리 팀장님과 상담을 하고 출근을 했다.

 

 

첫 번째 도전 : 도배 기능사

   나는 기술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집수리를 하러 나갈 때 같이 나가서 도배지에 풀칠을 해주거나 청소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집수리 팀장님이 “여성문화회관에서 도배를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하면서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난 꿈에 부풀었다.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배우고 자격증을 딴다는 것,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집수리사업단에서 4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오전에는 여성문화회관에서 도배를 배우고 오후에는 집수리사업단으로 출근을 했다. 같이 일하는 사업단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도 없었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도배를 배우러 다니는 게 못마땅한 눈초리였다.

 

  그런 시선을 견뎌내고 집수리사업단에서 최초의 ‘도배 기능사’라는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따고 도배를 배워 3년 안에 내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모든 상황과 여건은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취직을 해보고도 싶었지만 새벽 6시에 나가 도배가 다 끝나야 퇴근하는 게 도배일 이었다. 어린 아이들을 키워줄 사람이 없어 도배 일로 취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자활에서의 두 번째 사업단인 장애통합보조원 일을 하기로 했다.

 

 

두 번째 도전 : 고졸 검정고시

   장애통합보조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컴퓨터를 배우고, 아이들 심리에 대한 공부도 하는 등 나는 열심히 교육과 업무에 임했다. 미술심리 교육을 하면서 내 아이들의 심리도 궁금하여 같이 해보곤 하였다. 대화법, 부모교육 등 많은 교육을 받으면서 내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에 배치 받아 장애통합보조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생기고 내 적성에 맞아 이 일로 교육청으로 취직도 하고 싶었다. 문제는 학력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 자퇴를 해서 학력에서 이미 취업자격 조건에 부적합했다.

 

  자활센터에서 학력 이야기를 하거나 근무지가 학교니까 조회를 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늘 불안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다가 장애아동 방문학습(현, 장애아동 학습바우처)을 하는 자활사업단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장애통합 보조원 활동을 한 현장경험이 있어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장애 아동을 더욱 이해하게 되고, 학부모님들도 나의 수업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다.

 

  나는 함께 일하는 사업단의 동료들 보다 수업스케줄이 훨씬 많았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 기분 좋고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항상 가슴 한 켠에는 말 못하는 고퇴라는 학력이 부끄러움과 자격지심으로 남아 있었다.

 

  사업단에서 함께 일하며 사이버대학에 입학 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부러웠었고, 이런 나의 사정을 모르는 동료들로부터 “영희야, 너도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사 공부해 봐” 라는 말을 들을 때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엉켜져 나왔다.

학력을 적어내야 할 때는 고졸이라고 항상 허위 기재를 해야 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팀장님하고 상의를 했다. 학력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솔직하게 말씀드리며 “공부를 해 보겠다.” 라고 했다. 팀장님은 현재 자활사업 운영에 어려움이 예상 됨에도 불구하고 “잘 생각했다. 열심히 해보세요.” 라고 하시며 기꺼이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마음 편히 10개월 이라는 시간을 검정고시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이 마흔에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을 푸는 것은 너무나 험하고 힘든 길이었다. 그러나 큰 아이는 엄마를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수학을 가르쳐 주었고 자기가 도와 줄테니 꼭 합격하라며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다. 아낌없이 용기를 주는 동료들과 가족들의 응원에 힘을 내고 열심히 한 결과 고등학교 졸업과 동등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검정고시에 합격을 했다.

 

 

세 번째 도전 : 사회복지사 자격증

   검정고시 합격을 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사이버대학에 진학하는 일이었다. 2013년 9월 세계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했다. 입학 당시만 해도 사이버대학 공부라는 것에 대한 별다른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으나 강의를 챙겨 듣기 위해 시간을 내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때마다 해야 하는 과제물도 스트레스였지만 먼저 공부한 동료들을 보면서 힘을 냈다. 처음 중간고사 볼 때 노트북, 컴퓨터 두 대, 강의 자료를 펼쳐 놓고도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학기가 지나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과정들이 힘에 부쳤지만 해내고자 하는 의지와 과정을 해 내면서의 보람과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뿌듯한 성취감은 힘듦을 이겨내고도 남는 힘을 주었다. 2014년 무릎 수술로 잠시휴학 후 2015년 9월 2학년에 복학하여 ‘여성 쉼터’로 사회복지 실습을 가게 되었다. 실습을 하면서 내 주특기를 살려 여성쉼터에서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는 도자기 공예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자활사업에 참여하면서 늘 수혜자 입장이었다. 한 번도 누구에게 나눔을 해 본적이 없었던 셈이다. 그런 내가 재능을 나누게 된 것이다. 도자기 공예를 하는 내가 정말 뿌듯하고 대견했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그날의 깨달음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 소중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2016년 8월 사회복지사 자격을 갖게 되었다.

 

네 번째 도전 : 도자기 공예 기능사

   장애아동 방문학습 자활사업단이 장애아동학습 바우처 사업과 도예공방사업단(자활사업단)으로 분리가 되면서 난 도예공방사업단을 선택 했다. 흙을 만지고 물레를 돌리는 일이 내 적성에 맞았고 너무 재미있었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도예를 조금씩 배워가면서 아동 도예수업도 진행을 했다.

 

  그런데 수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또 다시 내 마음이 불편해 졌다. 과연 내가 어떤 자격으로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도예의 ‘도’ 자도 모르는데 학교수업은 어떻게 해 나갈까? ‘자격증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과장님이 도예 관련 자격증에 대해서 알아보라는 말에 여기저기 열심히 알아보았다.

 

   국가기술자격증인 도자기공예기능사 취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료가 너무나 비싸고, 필기와 실기시험을 봐야 하고,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곳이 너무 멀었다. 내가 자격증 공부를 하러 가면 내가 하던 일을 다른 동료들이 대신해야 하는 부분, 자활센터에서 시간을 배려 해주어야 하는 것, 수업료 지원도 부담 되는 등 여러 가지 중첩되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사업단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얻는다면 수업료 일부분과 시간을 내어주겠다고 하여 동료들에게 만장일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있었고, 난 다른 동료와 둘이서 안산으로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실기를 배우러 다녔다.

 

   우리는 사업단 동료들과 센터의 배려에 보답하고자 2015년에 치러지는 시험에 한 번의 도전으로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다짐하며 안산으로 가기 전까지 도자기를 전공한 작가님의 공방에서 일주일에 2번 물레를 배우기도 했다.

 

  물레를 배우던 중 난 무릎이 아파 수술을 해야 했고, 약 3개월 정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공방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 걸음을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통증으로 아팠지만 자격증을 따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출근을 서둘렀다.

 

   때 마침 서울 잠실에서 내일 배움 카드로 세라믹공예와 물레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우리는 힘들지만 같이 병행하기로 했다.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월, 화, 수요일에는 아침 8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안산으로 가서 오후 4시까지 물레를 배우고, 다시 안산에서 잠실로 이동하여 세라믹공예와 물레 수업을 저녁 10시30분까지 받고 나서 부평 집으로 오면 밤 12시가 넘었다.

 

  목, 금요일은 공방사업단으로 출근하여 오후 5시까지 일을 하다 서울 잠실로 수업을 받으러 가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은 마을버스 막차가 끊겨 부평역에서 집까지 걸어와야 했고 어떤 날은 지하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픈 다리를 이끌고 길목과 계단을 뛰어야 했다. 무슨 일을 하길래 머리와 옷에 저런 흙을 묻히고 다닐까 하는 애처로운 시선들을 느낄 새도 없이 허겁지겁 지하철에 오르고 나면 잠이 쏟아졌다.

 

  같이 다니는 동료는 지하철이나 버스에 자리가 나면 본인도 힘들고 지쳤을 텐데 다리 수술한지 얼마 안 되었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나에게 늘 자리를 양보해 주는 등 많은 배려와 신경을 써 주었다.

 

  가정도 돌보지 못하고, 매일 늦은 귀가에 집은 집대로 엉망이고 몸은 몸대로 힘들었지만 꼭 자격증을 따서 도예공방에서 열심히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참고 견딜 수 있었다.

 

   2015년 4월 14일 필기시험 날인데 공방이 4월 초에 이사를 해야 했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이사 준비를 같이 해야 할까, 아님 필기시험 공부를 해야 할까를 물었다. 동료들이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를 하라고 하여 우리는 이사에 힘을 보태지도 못하고, 주말도 반납한 채 매일 도서관에 살면서 공부에만 몰두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긴 시간을 노력하고 힘든 과정을 보냈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하지만 2015년 4월 나는 필기시험에서 떨어졌고 함께 시험을 친 동료만 합격을 하였다. 시험에 떨어지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 동안 나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합격을 믿었고, 지지해 주었던 동료들은 시험에 떨어졌다는 말에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아직 안산은 한 달 정도 교육기간이 남아 있었고, 수업료가 완불 된 상태라 난 시험에 떨어지긴 했지만 안산으로 다니며 남은 한 달을 더 배워야만 했다.

 

  안산에 다녀 온 다음날이면 싸늘한 말투와 눈빛으로 “안산 그만 가도 되지 않나?” 같이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이런 저런 말들이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정말 마음이 많이 상했다. 나의 시간과 돈과 열정이 다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고 힘들어 했는지, 도예공방사업과 자격증에 대한 공부를 위해 해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다닌 걸 알면서도 그 과정을 지켜봐주던 동료들이 격려와 위로가 아닌 비난과 질책을 쏟아냈다.

 

   갑자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너무 싫어졌다. 어떻게 계속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출근을 하면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했다. 군중심리라고나 할까, 여럿이 한 사람을 왕따 시키는 느낌과 분위기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는 아마 우리가 서로 터놓고 실패의 아픔을 나눌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과장님께 그만 두고 다른 사업단으로 가겠다고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안 된다며 보낼 수 없다고 나를 다독여 주셨다.

 

   나는 도예가 좋았다. 흙을 만지고 물레를 치고 단순한 흙덩이가 새로운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좋아했다. 내 속에 숨어 있던 나도 몰랐던 내 적성을 찾아낸 것이다. 이제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에 내 마음이 너무도 아팠는데 과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이 좀 풀렸다. 그렇지만 더 이상 상처받기가 싫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때 과장님이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정말 그만두려면 동료들의 동의를 받으라는 것이다. 과장님의 현명한 판단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과장님이 정말 고마웠다. A4 용지 한 장을 꺼내 들고 동료들과 한 자리에 모여 공방을 그만 두고 싶으니 여기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더 이상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솔직한 내 심정과 이유를 말하면서 울먹였다. 옥신각신 의견이 이어지고 어느덧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서 다시 웃고 있었다.

 

   그 후 일 년이 지나 2016년 4월 도자기공예기능사 이론시험을 봐야한다는 생각에 토요일과 일요일 근무를 하면서 대체휴가를 미리 계획했다. 시험 전 나는 2016년 4월 1일부터 12일 동안 그 동안의 계획대로 아침부터 10시까지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주말이면 8시 40분에 집에서 나와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다 문이 열리면 들어가 자리를 잡고 열심히 필기 공부를 하였다.

 

  시험 보는 당일 아침,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배가 너무도 아팠다. 과연 시험을 볼 수 있을까, 시험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고민을 하다 시험장으로 향했고 시험지와 답안을 받는 순간 너무도 떨렸다. 정말 ‘검정은 글씨요, 하얀 건 백지다.’ 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눈앞이 캄캄했다. 눈을 크게 뜨고 열심히 아는 문제부터 풀기를 시작 했다. 다른 수험생들은 30분 만에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나 혼자 남았다.

 

  감독선생님의 “10분 남았습니다.” 하는 말에 틀린 것은 없는지, 오답은 없는지 덜덜 떨며 맞춰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합격을 하겠구나, 정확히 아는 문제가 40개가 넘는구나!’ 그래도 내 자신을 못 믿어 답안이 나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답안 채점 결과 7문제는 틀리고 53문제를 맞춰 필기에 합격을 하였다. 합격 후 실기 연습에 다시 몰두 하여 드디어 난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국가기술자격증을 가진 도자기공예기능사다. 그동안 나를 배려해 주었던 동료들을 가르치고 다시 함께 하는 새로운 꿈을 꾸어본다. 우리 부평남부지역자활센터 생각나무숲 요일공방이 자활기업으로 창업을 해 인천에 있는 학교 및 관공서, 기타 기관들, 더 나아가서는 서울, 경기도를 포함하여 우리 참여자들의 열정을 펼쳐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우리는 해낼 것이다.

 

 

이야기를 마무리 하며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감히 ‘용기’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적, 사회적, 정서적으로 가장 밑바닥을 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짜 내어 부지런히 움직이고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다만 조금 시간이 걸리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도배 기능사에서 검정고시로 다시 사회복지사와 도예기능사 자격증을 따면서 이제 나는 옛날의 학력 콤플렉스에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하며 스트레스를 받던 내가 아니다. 사이버 대학이지만 졸업을 했고, 3개의 전문자격을 갖춘 사람이 된 것이다.

 

  이 모두가 자활사업이라는 제도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룬 결과물들이다. 아이들도 잘 자라 내 곁을 든든히 지켜주고 최선을 다해 엄마로서 역할을 해 낼 수 있도록 한 것도 역시 자활 사업에 참여한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자활에서 내 가정과 아이들을 키우고 나 자신도 이렇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기쁨을 맛 본 셈이다. 자활은 내게 용기 있게 도전하는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발판 삼아 나는 성장했다. 이제 자활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과정을 겪은 사람으로서 나의 경험과 재능을 나누는 삶을 살 것이다.

 

  이젠 내 앞에 무엇이 와도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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