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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 년도2018
  • 기관명인천동구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유두희
  • 조회수744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2011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나에게 매달리던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서울의 병원으로 향했다.

 

   헤어지자고 말하기 1개월 전, 나는 직장암 3기가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몇 달 전부터 계속 줄기 시작한 몸무게가 62kg에서 50kg까지 줄어들고 나서야 집근처 병원을 방문한 결과였다.

 

  병원에서는 더 늦기 전에 서울의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길 권했다.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방문한 서울의 큰 병원에서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 때 내 나이 41세, 나는 그녀와 그 날로 원치 않는 이별을 했다. 이별 이후 끊임없는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녀와 이별한 2011년 6월 시작된 24번의 항암치료, 25번의 방사선치료, 10월 수술, 일주일 후 재수술, 그리고 다시 항암치료, 다시 수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치료와 수술은 1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허약해진 몸과 병원비,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 재발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이런 내 사정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모든 수술과 치료가 끝났지만 나는 무기력과 재발의 위험, 그리고 수술후유증으로 집에서만 생활을 해야 했고 당연히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매달 생계비가 나오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전에 다니던 직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채용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8년이나 다녔던 직장이었다. 따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내가 짊어지고 있는 병이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녔던 직장에서 거부당한 뒤로도 나는 계속 고용센터와 구청을 통해 일자리를 소개받아 면접을 봤지만 계속 떨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주민센터를 찾아갔다. 내 절박한 사정을 듣던 사회복지 공무원이 “동구지역자활센터”라는 곳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묻지 않았고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다음날 무작정 찾아갔다.

 

  그 만큼 내 생활은 절박했다. 나를 맞이한 젊은 사회복지사는 내게 자활사업과 지역자활센터에 대해 소개했다. 그는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 기간 동안 낯선 환경에 주저하는 나를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나는 기나긴 병원 투병 이후 처음으로 내 속에 있던 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허약해진 내 몸 상태와 절박한 내 상황, 그리고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그 절망과 병의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 담긴 속마음까지, 단순히 나는 이야기하고 그는 들어주기만 했을 뿐이었지만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상담을 통해 청소사업단에 배치되어 일을 시작했다. 청소사업단에서의 일은 난생 처음해보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내게는 학교 화장실청소, 아파트 입주청소, 쓰레기처리 등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업단이었던 탓에 여러 부분에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고 젊은 남자가 학교 화장실청소를 한다는 시선에 민감해져 거부감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초반에는 육체적으로 힘들기만 했던 일이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절망스러웠던 순간이 떠올라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라는 배수진을 쳤다. 그러자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로울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사업단 내에서 잘 적응하려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최우선이었다.

 

  상황에 대한 판단이 서자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고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 결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오히려 나는 많은 부분에서 배려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사업단에서 잘 적응하며 건강도 어느 정도 좋아졌다고 느끼게 되었을 무렵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지푸라기는 잡았지만 지푸라기를 잡고 뭍으로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에겐 뭍으로 올라갈 수 있는 단단한 동아줄이 필요했다. 나는 그 동아줄을 찾기 위해 수시로 팀장님과 많은 상담을 했다. 필요한 경우 다른 팀장님들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팀장님 역시 “자활센터는 일종의 피난처에 가까우니 이곳에 있는 동안 체력을 비축하고 틈틈이 공부하고 학원도 다니면 좋을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나는 상담으로 알게 된 내일배움카드를 만들었다. 가장 먼저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조경학원을 찾아서 등록을 했다. 학원은 부천시 중동에 위치해 있었다. 인천 동구에 살고 있는 내가 오후 6시에 업무를 끝내고 7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뭔가를 배운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런 틈틈이 센터에서 진행되는 교육에도 열심히 참여했고 광역자활센터에서 지원한 금융 및 재무관련 교육에도 참여했다. 그 때 들었던 교육 내용 중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나에게 투자하는 것을 두렵다고 생각하지 마라”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았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너무나도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조경학원에서 조경사 시험을 준비하는 한편, 사회복지사 공부도 같이 병행했다. 내 일과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사업단 근무,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조경학원 출석 수업, 10시부터 12시까지 사회복지사 인터넷 강의수업으로 그 누구보다 빡빡하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거릴 때도 있었지만 행복했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조경사 필기시험이 다가왔다.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 예선경기를 치루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만큼 좋은 결과를 얻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 불행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경사 필기시험을 불가 이틀 남긴 날이었다. 심각한 복통을 느낀 나는 급하게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아픈 몸보다 나를 더 서럽고 고통스럽게 만든 건 그동안 내가 준비해왔던 것들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좌절감이었다. 전전긍긍하던 일주일, 불행 중 다행으로 큰 이상은 발견되지 않아 나는 퇴원했다. 최대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일했고 치루지 못한 필기시험에 미련두지 않으려 다음 필기시험을 준비했다.

 

  응급실로 실려 가기 전처럼 사업단 근무를 하고, 조경학원을 다니고, 사회복지사 인터넷 강의를 듣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 나는 조경사 필기와 실기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내 합격소식에 나보다 더 기뻐해준 센터 팀장님들과 사업단 동료들의 모습에서 진짜 가족 같은 유대감을 느꼈다.

 

   조경사 자격을 취득하고 즐거워했지만 그 뒤로 나는 계속 입,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주기가 두 달에 한 번에서 한 달에 두 번으로 늘었고, 그 때마다 응급실 행이었다. 반복되는 입원과 퇴원은 꿈에 부풀어가던 내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는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짙어가는 무기력에 계속 걸려오던 전화도 받지 않은 채 극단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갔다.


   “많이 힘들지? 내가 옆에 있어주지 못하니까 너 빨리 퇴원해서 얼른 사무실에서 보자, 항상 널 위해서 아프지 말라고 기도하고 있어, 그만 아프고 빨리 일어나.” 아무 기대 없이 받았던 한 통의 전화,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렸던 말이었는데 그날 나는 이 지긋지긋한 병에 걸린 뒤 계속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엉엉 소리를 내며 30분 동안, 그렇게 한참 눈물을 쏟아낸 뒤 어딘가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 입원한 기간 내내 마음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추가 툭하고 떨어진 것이다.


   입원과 퇴원, 그리고 일을 계속 번갈아가며 진행하던 가운데 얼마 전 드디어 병원으로부터 5년 완치판정을 받았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내 미래가 드디어 손에 닿는 것 같았다.

 

   내가 지역자활센터에 들어온 지 머지않아 3년이 된다. 그리고 나는 유두희 인생 제 2막을 준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조경과 관련되어 할 수 있는 목공학원에서 또 다른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조만간 오랜 시간 준비해왔던 조경직 공무원 시험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제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으니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암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걸린 시간 5년, 지역자활센터에서 나를 다시 찾아가는데 걸린 시간 3년, 처음엔 생계비만으로는 생활이 유지되지 않아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 곳은 나에게 그 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여기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할 수 있었고,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었고 건강도 되찾았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힘들다고 느껴졌을 때 내 옆에 있어준 버팀목이었다.

 

   잠시 쉬던 커다란 나무그늘, 그 밑을 벗어나 나는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맨다. 앞으로도 한 번씩 입원을 할 수도 있고, 그 때마다 힘들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젠 힘들 때마다 잠시 쉴 수 있는 나무그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괜찮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내 길을 걸어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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