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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종소리
  • 년도2018
  • 기관명경북안동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응웬티흐엉
  • 조회수861

제2의 고향 대한민국

   베트남에서 태어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부모님과 형제, 친구들을 떠나 선택한 나라 대한민국, 모든 것이 다른 문화, 음식, 사람들... 낯선 환경으로 인해 힘든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며 노력했다.

 

   자상하고 착한 남편, 딸처럼 예뻐해 주시는 시부모님, 오랜 기간 알아왔던 친구처럼 많은 도움을 주시는 이웃 분들... 그렇게 타국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다보니 어느 순간 “태현”이라는 보물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고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사는 내 삶에 또 하나의 기쁨을 안겨 준 사랑스런 아이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 곁을 떠난 남편과 시부모님

 

   모든 것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처음 해 보는 농사일마저 오래 전부터 해 왔던 것처럼 재미있고 하루하루 나의 모든 생활이 완벽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그 행복도 잠시, 행복을 시샘이라도 하는 것이었을까? 태현이가 돌이 되었을 즈음, 단순한 감기처럼 지나갈 줄로만 알았던 남편의 잦은 소화불량과 통증이 오래 지속되어 병원을 찾게 되었고 얼마 후 암이라는 진단을 듣게 되었다.

 

  회복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나는 온갖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간호를 하였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중 남편은 희망을 끈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남편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의사선생님의 사망선고 후 차디찬 몸이 되어버린 남편의 얼굴 위로 흰 천이 머리끝까지 올라가는 순간 나는 미친 듯이 가슴을 후려쳤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남편의 손을 놓아버리면 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아 끝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밉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신들을 부정하였다.

 

  한참 아들 재롱에 웃으며 행복해 해야 할 남편은 그렇게 떠나갔다. 나와 태현이를 남겨두고..., 그 때 태현이의 나이가 4살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태현이의 손을 잡고 시부모님과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하며 아빠를 애타게 찾았다. 아빠의 죽음을 아이에게 전달 할 수도, 이해해 달라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엄마인 나도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든데 4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아빠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은 흘러갔다. 남편의 빈자리를 마냥 넋 놓고 바라 볼 수만 없던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연로하신 시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고 동네 농사 품앗이며 식당 아르바이트 등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하였다.

 

  시간이 흘러 태현이도 나의 걱정과는 달리 동네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건강하고 밝게 무럭무럭 잘 자랐고 우리는 차츰 제자리를 찾는 듯 했다. 나에게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시부모님과 태현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일어서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참 열심히 살았다.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텼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한지 2, 3년이 지나 연로하신 시부모님께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나에게 닥친 또 한 번의 큰 시련이었다.

 

  한국에서 살림을 꾸린지 6년 만에 남편과 시부모님이 모두 내 곁을 떠나 가셨다. 시부모님마저 떠난 후 아들과 나만 덩그러니 집에 남겨져 있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졌다. 나에게 꿈, 희망이라는 단어는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는 건지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린 아들을 보면서 한없이 슬퍼하고 우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모든 상황들이 벼랑 끝 절벽으로 한발 한발 떠밀리는 듯이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나에겐 넋 놓고 앉아 울고 있을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의 보물 태현이가 생긋생긋 재롱을 부리며 내 옆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살아야 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과 나의 아들, 시부모님의 하나뿐인 손자 태현이를 위해서 일어서야 했다.

 

  나의 보물 태현아, 엄마가 미안해...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태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태현이가 나를 성장하게끔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시골집을 떠나 태현이가 공부하기가 좋은 환경,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이사를 했다.

 

  그러나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에게 일을 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식당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했던 나는 어디 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안동근교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3교대 생산직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교대 근무, 야간근무, 야근 등등 일이 많아지다 보니 어린 태현이를 혼자 두는 일이 빈번해 졌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려는 욕심이 너무 앞섰던 것일까? 태현이의 선생님으로 부터 태현이가 심리적으로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혹시나 태현이가 잘못될까 하는 마음에 바로 심리상담치료소로 향했다. 애정결핍, 불안증세로 인한 <틱장애>가 발생했다는 결과를 듣게 되었다.

 

  태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집으로 와 현관문을 여는데 꾹꾹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수도꼭지 마냥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혹여나 태현이가 들을까 화장실로 들어가 씻는 척하며 수돗물을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고, 가족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3박4일 동안 아무 생각 않고 울고만 싶었지만 마음대로 눈물도 흘릴 수 없는 내 처지가 너무 억울하고 힘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태현이가 엄마의 퉁퉁 부은 눈을 보고는 내 눈치만 살피는 것이었다. 내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주눅 들어 하는 모습을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런 모습이 더 속상했다.

    

 

새로운 시작, 경북안동지역자활센터!

   나는 다시 일어나야 했다. 곤히 자고 있는 태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최고로 행복한 아들로 만들어 주겠다고,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내 자식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다짐했다.

 

   다음날 나는 양말 공장에 사표를 쓰고 동사무소로 향했다. 내가 태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적합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문의 했다.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문의 해 보라며 사회복지담당자로부터 <경북안동지역자활센터>를 소개 받았다. 나는 그렇게 자활사업에 위탁의뢰 되어 게이트웨이 과정을 거쳐 <더조은포장사업단>에 배치되었다. 예전에 양말 공장에서 일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기분이 더 좋았다.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면서 나에게 다시 희망이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태현이의 등하교 시간에 근무시간을 맞출 수 있어 평일에도 아이와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온전히 태현이와 함께 공부도 하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태현이의 <틱장애>도 많이 호전되었다.

 

  양말을 포장하는 일은 단순하면서도 동료들과 손발이 잘 맞아야 하는데 동료들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작업에 임했다. 의견 마찰이 있으면 여러 참여자들이 차선책을 제시하여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 모든 과정들이 내가 배울 점들이었다. 사람과의 관계형성 방법, 직장생활 하는 방법, 한국 사회의 문화 등등 모든 것이 나에겐 공부였다. 사업단의 언니 오빠들은 나를 한 가족처럼 잘 챙겨주어 마음이 든든하였다. 온전히 내 편이 생긴 것만 같았다.

 

  열심히 일하였고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이, 사업단 업무반장이 되었다. 다른 동료들도 나를 잘 따라주며 힘을 실어 주었다. 사업단이 위기를 겪을 때에도 참여자 전체의 노력으로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었다.

 

   참여자들의 추천으로 우수 자활참여자 연수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하루하루 시간에 쫓기 듯 살아가는 것에 버거워 하며 앞뒤 돌아보지 못하였는데, 2박3일 제주도 여행을 통해 마음을 새로이 다잡고 나의인생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배움의 즐거움

   내가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한지 2년이 지나고 있다. 열심히 참여하면서 무엇인가를 공부하고 자격증도 따고 취, 창업도 하고 싶어졌다. 태현이에게 내가 도전하는 엄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수강료를 지원받아 운전학원을 다녔다. 나같이 작은 사람이 큰 자동차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하고 정말 재미있었다. 운전학원을 가는 날엔 신이 나 일을 하면서도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삶의 활력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한 번에 필기시험에 붙어 자신감은 급격히 상승하였다.

 

  그것도 잠시, 너무 자만했던 것일까? 첫 실기시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시험 준비를 해서야 최종 합격을 하였다.

    

 

희망을 위한 종소리

   이러한 나의 도전은 시작에 불과하다. 난 올해 귀화 시험을 치를 것이고, 합격 후 사회복지사 자격취득을 위하여 공부할 것이다. 나와 같이 고난과 역경에 지쳐있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도움을 주고 싶다. 발로 뛰는 사회복지사가 되어 내가 도움 받은 모든 것을 환원 해 주고 싶다.

 

   이 모든 나의 꿈에 힘을 실어주는 기반은 자활근로사업이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사업단 업무에 자신감을 주며, 일하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느끼게 해 주고 있는 사업에 내가 직접 참여할 수 있어 행복하다.

 

   또한 나는 떳떳한 엄마가 될 것이다. 힘든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내 삶을 스스로 개척 해 나가는 태현이 엄마 응웬티흐엉이 될 거라고 말하고 싶다. 내 모든 상황에 도움을 주고 내 일처럼 뛰어주신 자활센터 실무자분들에게 감사하고, 힘든 상황을 겪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싶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당신은 할 수 있다고,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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