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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후진을 하지 않는다
  • 년도2018
  • 기관명광명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이숙자
  • 조회수861

  대학교 2학년을 휴학하고 군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온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식탁에 앉아 한 목소리로 “우리 엄마 대단해요.”라고 한다.

 

   아들이 중학교 때 아들의 가방에서 우연히 꺼내 본 한 장의 종이에는 ‘속이 좁고 답답하고 무책임한 아빠, 화를 냈다가도 금방 웃어버리는 나사 빠진 고장 난 기계 같은 성격의 엄마’라고 쓰여 있었다.

 

  어느 새 훌쩍 커버려 이제는 “우리 엄마 대단해요.”라고 하는 말에 가슴이 멍해 왔다.

 

   ‘이숙자! 넌 가치 없고 형편없는 삶을 산 건 아니구나, 넌 훌륭하고 대단해, 지금까지 잘해 왔어 앞으로도 잘할 거야.’라고 스스로 칭찬하며 마법을 걸어 본다.

 

   1992년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던 중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남편은 방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가출을 했다. 짧게는 3일, 한 달… 전화 한 통 없는 남편을 찾아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하고 사방팔방을 찾아 헤맸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에게 남은 건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1학년 딸, 반지하방, 은행 대출, 카드 빚, 형제·자매와 교회 분들에게 빌린 채무뿐이었다.

 

   일자리가 필요했으나 사고로 인해 장애를 가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가 있는 다리는 더 아파 왔다. 잇몸이 내려앉아 말을 하면 입으로 바람이 들어와 말하기가 힘들 정도로 시린 상태였으나 치료비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치아를 빼는데 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내 손으로 뽑기도 했다.

 

  뿌리가 왜 그리 길던지 살점이 붙은 채로 뽑혀 그 고통이 말할 수 없었다. 고통이 심해 펄쩍펄쩍 뛰고 싶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탁기, 냉장고, TV, 컴퓨터가 수명이 다 되어 고쳐야 하는데도 고칠 수가 없었다. 가장 문제인 것은 세탁기였다.

 

  빨래는 손으로 하면 되지만 제대로 짜지를 못해서 화장실에 걸어 두었다가 밖에다 널면 겨울이라 꽁꽁 얼어버리고, 화장실에 계속 두자니 마르질 않아 집 안에다 널면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떨어졌다.

 

  냉장고가 없어 김치가 빨리 시어버려 음식물을 제대로 보관할 수도 없었다. 한창 컴퓨터를 즐겨할 나이의 아이들이라 수명이 다한 컴퓨터를 고쳐달라 투정 부릴 만도 한데 조르지를 않았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엄마마저 자기들을 버릴까 봐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여 견디기가 힘들었었다.

 

   빚을 갚지 못해서 독촉전화가 수시로 왔다. 돈을 갚으라고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IMF가 막 지난 때라 작은 집도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들이 견디기가 힘들어 울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암담한 상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 누가 들을까봐 한 번은 항아리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울기도 했다.

 

   딸이 과자가 먹고 싶다고 해서 동전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장롱 밑, 서랍 구석구석을 찾았지만 50원짜리 한 개, 10원짜리 다섯 개가 전부였다. 사탕도 200원인데 100원으로 뭘 사먹을 수 있니? 라고 하자 “엄마! 문방구에 100원짜리 사탕 있어”라며 그 돈을 들고 사탕을 사러 가는 딸을 보며 내 자신이 너무나 무능하고 하찮은 벌레 같았다.

 

   저녁, 자리에 누우면 내 영혼을 거두어 흙으로 돌려보내 주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했었다.

한번은 세 식구의 죽음을 생각했다. 나 혼자만의 결정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 아이들이 너무 불쌍할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물어 보기까지 했다.

 

  “엄마는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 견딜 수가 없다며 우리 고통 없이 같이 죽자”고 하자 아들이 “생명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지옥 가서 뜨거운 불 속에 사는 것보다 지금이 나은 거 같아요.” 라고 했고, 딸 역시 “죽기 싫어, 엄마”라고 해 우리 셋은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래 죽지 못하면 한 번 살아 봐야지, 악한 사람도 악한 날에 쓰려고 지으셨다는데 나에겐 따뜻한 말 한 마디 건 낼 수 있는 육신이 있지 않은가? 오래 걸리더라도 열심히 돈을 벌어 빚진 것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동사무소에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고,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여 광명지역자활센터를 소개 받았다. 청소와 수선 사업단이 있는데 어디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청소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였더니 청소사업단이 소속된 안양천변 공중화장실에 배치해주었다. 드디어 안정적인 일이 생긴 것이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화장실이었으나 청소를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깔끄미청’이라는 자활기업에 가서 물통에 물을 받아 청소를 하는 날이 많았다.

 

  청소를 하다가 얼굴이나 입에 변이 튀기도 했다. 일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저 서럽고 힘든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누군가가 급하게 볼일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했고, 이쪽저쪽 변으로 그림을 그려 놓으면 몸이 불편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그랬겠지 생각하고 넘겼다.


   한 달 급여를 받아 생활하니 만 원이 남았다. 전 재산이 백 원이었는데 만 원이나 남다니 백 배의 소출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 감사했다.

   2년 후 학교로 배치되어 화장실을 청소하게 되었다. 꿈도 많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 나갈 아이들에게 좀 더 위생적인 환경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과, 청소의 달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불편한 다리였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학생들의 눈높이가 되어 함께 하다 보니 중학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성 문제를 상담하는 아이, 아이들이 괴롭힌다며 이야기하는 아이, 집안일을 이야기하는 아이,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을 보면서 보람되고 에너지 넘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자활 근로에 참여한지 4년 후 사업단 반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참여주민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아 힘들었던 적이 많았으나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반장으로 있으면서 가장 안타깝고 힘들어 보였던 참여주민이 있었다. 그 주민은 일을 마치면 돌아갈 집이 없고 소변이 흘러나와 화장지를 대고 다녔으나, 중고 옷을 40만 원에 사 입고 건강식품과 수의 옷값으로 1,800만 원이 넘는 빚이 있었다. 병명도 알지 못하면서 건강식품만 먹고 당장 돌아갈 집이 없는데 수의 옷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지적장애를 갖고 있어 한글도 제대로 몰랐기에 센터의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그 참여주민에 대한 전반적인 사정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 후 참여주민은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고시원에 들어가 살게 되었으며, 치료비를 지원 받아 구로고려대병원에서 비뇨기과 수술을 받았고 동생들과 연락이 닿아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명의 참여주민은 자기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해 주고 금전적인 손해를 봐 도와달라고 했다. 상대방이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어 함께 찾았다. 내용 증명서 작성을 도와 거주지를 확인하여 보내고, 경찰에 고소도 하고, 재판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반장으로서 참여주민들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 수 있었고 돈이 없어 병원진료를 못 받으면 센터 담당 선생님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대출금을 갚기 위해 밥 대신 라면을 끓여 먹고 오천 원짜리 티셔츠와 만원짜리 바지 하나를 6, 7년씩이나 입으며 내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을 최대한 아꼈다.

 

  수급자 혜택을 받는 기간 동안 나에게 치장은 사치였다. 반지하 집도 매매가 되어 채무조정을 통해 신용회복위원회에서 분할상환 받은 채무를 일시금으로 갚아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탈 수급을 하고 한부모 가정과 차상위자활로 유형이 변경 되었지만 계속해서 자활사업단 반장으로 학교 청소를 하였다.

 

   자활기업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2015년 기아자동차 임직원분의 후원으로 정리수납전문 자격증과 청소대행전문 자격증을 취득하며 창업에 필요한 기술 등을 익혔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일어서게 된 것이다. 현장 방문과 기술 습득을 위한 교육을 받아 2016년 함께 일해 온 5명과 공동으로 ‘해오름클린’이라는 청소자활기업을 창업하여 당당히 대표가 되었다.

 

   나는 대표로서의 업무와 함께 현장에서도 직접 영업을 하고 있다. 공동 창업한 네 명도 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얼마 전 강남경찰서 본 건물, 파출소 7개, 지구대 1개를 위탁받아 청소 용역을 하게 되었다.

 

  국가를 위해 치안에 애쓰는 분들을 위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 십 배의 가격 차이가 있는 소독 약품, 알코올, 인체에 무해하다는 탈취제를 사용하여 소독과 방역을 열심히 하였다. 무엇인가 내 손으로 용역을 따냈기에 스스로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지금은 경기도청에서 광명시 저소득층 가구 100가구를 선정하여 가정 내 청소를 해주는 ‘깔끄미사업’에 전문가 인력으로 투입되어 일하고 있다.

 

  청소를 하러 다니면서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열악한 가정들을 많이 접했다. 바퀴벌레가 너무 많아 서 있으면 발을 타고 기어오르고, 싱크대에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쓸어내면 수북할 정도로 많아 도저히 맨발로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앞이 막힌 실내화를 신고 일을 한다.

 

  비위가 상하고 역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내 생각은 봉사도 하는데 돈 받고 하니 더 감사하고 내가 이 분들의 환경을 깨끗하게 해 줄 수 있어 고마울 뿐이다.

 

  이러한 자활사업을 만들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 주신 국가에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해오름클린’은 비행기가 되어 날아올랐다. 비행기는 후진이 없다.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 깨끗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는 쉼을 주고 싶다. 나는 오늘도 비행기가 되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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