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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봐야 살맛을 압니다
  • 년도2018
  • 기관명도봉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조봉연
  • 조회수758

  나만 이렇게 힘든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해서 20년 넘게 일했던 가구공장이 IMF로 문을 닫았습니다. 아이들과 먹고 살기위해 동화책 영업사원, 우유배달, 건설현장 잡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지만 그 일들마저 나에게 찾아오는 기회는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술, 담배를 모르고 살았던 내가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비관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마시는 횟수도 늘어 나중에는 매일 술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런 나를 곁에서 보기 힘들어 하던 내 아내마저 깊은 우울증으로 결국 내 곁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세상이 날 버린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없이 그저 죽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하루하루를 시체처럼 방바닥에 널브러져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딸들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는 나를 부축하며 언제 끓였는지도 모를 만큼 불어터진 라면 몇 가닥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집어 제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이런 몹쓸 놈도 아버지라고...’

 

   그때 정신이 나더군요, 그리고 기억이 났습니다. 나에게 남겨진 예쁜 딸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왜 그리도 못났을까요?

 

  더구나 작은딸은 터너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무슨 정신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동사무소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오랜만에 세수와 양치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겨울날씨에 비해 옷을 얇게 입어서인지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붙은 살도 다 빠져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면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물어물어 동사무소에 도착은 했지만 누구를 찾아야 할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서성이고 있었을 때 마침 어떤 직원이 내게 다가와 어떻게 왔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자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사회복지 담당자가 건넨 따뜻한 차 한 잔을 받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습니다. “어린 딸들을 위해 술을 끊고 싶으니 도와주세요, 선생님”

 

  복지사 선생님이 웃으면서 잘 오셨다며 가정방문을 약속해 주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웃음이 나더군요, 왠지 나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나봅니다.

 

   그날 저녁 참으로 오랜만에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정말로 동사무소 복지사 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지나온 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해결방법을 함께 찾자며 웃으셨습니다. 참으로 예쁜 미소를 보았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나는 조건부수급자로 선정되어,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작은딸의 병원비 걱정을 덜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내가 일 할 수 있는 일터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활센터’ 라는 곳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재활센터인지, 자활센터인지도 정확히 잘 모르는 그 곳을 찾아가 상담을 하면서 한 동안 잊었던 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왜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있다고 바보같이 생각했을까 후회를 했습니다. 막상 이곳에 오니 나의 처지와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센터에서는 나에게 여러 가지 자활사업을 안내하였는데 갑자기 아픈 딸이 생각나 무료간병사업단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후로 나의 일상은 180° 달라졌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딸아이들의 등교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였고 센터에 출근해서는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을 위한 공부도 했습니다.

 

  그동안 굳어버린 머리로 공부를 하려니 많이 힘들었지만 문제풀이를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어 재밌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해 요양보호사 1급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장애인활동보조인교육, 호스피스교육 등 간병에 관련된 많은 교육들을 이수하였고 어려운 분들의 간병을 위해 병원으로 나갔습니다.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은 독거노인, 장애인, 무연고자, 수급자 등 눈물이 나도록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살아보려는 의지가 강했고 남의 도움에 감사하며 긍정적이었습니다. 과거 내 형편을 비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일들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아프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을 선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간병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남자 환자들의 목욕을 주로 맡아 하였는데 성치 않는 몸을 닦아주며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소소한 이야기들을 허물없이 나누다보니 이전에 없던 친구들도 하나 둘씩 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변화에 딸들이 마냥 신나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작은 행복 속에 지내다 보니 우리 가족에게 임대주택이라는 큰 선물도 생겼습니다. 그동안 지하방에서 어둡고 눅눅하게 지냈을 딸들에게 더 없이 큰 기쁨이었을 겁니다.

 

  지하방에서 햇볕이 잘 들어오는 2층집으로 이사하던 날, 세 식구가 모처럼 중국집에서 기분 좋게 외식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비록 자장면 세 그릇이었지만 평생 없을 뻔했던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옵니다.

 

  나뿐만 아니라 센터에서 함께 하는 동료들이 하나 둘씩 임대주택에 당첨될 때 서로 내일처럼 기뻐해주고 박수쳐주던 모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도봉지역자활센터는 나에게 포근한 둥지같이 떠나기 싫은 고마운 곳이었습니다. 센터에서 2년 여간 머물면서 나의 몸과 맘이 충분히 건강해졌고 요양보호사 1급자격도 취득했기에 예전의 나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취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취업을 해서 수급자를 탈피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그동안 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나를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취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탈수급에 대한 불안감과 끝이 없는 딸아이의 병원비 등을 생각하면 솔직히 수급자로 남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빨리 취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취업을 하려니 남자요양보호사를 필요로 하는 기관이 적어 이력서를 들고 다리품을 더 많이 팔아야만 했습니다.

 

   힘들게 구직활동을 하던 중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감사하게도 이전에 파견 나갔던 병원에서 내가 일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환자 목욕담당으로 근무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노라 약속하고 2015년 9월 그렇게 고대하던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열심히 한 결과 많은 분들이 좋게 봐 주셔서 현재는 환자목욕담당이 아닌 원무과 팀원으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일은 내가 수급자에서 일반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우리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쉬운 일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고마운 것은 우리 큰딸이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후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기에 더 빨리 수급을 탈피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자활센터에서 아직도 제 갈 길을 못 찾는 이웃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용기와 힘을 주고 싶습니다. 소외된 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관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가 받았던 많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사회에 돌려주고 싶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세상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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