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홍보

성공의 계단 오르기
  • 년도2018
  • 기관명삼척지역자활센터
  • 제출자홍미화
  • 조회수915

   퇴근 길!...

 

  업무로 지친 몸을 차에 싣는 순간, 눈길은 자연스럽게 뒷자리로 향한다. 휑한 뒷자리가 오늘따라 더 넓어 보인다. 문득 내 소중한 아이들과 이 차안에서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생각나 괜히 룸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거울 저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7년 전 나는 눈물과 근심과 아픈 삶의 무게에 눌려 찌들고 힘든 얼굴이었는데...

 

   7년 전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던 가을, 힘든 현실을 견디지 못한 우리가족의 보금자리는 이혼이라는 이름으로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자식은 꼭 엄마가 키워야한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아이들만 챙겨 무작정 집을 떠나 왔었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내 힘으로 키워보겠다는 생각 뿐, 당장 갈 곳이 없었던 나와 내 아이들은 차안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볼까봐 한적한 주차장에서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용변과 세면은 공용화장실을 이용했다.

 

  옆자리엔 초등학교 6학년 딸, 뒷자리엔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다행히 챙겨온 담요 몇 장으로 차안에서 우린 피곤한 하루를 뉘였다. 아침엔 사람들이 북적대기 전에 전날의 흔적을 지워버리듯 우린 그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은 학교로, 나는... 어디로 가지? 지금부터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 그동안은 별 어려움 없는 생활이었기에 악착같이 뭘 해보지를 않았다. 뭐라도 해야 했기에 식당 설거지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힘이 좋아보였는지 식당 아주머니는 아이들의 방과 후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내 상황을 알고서도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배려 해주셨다.

 

   땀을 콩죽같이 흘려가며 하얀 세제 거품을 수도 없이 씻어내고 받은 5만원!

 

   그 돈이 그때는 우리 가족의 유일한 생계였고 홀로서기의 첫 시작이었다. 그렇게 식당을 전전하며 운이 좋은 날은 개업상가 청소, 결혼식 출장뷔페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힘은 들었지만 아이들과 지낼 작은 방이라도 구하려면 부지런을 떨어야했기에 힘든 것도 무시해버리고 매일매일 억척을 떨었다. 그렇게 20일쯤 지났을까?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이었던 아이들이 말이 없어지고 웃지도 않으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불평 한 마디 없이 서로를 챙겨가며 견뎌줬었는데, 역시 아이들한테는 무리였다.

 

  사춘기에다 한참 잘 먹어야 할 나이인데 매일 김밥,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좁은 차안에서 새우잠을 잤으니 참을 만큼 참았을 것이다. 곧 좋은 집으로 갈 거라고 안심시키며 잘 버텼었는데 내 소중한 아이들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아이들을 험한 세상에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저녁 친정집으로 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친정집 인근에 월세 방을 얻었다. 그곳에서 또다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넉넉하진 않았어도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해가 바뀌고 앞만 보고 달리던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아는 식당 주인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직장을 구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사실 다음 해에 딸이 중학교를 가야하고, 아들을 집주변 초등학교에 전학 시켜야했기에 엄마 직업을 ‘식당 설거지’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양보호사가 뭔지도 모른 채 신청을 했다. 그날부로 나의 식당 설거지 생활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아이들에게도 설명했다. 이제 교육 시작인데 마치 자격증으로 취직을 한 것 같이 부푼 꿈을 나누며...

 

  설거지 하는 엄마가 내심 싫었었는지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행복했었다. 소개를 해준 그 분이 참 감사했다. 요양보호사가 무슨 일을, 어떻게, 왜 하는지 알아갈 무렵 삼척지역자활센터가 나의 실습지로 정해졌다.

 

   삼척지역자활센터..., 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감사하게도 집과 가까운 곳에 분소가 있어 다른 이들보다 쉽게 실습을 할 수 있었다. 오줌을 지린 방바닥을 만지다가 그 손으로 뻥튀기 과자를 내어주는 어르신, 용변이 묻은 기저귀를 내 얼굴에 집어던지며 욕하시던 어르신들을 보며 요양보호사가 부푼 꿈만으로 할 일이 아님을 깨달을 즈음, 실습동안 아침시간에 같이 커피를 마시며 잠깐씩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하시던 분소장님이 실습 마감 며칠을 앞두고 면담 요청을 해 아이 둘을 위해 수급자 신청을 하고 자활에서 일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요양보호사에 대해 이제 겨우 알아가고 있는데 수급자라니, 사실 그동안은 사회복지 관련 단어들을 그냥 흘려들었었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 분소장님의 계속된 설득으로 원덕읍사무소를 찾았다. 그렇게 나와 내 아이들은 조건부 수급자가되었다.

 

   조건부수급자!...

 

   2009년 11월 나와 내 아이들은 가볍고도 무거운 꼬리표를 달았다. 그것은 곧 삶의 계단 맨 밑으로 떨어졌다고 생각되었으나, 자활센터에서 일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고 매월 80여만 원의 급여를 받으며 작은 것에 행복해 하며 살았다.

 

  그러고 한 달 후 분소장님의 권유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위해 4년제 대학교 야간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었다. 거의 매일 학교, 센터, 집을 오가며 사회복지사의 꿈을 키워갔다. 어두운 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로 위를 지날 때, 처음엔 불 켜진 집들을 보며 내 신세를 한탄도 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 꺼진 집들을 보며 남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나는 꿈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불 켜진 가로등을 유일한 동무삼아 대학을 다니며 한 계단 한 계단 성장 해 갔다.

  힘차게 성공의 계단 오르기를 시작했다.

 

   인큐베이터사업단에서 교육을 받고 여러 사업단의 현장 일들을 실습하며, 학업과 병행하여 하루하루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참여 종료기간이 되었을 때 주거복지 집수리 사업단에 자리가 비었다는 걸 알고 자청했다. 사업단 반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서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극구 말리셨지만 일이라면 뭐든지 할 자신이 있었기에 끝까지 우겨서 들어갔다. 시멘트 섞는 일, 현장 사진 찍기 등 반장님 보조역할을 톡톡히 하며 재밌게 일을 배워나갔다. 일이 끝나면 다음날 작업준비를 위해 반장님과 견적을 내고, 자재를 준비하고서야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됐다.

 

  아이들과는 아침시간 30분정도 잠깐 얼굴을 보는 게 다였지만 묵묵히 서로를 이해하며 보이지 않는 꿈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에게는 늘 미안했다.

 

   어느 날 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실장님이 전화를 하셔서 ‘현물급여’사업 정산을 해야 하는데 담당자가 갑자기 퇴사를 하여 그에 필요한 견적서, 거래명세서, 사진 등 정리업무를 하라고 하였다.

 

  다행히 내가 직접 일했던 현장이라 주소지에 맞는 서류들, 사진들을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태산 같았던 서류들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고 사진들을 보며 다시 한 번 현장에서의 일들을 생각하니 재미도 있었다.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업단 참여자들과 현장을 누비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 무렵 아이들을 제대로 못 챙기는 게 안타까웠는지 팀장님이 삼척으로 이사를 올 수 있도록 임대아파트 신청을 도와주었다.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지만 몇 억짜리 아파트를 사는 것 보다 더 뿌듯했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던 어느 날, 자활센터 회계업무를 하던 팀장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퇴사를 하여 직원 채용공고를 하였다. 경력도, 자격도 안 되어 감히 엄두도 못 내던 나에게 실장님께서 신청을 권유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관장, 실장님의 격려에 힘입어 도전을 했다. 쟁쟁한 스펙을 가진 분들과 최종 면접자로 결정 되었을 때 몇 번이고 포기를 하고도 싶었지만,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며, 머물러 있지 말고 계단을 오르듯 상승해야 한다며,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관장, 실장님의 말씀에 힘입어 2011년 4월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계단 오르기의 첫걸음을 뗐다.

 

   부담은 됐지만 나의 좌우명처럼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를 수도 없이 되새기며 실장님께 열심히 배웠다. 자활참여자로 들어와 직원이 된 나를 대하기가 껄끄러운 참여자들의 싫은 소리를 들은 적도 많았지만 빨리 익혀 격려하신 분들께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민생활지원과에서 전화가 왔다. 탈 수급 통보였다.

 

  드디어 수급자 꼬리표를 뗐다. 국가의 도움을 받아 숨이 틔긴 했지만 급여 외에 매달 통장에 조금씩 들어오는 돈을 볼 때면 사지 멀쩡한 내가 이런 돈을 받아도 되냐며 항상 불편한 마음이 들었었다.

 

  또 아이들이 급식비를 왜 안내는지를 질문할 때 마다 아이들이 기죽을까봐 말도 못하고 항상 작아지곤 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가난을 보고 듣고 물려주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탈 수급은 나에게 억만금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었다.

 

  이렇게 나는 또 한 계단 올랐다. 그래도 아직은 반만 이룬 것이다. 왜냐면 ‘차상위‘ 라는 계단이 남았으니까...

 

   그 후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2년 2월에 임대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어 삼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아이들도 시내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퇴근 후 아이들 저녁식사를 챙기고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 감사했다.

 

   2012년 11월,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센터를 떠나게 되었다. 참여자로 센터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다시 예전의 모습처럼 사는 것이 싫어 센터를 떠나 세상으로 나왔다.

 

  계획된 것이 없어 막막하긴 했지만 설거지도 하면서 버틴 나인데 못할 것이 없겠다 싶었다.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일당이 제법 되는 명태 건조 작업 일을 하게 됐다. 12월이라 야외에서 추운바람과 싸워야 했지만 일당도 괜찮고 변함없이 아이들을 챙길 수 있어 좋았다. 어떤 일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다시 수급자가 되어 계단을 내려가는 건 싫었다.

 

   이런 나에게 선물이라도 주려는 것일까? 자활센터에서 같이 근무했던 팀장님의 소개로 2013년 1월 삼척시니어클럽에 정규직으로 입사를 했다. 자활을 떠나온 지 한 달 만에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활센터 근무경력도 인정받아 사업팀장 자리를 배정받았다. 또 한 계단 올랐다.

 

  사업팀에서 500여 명의 어르신을 관리하고, 사업계획, 기관운영 등 일은 많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자활센터 참여자로 있을 때 많은 사업단에서 경험을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입사 당시 팀장, 2014년 선임팀장, 2015년 과장, 그리고 올해 드디어 실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성큼성큼 나의 계단 오르기는 계속되었다. 2014년에는 주민생활지원과의 도움으로 ‘희망키움통장2’에도 가입했고 소득이 늘어나 작년에는 차상위 꼬리표도 떼어낼 수 있었다.

 

  늘 소망했던 일반인이 된 것이다. 또 한 계단 올랐다.

 

  그리고 딸아이가 올해 본인이 희망했던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착실하게 본인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평온을 찾은 우리 세 가족은 지금 너무 행복하다.

 

   먼 길을 돌아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원점에 다시 돌아왔다. 이 원점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많은 시련과 눈물과 땀을 흘렸다. 아깝지 않다. 이런 훈련과정이 있었기에 안개 낀 광야를 헤쳐 나올 수 있었고 옆과 뒤를 챙길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삼척지역자활센터에서 만난 관장님 이하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제부터 난 새로운 계단 오르기에 도전한다. 그 첫 계단은 내 집 마련이다. ‘희망키움통장2’가 만기가 될 즈음 그동안 조금씩 부었던 적금도 끝이 난다. 비록 큰집은 아니더라도 우리 세가족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다. ‘희망키움통장2’ 가입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새롭게 생긴 복지정책 때문에 감히 꿈을 꾼다. 우리 가족 때문에 생긴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느라 감사함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이 기회를 통해 걸어온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어 너무 값진 시간이었고, 계단 오르기를 망설이고 힘들어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을 누군가에게 시련이 와도 희망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소설 같은 내 삶의 얘기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성공을 향한 계단 오르기를 힘차게 하길 바란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