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홍보

올해의 가을은 단풍이 유난히도 아름답다.
  • 년도2018
  • 기관명세종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유현정
  • 조회수735

  올해의 가을은 단풍이 유난히도 아름답다.

 

  높고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지나간 순간 순간들이 그림처럼 눈앞에 지나간다.

 

  벌써 20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맘 놓고 제로 한번 웃어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두 아들은 30가 되었고 나는 50 후반이 되었다.

 

  공무원이었던 남편은 은행 출금으로 부동산에 손을 다가 자금회전이 되지 않아 또 출금으로 이자를 갚고 그런 일이 계속 되어 결국 28평 아파트와 내가 운하던 고시원이 경매에 넘어갔다. 그러고도 빚이 4억 정도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돈 한 푼 없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나는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를 그로 둔 채 두 아들만 데리고 청주에 사는 언니 집으로 왔다.

 

  언니는 분식집을 얻어 주면서 장사를 해보라고 했고 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해보기로 했다. 단칸방에 가게가 딸린 집이라 방안에 있으면 바깥소리가 다 들려 조용하게 자기 방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중학교 2학년에 전학 온 큰아들은 한참 예민한 시기라 학교 가기도 싫어하고 사람들 드나드는 것도 싫어하더니 결국 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니던 목사님의 소개로 정신과 의사의 진료를 받고 분열증세 초기진단이 내려졌다. 돈이 없던 걱정도 남편이 없는 설움도 자식이 아픈 것에 비하면 사치스런 감정이었다. 나는 당장 분식집을 접고 마트에서 일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청소년 병동에 가서 치료를 받게 했다.

 

  고등학교 졸업에 아무런 자격증도 없이 취직하기가 쉽지 않기에 나는 방송통신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하여 주경야독의 4년을 보내고 유치원 정교사 자격을 얻었다. 내 나이가 마흔이 넘어 어린이집으로 면접을 보러 갔고 어린이집 교사로 취직이 되었다.

 

  아들도 많이 좋아져서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서 국립학 경제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작은아들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교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제법 안정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서 법무사 개업을 하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했고 회복하기 힘들다고 했다. 조금이나마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그마저 끊어졌다. 2학년인 큰아들은 돈을 벌어 보겠다고 휴학을 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병이 재발했다.

 

  온 세상이 암흑 같았다. 어디에서도 빛이라곤 없었다. 나는 그 동안 평안한 생활로, 잊고 있었던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서면 그분 밖에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불러서 그런지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난 홀로 아들을 살리려고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병원 치료를 했다. 끝이 없는 날들이었다.

 

  그나마 둘째가 국립 법에 입학하여 스스로 자기 일을 잘 감당해 주었기에 너무 고마웠다. 그렇지만 나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큰아들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를 했고 나도 그만 죽고 싶었다.

 

  그리고 덧없는 시간만 지나갔다.

 

  2011년 그해 가을은 유난히 더 추웠고 노랗게 물든 은행잎 마저 슬픔에 잠겨 있는 듯한 시월이었다.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던 나와 큰아들이 세종시로 이사를 온 날이다. 거처 할 곳이 없던 나는 아들이 입원한 병원 주방에 딸린 방에서 주방 일을 도와주며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청직원이 찾아와서 지역자활센터를 소개해주었고 나는 수급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활센터에서 일하기로 맘먹었다.

 

  상담을 끝내고 인큐베이터 과정을 거친 후 빵을 만들어 팔기도 하며 체험학습도 하는 ʻʻ브레드쇼ˮ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는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별 관심 없었지만 빵 냄새가 좋았고 수업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이곳에 근무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설거지며, 청소를 열심히 했다. 빵에 한 관심이 없었기에 나는 간호학원에 등록해 국비로 1년 동안 야간에 공부하고 주말에 실습하여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직업을 바꿀 수가 없었다.

 

  세종시 행복아파트 저소득층을 위해 분양했다. 수급자가 탈락되면 아들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 아파트 입주권도 없어지게 되니 자활센터에 근무하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했다.

  아주 저렴한 방 1칸 얻을 돈으로 나는 작지만 방 3칸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고 그 무렵 아들도 퇴원하게 되었다. 작은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고 몇 년 만에 우리 셋은 한집에서 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큰아들 적응할 직장이 필요했고, 나는 아직 완치되지 않은 아들을 나와 같이 있게 해달라고 센터에 간청했다. 센터장님과 팀장님의 배려로 아들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 나는 직업에 한 갈등에서 벗어났다.

 

  내 길은 이길이구나, 이제 이곳에서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과제빵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서점에서 책을 샀다. 틈틈이 공부해서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실습 여건이 잘 되어있는 환경에 감사하며 혼자서 동상을 보며 실습하여 25가지 빵을 혼자서 다 만들어 보았고 실기 시험에도 합격했다. 말이 쉽지 1년여 동안 계속 공부를 했던 것이다.

 

  제빵 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나는 강사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수강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두려움도 있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수업 전에 미리 동상을 보고 이론준비도 하며 또 1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수업이 점점 늘어났다. 거의 매일 체험학생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주문도 많아졌다.

 

  수업을 재미있어하며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수강생들을 보면서 제빵 강사로서의 기쁨과 자부심도 생겼다. 지금은 어린이집 교사가 아닌 나의 또 다른 이름 ʻʻ제빵 강사 유현정ˮ이 더 친근한 이름이 되었다.

 

  빵으로 인해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우리 가족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빵 냄새만 좋아했던 내가 이제 빵과 함께 호흡하며 동고동락하는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친구이며 전부가 되었다.

 

  학원 문턱도 밟아보지 않고 혼자서 노력하여 얻은 친구이기에 보육교사보다 간호조무사보다 제빵 기능사 유현정이 더 자랑스럽다.

 

  이제 센터에서 창업준비를 하라고 한다. 인원 3명이 정해졌고 한창 준비 중이다. 내년에는 자활기업 대표 유현정으로 불러질 것이다.

 

  끝없는 방황과 갈등 속에서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어가려고 들던 자활센터에서 나는 나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곳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직도 갈 곳을 몰라 방황하며 또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 이제 창업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꿈을 꾼다.

 

  자활기업으로 나갈 준비를 하나하나 해가며 좀 더 나은 생활을 기하며 내가 받은 만큼 나눠주고 베푸는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

 

  이제 크케 한번 웃어봐도 되겠지? 하하하~

 

복지정책과 직원들, 센터장님, 팀장님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