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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연결고리!
  • 년도2018
  • 기관명사상지역자활센터
  • 제출자황현옥
  • 조회수732

  ʻ사상지역자활센터ʼ라는 이곳까지 일하러 올 때, 아마 모두 말하 지 못할 사연들이 많으실 겁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저는 좋은 직장을 다니는 남편, 늦은 나이에 낳은 애교 많은 예쁜 딸과 함께 행복한 일만 가득한 세 가족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남편이 퇴근하면 딸의 재롱을 함께 보며, 평범하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유치원 원복을 입혀 손잡고 등원시키던 귀여운 딸이 7살이 되던 해, 남편의 빚보증으로 월급이 압류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모아놓은 돈이 없던 우리 가족은 점차 생활이 힘들어지고 행복한 가정생활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못 먹던 술을 마시고, 퇴근 후 종일 오락실에서 게임만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남편은 결국 가족을 책임질 능력이 없다며 이혼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린 딸과 차가운 세상 속에 둘만 남겨졌습니다. 무엇이든 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지만, 직장생활을 한 지도 오래되었고 나이도 많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노점상 채소 파시는 할머니까지 부러웠습니다.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린 딸을 생각하니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여 딸을 붙잡고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딸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엄마라는 생각과 갑작스런 상황에 혼란스러워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 딸을 위해, 딸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막 입학한 어린 딸에게 밥을 해줄 사람이 없어 차가운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으라고 할 때, 혹시라도 나가서 다칠까 봐 문을 꽁꽁 잠그고 나갈 때면 너무나도 속상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조그만 아이가 씻지도 않고 웅크리고 자는 모습을 볼 때면 불쌍하고 가여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혹시나 딸이 깰까 봐 소리 없이 한참을 울다 아이 옆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무심한 하늘을 탓해보기도 하고 모른척하는 사람들을 탓해보기도 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밤새 울어보아도 희망 한 줄기 없이 변하는 것도 없고 내 심정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었습니다.
  엄마에게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보여주고 싶었던 딸은 문 앞에 상장을 놔두고 잠이 들어 있었고, 저는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와 집에서 밝게 잘 성장해가는 딸 하나만 바라보고 몇 년 동안 여러 식당을 옮겨 다니며 고된 생활을 전전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식당에서 외식할 때면, 집에 혼자 있을 딸에게 괜히 전화를 걸었습니다. 더운 여름에 뜨거운 불 앞에서 선풍기 하나 없이 요리와 설거지를 할 때면 서럽고 억울해서 말없이 눈물만 흘리며 일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리에 관절염이 왔습니다. 아파서 서 있기가 힘들어 몇 개월 앓고 쉬다 보니 생활비가 떨어지고 추운 겨울,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지인을 통해 주민센터에 가면 아픈 사람에게도 일자리를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던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당장 주민센터로 달려갔습니다.그렇게 도착한 주민센터에서 연락을 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저는 며칠 동안 휴폰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저는 학장사회복지관 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의 밥을 해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식 같은 아이들에게 우리 딸처럼 차가운 밥 먹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금이라도 몸에 좋고 따뜻한 음식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복지관에서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노력 끝에 자격증도 취득하습니다.

복지관에서 5년이 지나고 구청의 안내에 따라 사상지역자활센터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자활센터에서 인큐베이팅 교육을 받고, 내가 무엇이 적성에 맞고 잘할 수 있을지에 해 상담을 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자활사업 담당자를 통해 커피 2호점을 오픈 할 예정인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고민 끝에 실습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ʻ요즘 부쩍 많아지는 카페와 실력 있는 바리스타 사이에서 살아남 을 수 있을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ʼ하는 마음에 두려웠고, 한 번도 도전해 보지 않은 새로운 분야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커피사업단에 참여하는 동안 자활센터에서 자격증 취득을 위해 바리스타 학원을 등록해주었고, 저는 그 기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바리스타 자격증 필기시험에는 어려운 어와 많은 원두의 종류 등 외울 것이 정말 많았지만 오랜만에 공부를 위해 잡아본 연필이라 그런지 절로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ʻ나이 먹고 외워지겠어?ʼ 등 장난스럽게 격려를 해주곤 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새벽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잘 외워지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지만, 학창시절로 돌아간 기분도 들고 무엇인가를 배우고 나의 지식이 된다는 느낌에 공부가 즐거웠습니다.


  드디어 필기시험 날! 밤을 새워 공부를 했지만 혹시나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하면서 시험을 치러 갔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인지 정답이 눈에 쏙쏙 보고,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룬 뒤 자신만만하게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실기시험을 위해서는 밤낮 구분 없이 커피 추출을 연습하며 마셔서, 잠이 안 와 밤을 자주 새우기도 했습니다. 딸을 심사위원으로 앞에 두고 동상을 찍으며 연습도 했습니다. 집에 없는 기계를 만지는 척하면서 ʻ시연 시작 하겠습니다.ʼ라는 말을 몇백 번이나 한 지 모르겠습니다. 실기시험 당일 날은 너무 떨려서 편하게 시험을 치기 위해서 ʻ에 이 모르겠다. 될 로 되라!ʼ라며 당당하게 시험을 치고 나왔습니다. 후련하기도 하고, 많은 나이에 도전해 볼 수 있게끔 도움을 준 자활센터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시험 합격이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는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걸 느끼며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온 나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습니다. 딸 아이도 친구들에게 ʻ우리 엄마 바리스타다!ʼ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말에 어깨도 으쓱해지고 처음으로 멋있고 자랑스러운 엄마가 된 것 같아서 예전처럼 슬프고 아픈 눈물이 아닌 세상에 한 승리의 눈물이 흘습니다.


  자활센터 커피2호점에서 3년째 바리스타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던 어느 날, 담당 팀장님께서 자활기업에 나갈 의향이 없는지에 관해 물어보셨습니다. 자활센터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자활기업에 나갈 기회가 생기니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론 확실히 마음을 먹기까지 고민도 많았고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11월 오픈을 앞두고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함께 할 동료들과 의견 차이도 있었지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ʻ뭔가 내 것이 만들어지고 있구나!ʼ 하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기고 가슴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꼭 성공할 것입니다. 세상과 나의 연결고리가 되어주신 사상지역자활센터 센터장님을 비롯하여 자활기업에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신 여러 분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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