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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꽃처럼- 부제 : 반드시 찾아오는 행복
  • 년도2017
  • 기관명부천원미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윤자
  • 조회수1,076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큼 좋은 일도 찾아온다는 말이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동안 있었습니다.새벽 1시... 퇴근 이후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정리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은 바쁜 일상생활 속에 잠시 나에게 주는 휴식, 선물과 같은 시간입니다. 오늘따라 살랑살랑부는 가을바람 때문인지 잠시 지나온 나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감성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방에서 생활하다 집안 사정으로 청소년 시절에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당시라 나 역시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심리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했었고 학교생활도 어려움이 있어 모든 일에 있어서 부정적이며 반항적인 아이의 모습으로 점차 변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고민해야 하는 고3 시절에는 왜 공부를 해야 하고 대학을 가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면서 반항하고, 자학하면서 결국에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며 대학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친척 집에 머물며 조그만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에서 동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노는 자리에 언제나 제가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밝고 명랑한모습 뒤에는 저 자신만이 아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항상 공존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결혼적령기에 접어들 때쯤, 한 남자를 만나 연애를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우리끼리의 행복한 삶을 꿈꾸며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자는 약속을 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꿈이었나 봅니다. 교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은 둘만의 것이 아니기에 종교문제로 시작되어 제사 등의 문제로 남편과 자주 다투게 되었고 댁과도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면서 불안한 가정생활이 연속되었
고 남편과의 신뢰 부분도 땅끝까지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기, 그렇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가정을 포기할 수 없어 남편과 상의 끝에 시댁에서 떨어진 부천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로 정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남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지물포를 열어 힘찬 발을 내디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내 마음처럼 되지 않고 자꾸만 쪼그라져 가는 살림에 결국 가게로 살림집을 옮기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새벽마다 벼룩시장을 배포하고, 그 에는 도배일을 하며 힘들게 생활을 이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2009년 갑작스럽게 남편이 쓰러지고 6개월간 병간호를 했지만, 편은 내 옆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면서 마치 나 때문인 것 같아 삶의 허망함으로 하루하루 무기력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두 자녀가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ʻ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ʼ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서서 동주민센터를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의 소개로 부천원미지역자활센터와 인연을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자활센터는 이제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던 나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을 마련해준 곳입니다. 센터에서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러 사람이 있었고 인큐베이팅사업에 참여하면서 교육도 같이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워서 털어놓지도 못한 나의 이야기들을 편하게 오픈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인큐베이팅 과정을 마치고 택배사업단에 참여하게 되었고 무엇이든 배워나가 보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근무한 결과 2012년 하반기에 택배사업단의 대표로 선임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표로서 지시하며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저 스스로 많이 부담스러웠고, 대표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업단 종결을 원하기도 했
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 자활센터 담당자분의 많은 지지와 격려가 있었고 그동안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부분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오해가 있었던 부분을 조율하면서 대표로서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택배터미널에서 물건을 인계받아 배송하는 업무로 각 대리점에서 수수료를 받았지만 나, 동료, 그리고 내가 근무하는 택배사업단 모두가 잘 되는 방법이 무엇일지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의 첫 단계로 내일키움통장과 자활성과금 적립을 위해 배송확대 및 수수료 인상체결, 배송 스캔 추가 작업 등을 우리가 직접 하면서 예전보다 많은 금액을 사업단에 적립할 수 있었습니다. 물량확대를 시도하며 한진택배와 인연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택배사업단에 참여하며 자활센터의 지원으로 업무와 관련된 여러 교육도 받고 2013년에는 화물운송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화물운송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자활사업 참여 종결 3년이 가까워져 오면서 사실 여러 가지를 고민했었습니다.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감사한데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속에 감사하게도 자활센터에서 자활기업으로 창업하는 부분에 관해 설명해주셨고
두려웠지만 지금까지 해온 모습대로 ʻ이제는 정말 내 사업이다ʼ라는 생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년 4월, 정말 내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될 시간입니다. 자활기업 ʻ원미씽씽택배 대표 김윤자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콩꽃이라고 혹시들 들어보셨나요?
 콩꽃의 꽃말은 ʻ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ʻ 이라하는데, 콩꽃의 꽃말처럼 힘들었던 나의 삶에 부천원미지역자활센터를 찾아 나설 수있도록 행동의 원동력이 된 두 자녀가 이제는 반듯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자활기업을 창업한 나의 모습들을 생각하면 이제야 내 인생에서도 콩꽃처럼 밝은 햇살이 비추는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부천원미지역자활센터를 찾았던 저에게 무엇보다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만들어 준 과정들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조건부수급자에서 탈수급이 되었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해주고 더불어 공동체의 한사람으로, 당당히 자리할 수 있게 도와준 센터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보다 내일은 좀 더 행복할 거라는 ʻ콩꽃처럼ʼ내일을 기대하며 오늘도 전 열심히 앞을 향해 전진해보고자 합니다. 띵동~♫ 띵동~♬
 누구세요?
 행복을 배달하는 택배원 김윤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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