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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의 희망을 준 전남여수지역자활센터
  • 년도2017
  • 기관명전남여수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이광휴
  • 조회수1,127

*자활수기집 제13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이광휴 님'의 이야기 입니다.

인생 2막의 희망을 준 전남여수지역자활센터


무더운 6월 언제부턴가 지난날을 뒤로하고, 앞만 보고 살아온 나에겐 과거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그 자체다. 지난날을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 것 자체가 나에겐 사치다.
2005년 5월 자활센터에서 참여자로 일해 온지 어언10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자활 10년 세월 동안 내 인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ʻ절망이 희망으로ʼ ʻ꿈이 현실로ʼ ʻ부정이 긍정으로ʼ 참으로 지난 10년은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악몽의 지난날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지난 2001년 초 결혼 10년 만에 나에겐 죽음보다 무서운 ʻ이혼ʼ이라는 아픔이 닥쳐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모든 게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내 책임이었다.

애들 엄마는 홀연히 떠나갔다. 비록 무능한 애비일지라도 11살, 8살 두 아들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삭막한 서울에서 살아갈 날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정신도 나갔다.
아이들에겐 엄마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그저 두 아이를 부둥켜안고 서러운 눈물만 쏟았다.
사실 나는 선천성 지체장애로 약간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물불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았다.
봉제공장 허드렛일, 신용카드 배송, 좌판장사 쉬운 일은 없었다.

밤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두 아이는 기다리다 지쳐 저녁밥도 굶고 잠이 든 날이 날마다 연속이었다. 내 자식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지 않는가. 일정한 퇴근 시간에 맞춰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찾아보았다.
달동네 건설현장에서 모래 등짐을 지고 나르는 일이었다. 등짐을 지고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불편한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찔했다. 3일째 되던 날, 출근하자마자 책임자로부터 위험하니 그만 나오라는 통보를 받고 피눈물을 쏟았다. 절망 그 자체였다. 나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애들 앞에서는 밝게 웃었고 씩씩해야만 했다. 가슴이 찢어지고 미어졌다. ʻ애들만큼은 별 탈 없이 자라길
기원했다. 며칠을 쉬고 있던 중, 학교에서 둘째 아이 급식당번 차례이니, 꼭 참석해서 봉사를 해야 했다. 당시 아이가 초등 1학년이라 어쩔 수 없었다.

급식실이 따로 없어서 조리실에서 직접 교실 복도로 배송해서 복도에서 배식을 해야 했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옮기는 나 자신도 조심스러운데,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아슬아슬했겠는
가 정말 서럽고… 복도에서 배식을 하는데 전부 엄마들이고 아빠는 나 혼자였다. 또다시 서러운 눈물이 쏟아졌다.

급식 당번 날은 어찌 그리 빨리 돌아오던지… 얼마 후 급식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생겨 고비를 넘겼다. 일자리는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전세 보증금만 축내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 성격도 소심해지는 듯했고 삶의 한계가 다가왔다. 그러던 중 지방에 사는 동생들한테서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남으로서 책임을 버리고 애들 엄마와 연애하던 중 수년간 소식을 끊은 채 살아온 나. 별수 없이 2003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사화를 쓰고 나타나도 환영받지 못할 진데, 초라한 모습에 동생들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피는 ʻ물보다 진하다ʼ 했던가. 동생들의 도움으로 고향에 둥지를 틀었다. 가깝게 살다 보니 가족들의 잦은 만남으로 아이들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고마운 형제들이여) 아무리 힘들어도 애들만큼은 함께했고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기댈 곳은 동사무소 사회복지과 밖에 없었다.

동사무소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녀, 드디어 ʻ여수지역자활센터ʼ에 가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무작정 찾아갔다. ʻ센터에 들어서니 맡은 일은 달라도 자주 만난것처럼 반겨주고, 챙겨주고, 용기를 주는 선생님들 잊을 수 없는 진정한 내 인생의 멘토들이다.
면담을 통해 2005년 5월 청소 사업단에 배치를 받았다. 사실 청소일은 조금 천한 일이 아닌가. 갈등 속에서 망설였다. ʻ사즉생ʼ 그래 다시 시작하자 어차피 밑바닥까지 오지 않았는가. 죽기를 각오하고 아이들과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들 못 하랴 함께하는 참여 동료분들 면면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나와 처지가 비슷한 분들이 많았다. (자활센터)=스스로를 깨우치고 일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곳

3년간의 자활 근로 경험을 밑천 삼아 2008년 ʻ푸른 청소 여수ʼ 자활 공동체 기업이 설립되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자신감도 있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해가는 마음으로 5명이 똘똘 뭉쳐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한 날이 부지기수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피 묻은 가시밭길을 헤쳐 나온 지 어언 7년, 이제는 많은 고객으로 부터 인정받고 뽐낼만한 성공 기업으로 성장 중이다. ʻ함께 참여하고' 함께일 하면서 함께 나누는 <자활공동체> 아니 우리에겐 <운명공동체>이다ʼ ʻ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ʼ는 말처럼 어려운 역경을 헤쳐 나온 우리 5명의 용사들이 뭉치면 못해 낼 일이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 개인적으로는 두 아이가 별 탈 없이 성장하여 큰아이는 서울에 있는 건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반이며, 둘째 아이는 대학재학 중 입대하여 자기 발전을 이루어 가는 중이다 아이들에게 고맙기도 하고,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준 여수지역자활센터에 근무하는 나의 멘토 선생님들 덕분이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큰아들이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어려운 삶을 살면서 몸소 느낀 점이 그 학과를 선택하게 된 가장큰 이유인거 같다. 사회에 나와서 사회복지의 전문가가 되어 사회에서 소외되고 힘
든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맛본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꼭 선사해줄 수 있는 사회복지사가 되길 기대해본다.

내 열쇠고리엔 호루라기가 함께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하루하루 마감을 휘파람 소리로 마무리 한다. 아직도 우리 주위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이웃이 있다.
모두가 자활의 열정으로 꿈과 희망을 이뤄 함께 휘파람을 불 수 날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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