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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연의 '희망키움통장' 여섯 숟가락의 합창
  • 년도2016
  • 기관명경북광역자활센터
  • 제출자지옥연
  • 조회수1,638
*자활수기집 제13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지옥연 님'의 이야기 입니다.

지옥연의 '희망키움통장' 여섯 숟가락의 합창

위기가 찾아오다.
첫 아이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시기, 나는 화장품가게를 차렸다. 일을 하게 되고 2년이 지났을 때 남편의 사업이 실패를 하게 되었다. 야반도주를 하듯이 내려온 시골, 우리 부부의 품에는 갓난쟁이 둘째가 함께 안겨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양산을 손질하는 부업을 하였다. 남편은 더 이상 직장을 다니려고 하지 않았다. 직장을 다녀도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고, 종종 술로 밤을 새웠고 나를 괴롭혔다.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가족의 가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남편은 작은 경제활동조차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할수록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는 나의 마음을, 몸을 조금씩 조각냈고, 남편의 행동은 어느새 집착에서 폭력으로 나아갔고 나의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서야 알게 될 만큼 교묘하게 이어져 나갔다.

첫 아이가 고등학교에 막 적응되었을 시기, 혼자 버는 푼돈으로 내 아이들을 키우기 버거웠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썼던 사채.... 조금씩 꿨던 돈들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날 더 힘들게 했다. 사채업자들의 행패에 너무 슬프고 비참했지만 나는 내 아이들을 감싸 안아야 했기 때문에 견뎌내야 했다.

한 줄기 빛을 만나다. (희망키움통장에 가입하다)
10년 전 쯤부터 남편은 당뇨와 의처증뿐만 아닌 다른 증세를 가지기 시작했었다. 지나가는 사람과 시비를 붙고 정처 없이 매일 걷기만 하고 허공에다 욕을 하기도 했다. 나 혼자서 여섯 식구의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시댁 식구들은 그 돈 벌어서 어디에 쓰냐며 남편의 병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고 냉대했다. 사랑하는 내 아이들, 바라보기만 해도 힘이 되는 내 아들과 딸을 보며 매일 힘을 얻었다. 그리고 남편의 건강이 좋아져 가족이 다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날, 그런 행복한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으로 내 마음속을 가득 메웠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이장님을 통해 기초수급권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집 사정을 딱하게 여기셨는지 면사무소를 찾아가보라 말씀하셨다. 기초수급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증명할 서류가 많고 까다로웠지만 불평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ʻ기초수급ʼ 이 한 단어가 그 당시 내 삶의 동아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동생으로 부터 우연히 듣게 된 ʻ희망키움통장ʼ 나처럼 일하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매달 10만원의 금액을 적금하고, 3년의 기간이 끝나면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칠흑같이 캄캄하던 내 앞날, 내 마음속에 ʻ빛줄기ʼ를 비추어 환하게 하듯, 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ʻ희망키움통장ʼ에 가입하게 되었다. 집이 힘들어지고 꿈조차 꿔보지 못했던 ʻ적금ʼ이었지만, 3년 후를 바라보며 없는 살림을 줄이고 줄여, 적금을 시작했다.

2012년 5월, 적금을 시작하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 삭막한 사회에 도약하게 되며 어려워할 때 큰 아이가 이를 조금 덜어주려 애를 썼고, 둘째아이도 다니던 대학을 1년을 휴학하고 잠깐 동안 본격적으로 집안일이며, 나를 대신하여 동생들에게 부모로서의 역할을 나눠주었다. 어느새 성인이 다된 나의 두 딸이 버팀목이 되어 나를 숨 쉬게 해줬다.

희망을 키우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3년이 지나 만기가 도래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3년 만기를 기점으로 소득이 좀 올라 탈수급도 하게 되었다. 지급에 갖추어야 할 서류를 안내받고 서류를 준비하여 2,000만원이 넘는 목돈을 수령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그 돈으로 둘째의 전셋집을 마련해주었다. 그 집은 왕복으로 4시간이 되는 대학교의 통학시간을 4년을 가까이 단 한 번도 군말하지 않고 다녀준 딸에게 주는 미안하고 고마운 나의 마음이었
다. 그리고 아이들과 상의해 남편을 입원시켰다. 병원을 보내는 것에 있어서 많은 결심이 필요했다. 가족회의를 하고, 시댁에 우리의 의사를 전했다. 모질다는 질타를 받았지만 결단을 내야 했기에 우리는 단호했고 남편은 딸의 눈물에 병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족회의를 한 다음 날 우리는 10년 만에 다 함께 외식을 했다. 다같이 밥을 먹고 ʻ00병원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상태는 생각보다 나빴다. 그 당시 당뇨로 인해 치아는 거의 녹아있었으며, 시력도 간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ʻ만성 조현병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폐쇄병동에 입원하고 돌아오는 길, 내 아이들은 잘한 일이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첫 면회를 갔을 당시 남편은 퇴원시켜달라는 말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퇴원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치료가 한 달이 다되어갈 무렵, 남편의 안색은 좋아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전의 두서없던 말들도 줄고, 자신의 의사를 바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웃음꽃을 되찾다.
올해 추석, 남편은 병원에 외박신청을 내고 시댁과 친정에 인사를 올리러 찾아갔다. 아프기 시작하면서 단 한 번도 남편은 시댁과 친정 그 어느 곳도 가지 않았었다. 남편이 시댁에 가지 않는 것도 내 탓이라며, 가족 행사 때마다 나를 매몰차게 대하고 병원에 입원 시켰다고 나를 욕했던 시댁 식구들에게 ʻ내 남편이 이렇게 나아져 간다고ʼ, ʻ치료를 선택한 것은 옳았다고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건강한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웃으면서 식사를 하는 내 작은 소망은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 있다.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준 4명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견딜 수 있었지만, ʻ희망키움통장ʼ이 없었더라면 결코 내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꿈도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ʻ희망 키움 통장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다시 ʻ웃음꽃ʼ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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