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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의 희망
  • 년도2016
  • 기관명여수시민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차경흔
  • 조회수1,733

*자활수기집 제13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차경흔 님'의 이야기 입니다.

간절함의 희망 

밖을 서성인지도 몇십 분 째!
저 문만 열고 들어가면 지금보다는 힘들지 않을 것 같은데...
저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밖에서만 서성이고 있는 내 모습이 유리에 비친다. 등에서는 아무 근심도 없이 잠든 막내가 보인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본다.
ʻ그래, 괜찮을 거야. 용기를 내어보자.ʼ 하며 문을 열어본다.
웅성웅성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누구 하나 나처럼 힘들고 지쳐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사회복지과 앞에 서서 ʻ저기....ˮ 몇십 분 만에 용기를 내어 들어왔는데도 담당자 앞에서 나는 다시 말문이 열리지 않는다.
지금 내가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이들이 힘들어진다. 다음 달 생활은 또 어찌해야 할지... 앞이 막막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담당자님의 따뜻한 눈빛을 보는 순간 용기가 났다.
담당자님께서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해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ʻ아이 업고 힘들어 보이세요. 여기 앉으셔서 천천히 말씀해보세요.ˮ
뭔지 모를 울컥함과 함께 용기를 냈다. ʻ저... 저 좀 도와주세요.ˮ
ʻ아이 셋을 혼자 키우고 있고 막내가 너무 어려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좀 도와주시면 정말 열심히 살아 보답할게요.ˮ 하며 지난날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남편의 외도로 첫 결혼에 실패하였다. 아이 둘과 나는 친정의 그늘 밑에서 그리 어려움 없이 아이들 키우면서 살고 있었다.
혼자 아이들 키우며 살던 6년...
혼자인 자식과 동생의 걱정으로 식구들이 모이는 명절은 왠지 불편한 자리가 되어버렸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하고 있는 언니 동생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져서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엄마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는 암 선고를 받으셨다. 아버지께서는 ʻ내 죽기 전에 우리 흔히 짝지어 줘야하는데...ˮ 하며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서로의 실패를 위로하며 시작된 두 번째 결혼생활.. 그 행복이 깨지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식 둘을 데리고 들어온 며느리가 마음에 들을 리 없었던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상상 이상이었다.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 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께 죄를 짓는 것 같아 참고 지냈다. 아이들에게도 안정된 생활이 필요했기에 참아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 후 친정아버지의 사망으로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예전처럼 아이들과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찰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기도 벅찬데 셋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지우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다. 아이를 지우기 위해 찾은 병원인데 힘차게 뛰고 있는 아이 심장 소리를 듣고는 차마 아이를 지울수 없었다.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혼자서 서울에서 아이를 키울수가 없어 언니가 있는 여수로 오게 되었다. 만삭이다 보니 일을 할 수 없어 1년 이상 언니의 도움과 약간의 돈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너무도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어서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제대로 해준 게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몇 해 동안 언니에게 도움을 받다 보니 더 이상 언니에게도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염치가 없었다. 그렇게 동사무소로 나는 향했다.

담당자님의 온화하신 눈빛으로 몇 장의 서류를 작성하라 하셨다.
ʻ조금만 용기 내세요. 서류는 접수되었고 조만간 방문할게요.ˮ
그냥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창피하고 왠지 모를 설움에 복받쳐 그냥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 꼭 무언가를 구걸하러온 거지같아 내 자신이 너무도 창피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내 자신을
자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급자로 결정이 되었고 난 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아이들이 혹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아이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시대가 바뀌었구나 싶을 정도로 학교에나 어디서든 기초생활수급자라고 창피를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막내가 조금씩 커 가면서 좋아하는 요리분야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요리교육을 받아 경험을 해봤고 아이들을 혼자서 키우려면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어서인지 선생님들 눈에 띄었다.

어떻게든 아이들과 함께 먹고 살아가야 하기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말에 쉬면서 좋아하는 요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직장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요식업에서도 한식, 양식, 중식, 일식, 전통음식을 가리지 않고 설거지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배워 나갔다. 좋아하는 일이여서인지 너무 행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가족이 함께 살 수 있게 돈까지 벌어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다 지인분의 소개로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더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활도 안정 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소득신고를 하게 되면 수급비가 돈 버는 만큼 삭감되었지만 당당하게 내가 벌어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는 점에 너무 감사하여 소득신고를 하였다. 그렇게 어려울 때 수급비를 받아 우리 가족이 숨 쉴 수 있었기에 이렇게 소득신고를 하여 수급비를 적게 받아간다면 다른 분들에게도 나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하여 하루라도 빨리 신고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희망키움통장을 가입 해 보라고 자활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수급자면서 근로소득이 있어 가입이 가능하다고 안내를 해 주셨으며 희망키움통장의 지원내용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탈 수급 조건으로 3년 동안 내가 돈을 버는 만큼 지자체와 복지부에서 장려금과 매칭금을 적립 해주는 사업이라고 설명해주셨다.

탈 수급이긴 하더라도 매달 10만원씩 36개월 후면 무언가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왠지 모를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자활센터에서 알려주신 대로 신청하기 위해 바로 동사무소로 향했다. 몇 해 전 너무 어려울 때 수급자로 선정해 주신 담당자님을 다시 뵈었다. 너무 반가웠고 우리는 그동안의 소식들을 주고받았다. 그동안의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들으시고 내 일인 것처럼 행복해 하셨다. 희망키움통장은 매월 소득이 적을 때는 적게 모이고 많을 때는 많게 모였다. 적립금이 모아지는 통장을 보며 너무나도 뿌듯했다.

그러나 행복에 시련은 꼭 온다고 나는 갑상선암을 선고를 받았다.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삶에 희망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 셋을 키우며 이렇게 열심히 생활하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며 삶의 회의가 왔다. 암 수술과 함께 온 우울증으로 가족 모두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잘못 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지? 지금도 남들처럼 해 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한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며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괴로운 삶을 포기하고 싶어 자살 시도를 하려다 나 없이 자라 갈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 마음을 내려놓았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수술 후 막내가 병원에 와 ʻ엄마 살아줘서 고마워.ˮ 라고 하는데 자살을 생각한 내 자신에게 실망하였고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하며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갑상선 암은 지속적인 요양이 필요한 터라 근로를 할 수가 없어 사례관리자님과 상담 후 희망이었던 통장을 중도해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건강이 호전되었고 다시 일을 하게 되어 희망키움통장을 재가입하게 되었다.

수급에 있으면서도 생활비를 아껴가며 어렵게 들어놓았던 보험에서 약간의 보험금이 나와 아이들과 요양 차 시골로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10년 동안의 꾼 꿈인 아이들과 함께 살 작은 집이
생겼다. 나는 그동안의 도움에 보답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면사무소에 찾아가 탈 수급을 신청했다. 담당자님께서 공무원 생활하는 동안 스스로 탈 수급 신청하시는 분은 처음 본다고 흐뭇해 하셨다. 대출을 받은 게 많고 그 외에 빚이 많아 탈 수급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탈 수급을 신청하였다.

정말 어려웠던 때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어쩜 우리 가족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씀드렸다. 몸이 아프고 약에 의존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암은 내게 큰 시련도 아픔도 아니라고 너무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탈 수급을 하게 되었다고 자활센터 사례관리자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탈 수급을 한 후에도 희망키움통장은 계속 유지가 할 수 있다고 안내를 받았다. 너무나 기뻤고 다행이라고 너무 고맙다고 하였다. 탈 수급을 하며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게 희망키움통장이었다. 그나마 목돈이 마련되면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을 것 같아 희망키움통장은 꼭 유지 하고 싶었었다. 탈 수급을 했어도 소득이 높지 않아 유지가 가능하다는 말씀에 너무 기뻤다. 갑작스런 탈 수급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3년의 흘렀다. 그렇게 성실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만기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만기 절차를 준비하자고 자활센터 사례관리자님에게 연락이 왔다. 만기 절차
안내를 받기 위하여 자활센터로 내방하여 주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사례관리자님과 만기 상담을 하며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우리 가족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여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망키움통장을 통해 자립했고 자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기 절차 안내를 받고 집에 돌아가 서류를 준비해 보았다. 가만 돌이켜보니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소소하지만 참 많은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물론 여수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넘게 들어가는 곳이지만 작은 나만의 집이 생겨있었다.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우리들만의 따뜻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관련서류를 갖고 다시 센터로 내방하여 만기 절차를 밟고 동사무소에 서류를 제출하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ʻ하나 은행입니다. 고객님이 성심껏 준비하신 희망키움통장이 만기가 되었으니 은행을 방문하시어 수령해 가세요.ˮ 라는 연락을 받았다. 350만원(중간에 생활이 너무 어려워 한 달 납부하지 못하였다.)을 넣었을 뿐인데 2,400만원을 수령하였고 희망키움통장 적립금액으로 집 옆에 작은 작업장 갖게 되었다. 그 작은 공간이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하는 발판이 되었다.
나의 작업장이 생기고 나니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작업장을 찾아다니러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히 음식개발을 연구할 수 있었으며 가장 좋은 부분은 식구들과 함
께하는 시간들이 많아져 우린 더욱 행복했다.

나는 기초생활 수급자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러 주위 분들의 도움과 꿈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도 보니 지금은 ʻ2010, 2014남도 음식 문화 축체ʼ에서 최우수상 수상, ʻ2014년 한식의 날ʼ에서 의례음식 부분 대상 수상, 2015년 I-chef 금상을 수상하였고 그 외 여러 요리 대회에서 수상을 하여 당당한 사업장의 대표로 그리고 밖에서는 직업전문학교 및 소상공인 협회에서 요리 강사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지역의 특산품을 이용한 음식개발과 폐백 이바지 등의 전통음식 및 한국식 디저트 메뉴개발 그리고 요식업 컨설팅을 하고 있다. 특산품 개발 등으로 2015년 AT센터 박람회에 참가하였으며 현재도 열심히 특산품을 이용한 음식을 개발하고 있고 그로 인해 '여수 방송 전국시대'와 'MBC 고향이 좋다'에 방송 출연도 하였다. 최근 대회에서 만났던 쉐프들과 함께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리자는 취지로 미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국 및 세계 몇 개 중요도시를 돌며 한국전통 요리를 선보이려고 준비 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어서인지 더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어느새 작업장 한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상들을 받게 되었고 여러 자격증도 취득하게 되었다. 얼마 전 지인 분께서 작업장 근처 리조트를 계획 중이신데 가족형 리조트로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요리 체험장과 판매장을 리조트 내 식당 메뉴개발을 참여하는 조건으로 임대해 주시기
로 하셨다. 여러분들께서 참 많은 도움을 주셨다.

주변의 많은 분들께서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얘기한다. 한 가지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경력과 경험을 떠나 어떤 업종에서든지 밑바닥부터 꾸준하게 성실히 일을 하였던 부분이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라고 말한다.

성경에 ʻ배고픈 이에게 생선을 주지 말고 생선 잡는 법을 알려주라ʼ는 내용이 있다.
기초생활수급자로서 배고픔을 달래는데 급급하여 아이들을 키웠다면 꿈도 없고 미래도 꿈꿀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수급을 세습하지 않기 위해 예전의 나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일을 하였고 또한 희망키움통장으로 인하여 그 꿈이 발전될 수 있었다. 희망을 기대할 수 있었기에 힘든 과정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삶을 포기 하고 싶을 때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지인들에게 도움을 주셨기에 지금은 나 역시 지역사회에 재능기부를 통하여 보답을 드리려 열심히 공부하고 지역사회에 어려운 분들에게 무료로 컨설팅을 해 주고 있으며 지역 내 수급자와 장애인들에게 재능기부를 통하여 교육을 해 드리고 있다. 그리고 자립을 원하지만 여력이 되지 않는 분들에게 요리를 가르쳐 자립할 수 있도록 희망 키움통장을 소개해 주셨던 여수시민지역자활센터와 함께 대상자 를 찾고 있다.

어려울 때 선뜻 손을 잡아주시고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지자체 공무원분들과 매달 입금날짜 잊을까 꼼꼼하게 관리해 주셨고 어려울 때마다 나의 얘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주셨던 여수시민자활센터 희망키움통장 사례관리자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희망키움통장이란 이름처럼 어려움 속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지속적으로 주었으면 좋겠다. 희망키움통 장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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