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홍보

우물 안 개구리의 바깥세상 외출
  • 년도2016
  • 기관명해남지역자활센터
  • 제출자박춘자
  • 조회수2,620

*자활수기집 제13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박춘자 님'의 이야기 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바깥세상 외출 

산과 들이 푸르름으로 각자의 자태를 뽐내는 계절, 아카시아 꽃이 조용히 꽃내음을 풍기는 2006년 어느 날 내 인생의 새 출발이 시작 되었다. 읍사무소 담당 공무원의 권유로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찾은 해남자활후견기관(지금의 지역자활센터)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함께 목공소를 운영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봄이면 산과 들로 바다로 돌아다니며, 나물을 캐고, 낚시를 해서 동네 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세상 물정모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남편은 남의 어려운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이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돈을 빌려주고 보증도 여러 군데 서주었다. 나 역시 냉철하지
못한 성격 탓에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부부는 그게 추후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꿈에도 몰랐다.

그로부터 몇 해가 흘렀을까? 모든 게 멈춰 서버린 IMF 여파에 남편이 보증을 서준 지인이 밤봇짐을 싸는 일이 생겼다. 그로 인하여 남편은 금융권의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책감에 술로
괴로운 마음을 달래다 결국 갑작스레 쓰러져 병원신세 한 달 만에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 버렸다.
갚지 못한 많은 빚을 남긴 채...
슬픔도 잠시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절박한 형편이었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 어린 세 자녀를 어떻게든 반듯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활에 다니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참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처음 배치된 곳은 재활용사업단. 수거차량을 타고 수거를 나갈때마다 행여나 아는 사람이 볼까 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고 동료들의 거친 말이나 행동에 주눅 들기 일쑤였다. 다시 선택한 간병사업단. 일의 특성상 24시간 간병을 해야 하는데 한참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 걱정에 눈물짓기 일쑤였다.

그때 마침 실장님이 ʻ반찬사업단을 신설하는데 한번 맡아보면 어떨는지ʼ 물었고 ʻ생각해 보겠습니다.ʼ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ʻ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ʼ라고 답하고 있었다.
전업주부였던 내가 그나마 제일 자신 있고 좋아하는 일이어서 행운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해서였을까? 반찬 사업장으로 출근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신규사업단이라 처음 일주일은 나 혼자였다. 예전 중국집을 했던 곳을 사업장으로 인수한 터라 주방은 기름때로 엉망이었다. 우비를 입고 환풍구 청소를 하던 날은 마치고 나니 시간이 밤 10시였다. 그때부터 나는 퇴근 시간과 주말휴일이 따로 없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게 아니라 내 꿈을 찾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업단에서 처음 주어진 미션은 ʻ아름다운재단ʼ을 통해 지원받은 ʻ홀로사는 어르신들을 위한 국배달ʼ사업이었다. 실장님께서는 28가지의 국 메뉴 표를 내밀었다. 내가 아무리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그걸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너무하다 싶었지만 ʻ일단 해보자!ʼ는 마음으로 퇴근길 서점부터 들려 관련요리책을 여러 권 구입했다.
같은 메뉴라도 레시피 소개가 다르기에 육개장 하면 해당 페이지를 책마다 큰 방에 펴놓고 분석하고 자비로 재료를 구입해 집에서 실습하느라 자는 시간도 아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매주 2번씩 종류가 다른 국을 2백여 분의 어르신께 3년 동안 탈 없이 제공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미션은 일주일에 한 번씩 네 가지 찬으로 250여 어르신들께 드리는 노인 밑반찬을 만드는 일이었다. 또다시 마음속 주문을 외웠다. ʻ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도록!ʼ 매주 식단표를 짜고 예전에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들을 떠올리면서 천연 양념과 육수로 맛을 내고 매일 새벽 조리를 해서 배달 차량에 실려 보낼 때의 뿌듯함이란...

어느새 입소문이 돌아 하나둘씩 행사음식 주문이 들어오고 점심 때 주변 학원, 병의원, 사무실 등에 유료반찬 배달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밀려오는 주문에 동료들은 일이 힘들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하고 주말이나 야간에 근무를 자원하는 사람이 없어 혼자 밤을 새며 조리를 할 때도 많았다. 행사음식은 토, 일요일에 주로 주문이 들어오고 여행 갈 때 주문은 대부분 이른 아침에 찾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자활근무시간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녘에 혼자 있는게 무서워 창문까지 꼭꼭 걸어 잠가 놓고 만들어낸 음식은 점점 내 자존심이자 희망이 되어 갔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수익금도 쌓이고 지명도도 높아지자 이제는 독립을 해서 자활공동체창업을 하면 어떻겠냐는 실장님의 제안이 들어 왔다. 그동안 반찬가게 창업이라는 꿈을 위해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막상 혼자서 모든 걸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한 번에 밀려왔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지만 어떻게 회사를 운영할지, 함께할 동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수익을 내서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지……. 등등

그때 개인적으로 자활에서 받는 금액의 두세 배를 줄 테니 오라는 제안이 구체적으로 들어온 터라 고민과 갈등이 점점 커져 갔다. 그런데 동료들이 나와 함께라면 자활공동체에 참여하고 싶다며 나
를 붙잡고 서로 가고 싶어 했다. 더군다나 관장님과 실장님께서 어려운 시기에 나를 자활에 들어오게 함은 물론 자리를 잡는 데 도움을 주셨기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ʻ그래! 도전은 아름다운 것! 한번 해보는 거야ʼ 다짐을하며 ʻ공동체 파이팅!ˮ이라는 글자를 A4 용지 가득 쓰고 나서야 자활공동체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막상 결심 하고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구상도 해야 하고 머리가 복잡했지만 다행스럽게 초기에 어려운 과정들을 관장님 이하 자활센터 직원들의 도움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몇 달에 걸친 창업 준비과정을 거쳐 3명으로 창립멤버를 확정하고 지자체로부터 자활공동체 인정서를 받아 해남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150여 자활동료들의 축하 속에 2011년 8월 출범하였다.

유한회사 행복한 밥상.
어려운 이웃들의 행복한 밥상이 되어 드리고 지역주민들에게 영양만점 최고의 맛으로 행복한 식탁을 차려 드리자는 우리의 꿈은 창업 3년 동안 2호점 오픈, 직원 6명, 현금자산이 1억이 넘는 외형적 성장을 이뤄 냈다. 작년 전국자활기업대회에서는 전남에서 유일하게 전국자활협회장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얻었다.
이런 영광은 구성원들의 협력과 잘 자라준 아이들 덕분이다. 자활에 처음 발을 딛을 당시 초등학교 4학년 철부지 소녀였던 막내딸은 대학생이 되었다. 새벽에 출근하면서 혼자 일어나 밥을 챙겨먹으면서도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눈 오는 날 집을 나설 때는 엄마걱정에 눈물짓던 속 깊은 아이였다. 아들 결혼식 날은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새벽 음식을 만들었다. 그런 엄마를 이해해준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공동체 창업할 때 희망키움통장에도 가입하고 수급자에서도 벗어났다. 벌써 만기가 되어 집을 마련할 때 빌린 대출금도 상환할 수 있었다. 그간 남편이 남기고 간 빚도 정리하고 큰아들과
딸은 가정을 꾸리고 덕분에 손주가 둘인 할머니가 되었다.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ʻ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한다ʼ는 말이 떠오른다. 나 역시 지금은 공동체 창업으로 성공했다지
만 어려운 시기 자활에 들어와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내가 잘할 수 있는 반찬 만드는 일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 창업 후에도 자활사업단에 하는 노인, 장애인 밑반찬은 내가 재능기부로 여전히 조리를 도맡아 한다. 내년 행복한 밥상이 사회적기업 인증을 준비하는 것도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우리 구성원들의 따뜻한 마음의 결과물이다.

자활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나를 보면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다.
有志竟成(유지경성). 뜻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한다. 자활 5년, 자활기업 4년. 총 9년간 변함없이 새벽 4시에 알람이 울린다. 행복한 밥상을 창업해서 지금까지 쉬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지난해 어린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인해 중단한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있다. 저녁노을을 벗 삼아 왕복 2시간 거리의 학교를 목포로 다니면서 학업과 직장 일을 병행하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을 하였다. 졸업 후에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나이 56세. 젊지 않은 나이이지만 내 인생의 청춘은 지금부터이다. 이제 우물 안 개구리의 화려한 바깥세상 외출 제2탄을 쏘아 올리고 싶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