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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너 참 잘살았어!
  • 년도2016
  • 기관명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
  • 제출자박은주
  • 조회수2,298
*자활수기집 제13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금상 '박은주 님'의 이야기 입니다.

박은주! 너 참 잘살았어!

어느새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나는 사랑스런 아기가 있는 현장에서 기쁘게 일하고 있다.

늦둥이를 키우는 재미가 이런 것일까? 말을 하기 시작한 후 아이는 자꾸 알아들을 수는 없는 소리로 이야기한다. 주말을 지나고 만나게 되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 주말 동안 있었던 일들을
웅얼웅얼 진지한 얼굴로 들려준다. 얼마 전에는 아침에 나를 보자 웅얼웅얼 뭐라고 말하며 조금 빨갛게 보이는 다리 쪽을 가리켰다.
이를 본 아이의 친할머니는 주말에 아이 아빠가 실수로 아이 다리에 약간의 상처를 입혔는데 그 사건을 마치 일러바치듯 말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천사처럼 잘 웃고 옹알옹알 귀여운 수다쟁이인이 아이는 생후 3개월부터 돌이 지난 지금까지 엄마가 근무하는 낮 시간에 내가 돌보고 있는 아이이다. 지금 이 아이를 보면 가끔씩 그때가 생각이 난다. 내 생애 가장 힘들고 불행했던 시절... 그때 작은 딸아이가 내가 처음 이 아이를 만났을 때처럼 100일쯤 된 아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06년 남편과 이혼 후 친정이 있는 부천으로 이사를 왔을 때, 큰아이가 4살, 작은아이가 막 100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 수중에는 단돈 500만원과 남편의 사업실패로 인한 빚, 그리고 두 딸아이가 내게 남겨진 전부였다. 이혼하기까지 경제적 문제와 남편의 외도로 끊임없이 다투고 서로를 할퀴는 지난한 시간을 보내면서 이혼만 하면 아이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혼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시간을 보내고 친정집 근처에 보증금 500만원짜리 월셋집을 얻어 세 식구 몸을 누일 곳을 마련한 뒤에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갔다. 매달 월세는 내야했고, 아이에게 우유는 먹여야 했지만 갓난아이를 떼놓고 일을 나갈 수가 없던 까닭에 수입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빚 때문에 채권자들이 집까지 들이닥치는 일이 빈번했던 터라 새로 이사 온 집에서는 남의 눈에 띌까 두려워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고, 아이가 울면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 혹여 채권자가 들이닥치지 않을까 두려워 100일 된 아이의 입을 막기도 했다. 아이의 분유는 동생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살 수 있었으나 월세는 밀려서 보증금에서 깎이게 되었고 보증금이 바닥이 나자 그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되었다.
한 달 한 달 월세가 보증금을 갉아먹을 때 그때를 돌이켜보면, 심장이 멎는 듯한 초조함과 고통에 세상을 등지고 싶을 때마다 두 딸을 끌어안고 울었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그 보증금 500만원은 우리 세 모녀의 전 재산이었고, 외부 두려움으로부터 목 숨을 지켜주는 울타리였으며, 컴컴한 어둠 속에서 우리 세 모녀를 비추는 촛불과 같은 것이었기에, 마지막 남은 희망인 보증금 500만원을 월세로 까먹고 있는 현실에서 나의 미래도, 꿈도, 희망도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굴속에서 그 촛불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등질 생각까지도 했었는지 모른다.

1남 2녀 중 장녀인 나는 일곱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 혼자 3자녀를 돌봐야 하는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 맏이로서 엄마가 집에 안 계실 때는 동생들을 챙겼고, 집안일을 도왔었다. 어머니 혼자 생계와 자녀 양육을 책임지기는 너무도 버거운 시간들이었고, 나는 공부를 끝까지 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대학을 중퇴하고 동생들의 꿈은 지켜주고 싶어서 취직을 했다. 당시 대학생, 고등학생이었던 동생들 학비를 엄마와 함께 보탰었다. 그것이 언젠가는 되돌려 받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동생들은 내가 해 준 만큼 보다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보증금이 전부 바닥이 나서 절망의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동생들의 도움으로 월세방을 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 햇빛도 들어오지 않아 곰팡이가 덕지덕지 끼어있고, 건물 외부에 있는 공동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방에서 우리 세 모녀는 조심스레 다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이름은 약한 여자에게 초능력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 같다. 두 아이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엄마가 되기 위해 없는 힘을 끌어모아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2007년 여성인력개발센터를 통해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엄마에게 맡기기로 하고 큰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보육료를 신청하러 주민센터(동사무소)에 가서 상담을 했다. 거기서 동 사회복지 주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동사무소 복지도우미 일을 해보라고 제의를 해 주셔서 그때부터 동사무소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조건부수급자가 되어 동사무소에서 일해 받은 수입과 정부의 보조금으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맡기고 출근하고 저녁이면 아이들을 데리러가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경험하지 못한 이는 모를 것이다.

그렇게 5년여 동안 동사무소 복지도우미로 일하면서 동에서 일 잘한다고 인정을 받고 계약직 제의도 받았지만 복지도우미로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분명하였고 당장 취업을 하기에는 아이들을 방치해야하는 상황에 갈등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지금의 한계를 벗어나서 현재의 내 처지를 극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중 2013년 1월,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에서 자활근로에 참여하기 위한 상담을 받게 되었다.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에서 나를 처음 맞이해 준 실무자 선생님은 내가 자활사업에 참여를 하게 되면 내가 꿈꾸는 더 나은 미래설계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친절하게 안내하여 주었다.

자활센터 게이트웨이 과정에서 자립계획을 세워 자활근로 과정 이후 자활기업 창업까지의 단계를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셨다. 나는 자활센터가 나와 같은 사람의 자활을 돕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부천나눔자활센터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 아이들 학습지원 자활근로사업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꿈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으며 2013년 2월, 아이들 학습지원 및 돌봄을 하고 있는 사회서비스 자활근로사업 학습도우미사업에 참여를 하였다. 학습도우미사업에 참여를 하면서 담당 팀장님의 안내로 지난날 가정사정으로 포기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꿈도 꿀 수 있었다.

하루하루 공부하며 노력한 결과, 내 자활 의지를 인정받아 2013년 6월, 시장진입형 자활근로사업인 보육돌봄서비스사업단으로 이동을 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나를 누르고 있었던 빚 청산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에서 자활 근로사업에 참여하면서 딸들과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자활근로 급여를 받아 신용회복위원회에서 개인회생으로 조정해준 남은 빚을 꼬박꼬박 갚아나간 결과 드디어 올 2015년 2월에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다.

보육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다양한 가정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는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여자아이이다. 막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배정받은 이 아이는 아이누리보육사업단이 복지관으로부터 학습 및 가정생활 지도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아이였다.
사업단에서는 시장가로 보육돌봄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일정 부분은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돌봄서비스를 우리사업단도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처음 아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오후 2시경이었는데 아이의 엄마는 술에 취해 누워있었고, 토사물들이 집안 곳곳에 있어 역한 냄새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술병들과 몇 가지 집안 물건이 깨진 채로 나뒹굴고 있었는데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도 말을 잘 못 했고, 이리저리 막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대서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조용히 대화할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

나중에 복지관 사회복지사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후원금으로 다른 선생님을 몇 번 연계해보았지만 짧으면 하루, 길면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모두 포기했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는 3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알콜중독에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술에 취하면 아이에게 폭력도 행사하는 것 같았다. 이런 환경에 놓여있어서 그런지 아이는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것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사업단 팀장님과 가정환경 및 아이의 지도 방법 등에 대해 수시로 상의하면서 그 아이에게 돌봄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나면서 아이의 엄마도 아이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집에 갈 때마다 아이를 안아주고, 뽀뽀하고, 양치질을 하고 씻었는지를 점검하고, 인사하기, 규칙 지키기, 남을 배려하기 등 기본적인 사회성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여기저기 토사물이 있고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면 집 안 청소와 설거지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또 1년이 지났다. 그러자 처음에는 소리 지르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아이는 차츰 말도 잘하고 착석해서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해서 문도 잘 열어주지 않던 아이의 엄마는 나중에는 ʻ언니ʼ라고 부르며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밥먹고 가라며 밥상을 차려주기까지 할 정도로 변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가자 아이는 생리를 시작하였고, 엄마를 대신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아이에게 사춘기가 다가오는데 건강한 울타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가정상황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사업단 팀장님과 복지관 사회복지사와 상의를 했고, 어머니를 설득해서 아이를 청소년 쉼터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어머니가 결국 4학년이 되자 아이를 쉼터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쉼터로 아이가 가면서 나의 서비스도 자연스레 종료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아이에게서 카톡이 온다. 방학이 되면 집으로 오는 그 아이를 지난 겨울방학 때 오다가다 잠깐 만났는데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이제는 엄마가 많이 밉지 않다고 했다.
몸이 자란만큼 학대와 방치로 상처받은 마음도 점점 치유되고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여 다행이었다. 영아기의 아이를 돌보든, 돌봄이 필요한 초등학생 아이들을 돌보든 각각 힘든 일도 있고,
보람되고 기쁜 일도 있다. 그래도 힘듦보다는 보람과 기쁨이 더 크기에 힘이 들어도 이 일을 기쁘게 하고 있다.

나는 현재 아이누리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활근로사업단에서 기초를 다지고 다듬어진 실력으로 올 2015년 7월에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 4명과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중장년 여성들인 조합원들은 나처럼 이혼이나 사별로 인한 한부모 가정의 가장들로, 힘든 중에서도 자녀들을 잘 성장시킨 인생의 선배님들이다.
우리 모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었고, 사회의 도움을 받았으며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긴긴 터널을 지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의 도움 없이 홀로서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성공하겠다는 꿈만 커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각자의 경제적 능력으로는 사업체를 만들기가 어려웠기에 아이누리보육사업단이 자활근로과정에서 적립한
창업자금을 지원받아 자활기업을 설립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괴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또 시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쏟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시행착오들을 겪으면서 조합원들은 조금씩 성장하게 되었고, 자활기업 컨설팅을 받으면서 시장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목도 생기기 시작했다. 또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한계와 다섯 명이 힘을 모았을 때 발휘될 수 있는 시너지효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큰 힘으로 남았다.

얼마 전에는 경기도 따복공동체지원센터에 컨설팅을 신청한 것이 선정되어 피어컨설팅과 전문컨설팅을 모두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이 컨설팅을 통해 우리 조합원들의 역량이 강화되고 사업이 확장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립하는 것도 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아직은 모든 것이 미숙하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가지고 성실하게 한 발짝 씩 꿈을 향해 나아가고있다.
협동조합을 잘 운영해서 조합원들의 생계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사회에서 받았던 도움을 남을 위해 베풀 수 있기를 우리는 함께 꿈꾼다. 그리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그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두 딸아이가 환한 얼굴로 맞아준다.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이는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자신의 숙제와 공부를 알아서 하고, 4학년인 동생까지 챙긴다. 마치 내가 어릴 적 동생들을 챙겼던 것처럼... 작은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더 필요로 한다. 작년 내가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고 신경을 써주지 못할 때는 새로 전학을 간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사이버대학에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일 하고 살림하고 남은 시간을 쪼개서 공부도 해야 되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고 아이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떳떳하고 당당한 엄마가 되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지만 이로 인해 아이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공부를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들었다. 엄마를 필요로 하는 시기는 한번 지나면 돌아오지 않기에 학업을 미루기로 하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렸었는데 다행히 아이는 안정을 되찾았고, 이제는 반에서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학업성적도 우수하다. 고마운 것은 큰아이는 전학한 학교에서도 적응을 잘하고 학급에서 임원을 하며 반에서 1등을 도맡아 한다.

오늘도 나는 수다쟁이 아이를 만나러 출근한다. 아이의 밝은 웃음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행복감으로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는 건강하고 예쁘게 잘 크고 있는 두 딸아이가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직업도 있고, 2014년부터 입주해서 살고 있는 임대주택도 있다.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혹은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르나 나에게는 지난 시절 죽고 싶었던 절망의 상황을 잘 견뎌내고 눈물을 삼키고 살아서 얻게 된 너무나도 값지고 소중한 것들이기에 나는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 감사하게 살아가며 노력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때때로 나에게 다가오는 힘겨운 일들로 단단히 다잡은 마음이 느슨해져 약해질 때도 있고, 남들과 비교하며 내 현실에 지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절망하지는 않는다. 나를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무더운 더위를 잘 견뎌내면 시원한 가을바람을 만날 수가 있듯이 내 인생에도 이제는 한껏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 계절이 온 듯하다.

절망의 순간에 세상을 등지지 않고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 간 아이누리 자활근로 사업단에서 자활기업 아이누리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오기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지원군이며 앞으
로도 함께 해 주실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에 큰 감사를 드린다.

오늘 나는 나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힘들지만 잘 견뎌온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ʻ박은주! 너 참 잘 견뎌냈어! 잘살았어, 박은주!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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