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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당한 자활맨, 희망으로 다시 서다
  • 년도2016
  • 기관명인천동구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곽현용
  • 조회수5,030

*자활수기집 제13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대상 '곽현용 님'의 이야기 입니다.

나는 당당한 자활맨, 희망으로 다시 서다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로 떠나던 날 딸아이가 내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ʻ아빠, 나 키워줘서 고마워요. 내가 졸업하고 꼭 성공해서 아빠 차도 사주고 집도 사주고 해외여행도 보내줄게요.ˮ
아이 셋 딸린 이혼남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황무지 모래밭에 아름드리 열매가 맺었다. 이 열매들은 내가 모진 태풍 속에서 온몸으로 비를 막고 바람을 막아 이루어 낸 결실이다.

지난 2006년, 나는 경기도에서 제법 잘 나가던 운수업과 골재 납품 사업을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경기 악화와 운전기사들의 연이은
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정 거래처 부도로 그야말로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되고 거리로 내몰리기 직전까지 갔다. 이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던 애들 엄마와도 결국 이혼하고 세 아이를 데리고 홀로서기를 시작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 셋을 데리고 생전 알지도 못하는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 25만원 하는 방 두 칸에 허름한 다세대 주택이었다. 한 기업체의 사장으로 살던 내가 겪기에는 고통스런 현실이었다. 그해 겨울 내 마음은 더 꽁꽁 얼어붙었다. 화장실과 세면장이 얼어서 가스 불에 물을 데워 써야 했고, 밖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무섭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몇 번이든 다녀야 했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큰딸이 초등학교 4학년, 작은 딸이 7살 철부지, 막내아들이 겨우 두 돌을 넘긴 생태였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생활도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느껴졌다.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막내를 맡길 곳도 없고 아이들을 두고는 일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가지고 있던 현금이 모두 떨어져 라면 하나로 네 식구의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그마저도 양을 늘리려고 불려서 먹기도 하였다. 성장기인 아이들은 먹을 것을 더 찾게 되었고 나는 점점 힘에 부치게 되었다. 그런 힘든 상황이 여러 날 지속되면서 아이들을 시설에 맡기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일이 아닐까... 함께 굶어가며 같이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흘려보내기만 했다.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아이들을 시설에 맡기고 돈을 벌어 다시 찾겠다는 못난 생각으로 이른 아침 보육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막상 보육원 앞에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세 아이를 부둥켜안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차마 아이들을 그곳에 두고 나올 수 없었다. 결국 나는 ʻ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보자ʼ라는 생각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길가에서 만난 집주인 아주머니가 동사무소 사회복지 담당자를 찾아가면 도와줄 거라고 하는 말에 바로 동사무소로 향했다. 가면서 ʻ아무것도 생각 말자. 그 잘난 자존심이 뭔데, 내가 뭐 잘난 것이 있다고 내가 제일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더이상 고통은 주지 말자, 뭐라도 꼭 다시 해보자ʼ 다짐을 했다.

그렇게 찾아간 동사무소에서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너무나 밝게 웃어주시는 사회복지 주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순간에 집주인 아주머니를 만났고, 동사무소에 갈 생각을 했었는지 때마침 그때 사회복지 주사님이 계셨는지도 나에게는 참으로 행운의 날이었다.
사회복지 주사님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말씀드리니 처음으로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 생생하다. ʻ너무 힘드셨겠네요. 잘 오셨어요. 좀 더 빨리 오시지 그러셨어요. 이제라도 오셔서
다행이에요ˮ 이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나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주시더니 사회복지 주사님이 상담실 안쪽 작은 창고에서 쌀 한 포대를 꺼내 건네주시며 ʻ댁으로 빨리 가셔서 아이들과 점심을 해 드시고 계시면 반찬거리를 준비해서 집으로 찾아뵙겠습니다.ˮ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빨리 집으로 가 아이들을 배불리 먹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쌀 포대를 어깨에 들쳐 메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 순간은 너무 행복해서 힘든지도 모르고 뛰었던 것 같다.

집으로 뛰어간 나는 고슬고슬한 쌀밥을 해서 쉰 김치 하나에 네 식구가 배불리 먹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동사무소에서 상담해 주셨던 사회복지 주사님이 반찬거리를 한 아름 들고 대문 앞에 서 계신 것이 아닌가.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창피하기도 하였다. 사회복지 주사님은 들어 오시자마자 집안을 한번 둘러 봐도 되겠냐는 말씀을 하시곤 살림살이와 안방, 작은방, 화장실, 세면장 등을 차례로 둘러보시고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물어보셨다. 나는 막내아들이 너무 어려 혼자 두고 직장을 다닐 수 없는 상황이고, 큰 아이 급식비가 밀려 학교에서 독촉 전화가 오고 있으며, 어린이집의 원비가 없어서 둘째 아이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있고, 밀려있는 월세에 각종 공과금까지 연체되어 있어서 아무런 희망도 없던 모든 상황을 말씀드렸다. 귀담아들으시던 사회복지 주사님은 우선 하나하나 해결을 해나가자고 말씀하시며, 막내 아들과 둘째는 근처 국 ․공립 어린이집 종일반에 맡기고, 나의 직장을 알아봐 주시기로 하셨다. 근처 동구자활후견기관이라는 곳이 있으니 당분간은 그곳에서 일을 해보시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조건부 수급자로 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사회복지 주사님이 오늘까지 나를 격려해 주시고 신경 써주시는 ʻ서 귀숙 팀장님ʼ이시다. 새로운 내 인생을 열어주신 그 이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동사무소의 사회복지 주사님의 배려로 모든 것이 술술 해결되었다. 큰 아이는 동네 해와달 지역아동센터에, 둘째와 막내는 소리울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정원이 모두 차 있는 상태였지만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모두 도움을 주셨다. 공과금 등 나머지 것들은 구청 희망복지지원단에 긴급지원을 신청해 놓을 테니선정이 되면 통장으로 일정 금액이 입금될 거라고 그걸로 해결을 하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내일처럼 사회복지 주사님이 우리 가족을 위해 애써주시는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던지 왜 내가 빨리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다시 가질 수 있었다. 사업할 때는 세금을 내라 하면 나라를 원망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는 세금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을 직접 겪고 나니 무척 어리석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ʻ안녕하세요. 곽 현용 선생님 되시죠? 여기는 동구자활후견기관 입니다. 선생님이 동구자활후견기관에서 운영하는 자활사업에 위탁의뢰 되셔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나오셔서 자활사업 참여 관련해서 초기상담을 했으면 하는 데 언제가 편하신가요?ˮ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일 오후에 기관으로 찾아뵙겠다고 말을 하고 끊었다. 그렇게 2006년 6월 29일, 처음 찾아간 동구자활후견기관은 한낮에도 그늘지고 칙칙했으며 길가에서 좀 안으로 들어가는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상담실에서 불편할 정도의 말들까지 속속들이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내가 말하는 것 모두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좀 일이 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김 강래 팀장은 나와의 상담을 모두 마치고 관장님, 실장님, 팀장님들과 회의를 해서 배치 가능한 사업단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내일 다시 한 번 연락을 주겠다는 말과 함께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동구자활후견기관에서 하고 있는 사업단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윤 영환 팀장은 하시고 싶은 일들이 있느냐고 묻는다. 설명을 듣고 난 나는 남자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집수리사업단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집수리사업단은 송림동에 ʻ미래종합건설ˮ이란 간판을 걸고 집수리사업을 한다 했다. 간판 이름이 거창해서 기대를 잔뜩 했는데 막상 도착한 ʻ미래종합건설ˮ은 정말이지 실망스러웠다. 자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막연히 내 생각만으로 기대를 하고 가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집수리사업단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설명을 들었다. 사업단 둘러보기와 동료들과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반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은 정말 바빠서 일찍 서둘러야 한다며 곧바로 일을 하러 가자고 하셨다.
도착한 집은 어제 창호설치를 마무리하지 못한 송림2동에 홀몸노인 어르신의 단독주택이었다. 반장님이 창호 설치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보니 어릴 적 친구들과 썰매 만들고, 산속에 얼기 설기 나무로 나무집을 짖던 추억들이 생각났고 ʻ다음에는 나도 직접 한번 해봐야겠다.ʼ라고 마음먹었다. 당시 같은 사업단에 전문 인력으로 참여하셨던 이 진희 총무님과 집수리 요청가구들을 방문하며 어르신들을 응대하는 대화 기법 등도 자연스럽게 배우기도 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어르신들의 집수리를 해드리면 얼마나 고마워들 하시는지, 나 자신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부자가 된 듯했었다. 그동안 내 삶은 사업을 하면서 이익만 쫒아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느끼지 못했던 정말 훈훈하고 따뜻한 마음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나도 집수리에 관심이 생겼으며, 쉬는 날은 일당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도배견적 내는법, 장판시공법, 창호, 방수, 타일, 몰딩, 싱크대, 단열공사 시공법등을 닥치는 대로 검색하고 메모를 하며 나만의 집수리 스킬 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직접 시공해 보면서 다치기도 참 많이 다쳤었다. 타일 붙이는 연습을 하다가 새끼손가락에 타일이 떨어져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일을 했던 적도, 겨울철인 걸로 기억되는데 보일러를 감싸고 있는 철판에 손등이 찍혀 뼈가 보였던 적, 목공연습을 하다가 장비사용이 미숙해 허벅지에 목공용 타카 핀이 박히는 아찔한 순간들도 많았다.

정말이지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던 중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총무님이 며칠 휴가를 가셨는데 때마침 집수리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반장님과 내가 주택실태 현장조사를 나가게 되었는데 현장
을 둘러보고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자재를 산출하고 대략적인 견적서를 만들어 팀장님께 드리니, 팀장님은 어디서 배우신 적이 있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처음 해본 자재 산출과 견적작업에서 칭찬을 받고 나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때부터 팀장님의 격려로 건축전문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집수리 전문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외부 전문가들도 만나고 건축박람회도 서울, 경기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다. 건축현장마다 작업공정이 각기 다른데 현장을 자주 찾아다닌 덕분에 건축 전문가분들께 현장 노하우도 전수받고 인맥도 점점 넓혀가며 모든 일을 열심히 했다. 모든 일은 발품 팔아 배웠으며, 건축현장에서 주워 모은 자재들로 우리 집 도배부터 시작해 페인트, 장판, 창호 등 우리 집을 리모델링하는 작업도 하였다. 집이 제 모습을 찾아갈 때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지금도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한참을 서서 그때를 생각 하곤 한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힘들게 버텨내고 고사리손으로 나를 도와주던 아이들과의 소중한 추억들을 그리면서 말이다. 이후 이 진희 총무님이 육아 문제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윤 영환 팀장님으로부터 총무님 자리에 나를 채용하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아이들 때문에 사양을 하였지만, 사양을 하면 할수록 몇 번이고 팀장님들과 나를 설득하러 오셨고, 심지어는 실장님까지 찾아오셔서 나를 설득하기 시작하셨다. 며칠이 흘렀을까 고민 끝에 수락을 하였는데, 대신 조건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당시에 제안은 이러했다. ʻ아이들 때문에 늦게까지는 현장일
을 할 수 없으니, 6시면 정시퇴근을 해야 한다. 부득이하게 퇴근 후에는 아이들과 있어 줘야 한다고, 대신 일과시간에는 두, 세배로 열심히 하겠다.ˮ라는 것이다. 실장님은 흔쾌히 승낙하시며 나에게 이런 말은 던진다. ʻ오늘도 또 거절하셨으면 관장님도 나오시기로 하셨습니다.ˮ 이 말은 들은 나는 수락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2007년 2월 20일 나의 자활 실무자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때의 집수리사업단 전문 인력 직함은 주임이었다. 참 행복했다.
나락에 떨어져 허우적대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인정받고 직책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나의 행복한 꿈은 출근하는 그 순간 다 날아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동료였던 내가 전문 인력으로 그분들을 통솔하는 전문 인력이 된 것이다. 누가 봐도 하루아침에 동료가 직장상사로 왔으니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불만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하루걸러 나오는 불만 속에 결국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젊은 친구들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ʻ언제까지 수급자로 있을 거야? 친구들을 만나면 자활에서 일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나는 창피해서 말도 못하고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조차도 가지 못하는데, 우리가 함께 노력하면 몇 년 후에는 정말 당당하게 그 친구들 앞에 설 수 있어.ˮ라고 말이다.
싸우기도 하고, 회유도 해보고, 성깔도 부려보는 등 가진 노력 끝에 드디어 젊은 친구들이 서서히 나를 인정하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 후 하루가 다르게 그들에게도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나를
도와주는 식구들이 늘어나고 즐겁게 일을 하니 매출은 상승하고 사업단의 사기 또한 끝 모르고 올랐다. 지금까지 동구자활후견기관 집수리사업단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많은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식구들 모두 얼마나 좋아하고 기뻐했는지. 며칠에 걸쳐 관장님, 실장님, 팀장님들의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 아마 그때가 동구지역자활센터 집수리사업단 최고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이처럼 식구들이 열심히들 해서 인지 그 이듬해와 2012년에 각각 다른 직종의 2개의 집수리 공동체(자활기업)를 출범시킬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사회적 기업으로 탈바꿈했지만 현재까지도 튼실하게 잘 운영되고 있다.

기쁜 일도 잠시, 윤영환 팀장이 퇴직을 한다고 한다. 젊은 친구였지만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였는데 말이다. 그때부터 시작한 것 같다. 이제 나도 스스로 우뚝 서야겠다고 다짐을 한 게 말이다. 나도 할 수 있다고 한번 해보자고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하였다. ʻ서두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자ʼ라는 생각으로 2년제 사이버대학에 입학하고 낮에는 집수리사업단에서 현장 일을 배우고 익혔으며, 밤에는 인터넷으로 사회복지공부를 하였다.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했지만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기특하게도 우리 아이들도 나를 따라 자연스럽게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힘들게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 하고 나니, 좀 더 욕심이 생겼다. 4년제 대학에 편입하고 졸업까지 하였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봐도 나 자신이 참 대견스럽다.
요즘처럼 마음이 부자 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이 편안해지니 내 주위에 계신 분들도 그 영향이 있는 것인지 다들 기쁘고 반가운 소식들을 전해 오신다. 시시때때로 연락을 해 오시는 사회 복지 주사님은 구 본청으로 들어가신 이듬해 승진하셔서 지금은 주민복지과(노인팀) 팀장님으로 사회복지업무를 계속하고 계시고, 젊은 친구지만 나의 영원한 팀장님이신 윤 영환 팀장은 퇴사하시던 해에 대한성공회 신부님과 결혼하고 곧바로 해외로 나가 호주, 필리핀 등 여러 나라를 돌며 공부하고 들어와 지금은 서울에 있는 지역자활센터에서 일을 하신단다. 내 주위에 계신 분들이 다들 잘 되셔서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큰딸은 벌써 대학생이다. 본인이 하고 싶은 문화기획학과에 입학했으며 대부분의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해결하였고, 둘째 딸은 인천광역시 동구 ʻ꿈드림 장학회ˮ 이 흥수 동구청장님이 주시는 애향장학금을 며칠 전에 받았다. 우리 집 막내 녀석도 한 달 전쯤인가 송도중학교 동문회에서 주는 자랑스러운 송도인 장학금을 받아왔었다. 이처럼 아이들 또한 나의 어깨를 덜어주는데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른다. 내 텃밭의 열매가 맺어 나에게 희망과 꿈과 기대를 심어주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얼마 전 기쁜 일이 있었다. 묵묵히 한 곳에서 오래 근무를 해서 인지 실장 발령을 받은 것이다. 드디어 내가 지역자활센터에서도 인정을 받아가는구나 하는 기쁨도 잠시, 실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앞섰다. 하지만 나를 믿고 따라주는 든든한 우리 자활 식구들과 실무자, 한결같이 응원하는 우리 가족들이 있으니 한번 부딪쳐보고 싶어졌다. 나는 요즘 너무도 즐겁고 행복하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출근할 곳이 있으며 또한 새로운 도전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다. 몇 해 전부터 교제하기 시작했던 친구가 정식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자고 한다. 그 친구에게도 동반자로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사실 아이들 때문에 내심 마음은 있었으나 조심스러웠는데 말이다. 아마 조만간 좋은 소식을 자활식구들에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어렵게 생활하던 그 시절 주위 분들을 모두 초대해서 자랑도 하고 축하도 받아야겠다.

운명의 장난인지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들고 가슴 아픈 사연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힘들다고 포기하고 아프다고 주저앉는다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공은 우연이 아닌 선택의 문제이다. 주위에는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도움의 손길이 있다. 그 손길을 받아들이고 선택을 해서 열심히 하면 된다. 나는 함께 하는 가족이 큰 주춧돌이 되어줬고, 힘들 때 옆에서 격려와 지지를 해주셨던 나의 두 번째 가족 자활식구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처음 손을 잡아 주셨던 서 귀숙 팀장님과 작은 일에도 잘한다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영원한 나의 팀장 윤 영환 팀장님이 있었듯이 말이다. 두 분께는 정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당신들의 관심과 격려로 한 가정의 삶이 일어설 수 있었다고. 정말이지 나에게 살아갈 커다란 이유를 만들어준 우리 예쁜 아이들, 자활에 함께하는 모두들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한다. 이처럼 모든 기회에는 시련이 따르고 모든 시련 속에는 기회가 반드시 온다는 교훈을 얻었다.

오늘도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서 힘들어하는 그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당당한 자활맨이 되기 위해 인천광역시 동구지역자활센터 사무실에 제일 먼저 출근해서 출입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나처럼 자활에서 희망을 찾고 싶은 분들이 언제든 들어오실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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