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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삶에서 나누는 삶의 메신저 : 희망비타민
  • 년도2015
  • 기관명강릉지역자활센터
  • 제출자박미경
  • 조회수3,445

*자활수기집 제12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대상 '박미경 님'의 이야기 입니다.


받는 삶에서 나누는 삶의 메신저 - 희망비타민


절망의 그늘... 결혼과 사업의 실패


장애가 있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난간을 붙잡지 않으면 30분도 걸을 수 없어서, 걷는 시간보다
쉬어가야 하는 시간이 더 많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7년의 연애! 결혼이 결코 쉽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헤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린 불안함을 안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는 극에 달했고, 꽤 많은 시간동안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는 말처럼,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저희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처음 저희는 금세공을 하면서 만났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은 세공 공장을 해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소망대로 세공업을 시작했습니다.
직원도 몇 명 두고, 사업은 열심히 하는 만큼 좋은 성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호황이 계속되지 않았고, 급기야 제 이름으로 카드를 만들어 돌려막기를 해야 하는, 점점 힘든 나날이 계속되어 갔습니다.
그사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으며, 회사는 결국 도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연락도 없이 숨어버렸습니다.
이윽고 단란했던 우리 세 식구의 보금자리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제 앞으로는 억 소리 나는 빚만 남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로 인해 이집 저집 몇 개월씩 옮겨 다녀야 했으며, 압류를 우려해 주민번호를 알려줄 수 없어 일자리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고, 한곳에서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 후로도 어린 딸을 데리고 가사도우미와 병원간호, 식당일 등을 전전하며,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지속하였고 그렇게  3년이나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 3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그 당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제 이름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던 점과, 제대로 된 곳에 취업할 수 없는 신용문제였습니다.


우연히, TV에서 파산신청에 대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가져보자 다짐도 해 보고, 정말 빚만 없으면, 아니 하루에도 빚 갚으라는 수십 통의 우편물만 오지 않아도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어렵게 수소문해 남편에게 사정했습니다.
“아이는 어떻게든 키울 테니 파산 신청하는 것만 도와달라고...”
결국 서류준비해서 파산신청을 하고 그렇게 9개월 후 저는 드디어 빚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 현실의 삶은 녹녹치 않았습니다.
그 당시 지방에 있는 동생 집에 얹혀 2년 정도 지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제부 눈치가 보여 더 이상 얹혀살기에는 미안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세공 일을 다시 하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지인 분께 반지하방이라도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이사를 했습니다.
세간과 보일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방에서, 아이와 그렇게 겨울을 지냈습니다.
4년 동안 수차례 이사 다녔고 아이는 4학년이 되었습니다.
형편을 알아서 일까요? 감사하게도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고 공부도 제법 잘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우울증과 당뇨합병증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이런 생활이 지겨웠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하루하루가, 아무의미도 희망도 미래도 없었습니다.
나의 무능함이 싫었고 나이답지 않게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는 아이가
대견하기는커녕 밉기까지 했습니다.
죽고 싶어서 울고, 아이가 불쌍해서 울었으며, 한심한 자신이 싫어 몇날 몇일을 일도 안하고 어린이집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연락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암흑 같은 절망의 날들을 지냈습니다.


희망의 빛...강릉 자활과의 만남


‘절망의 끝에는 희망이 기다린다’고 했던지, 강릉에 사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모자원에 빈집이 있는데 조건이 맞으면 와서 살지 않겠느냐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하루 빨리 서울을 떠나고 싶었기에 “무조건 가겠노라” 말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한부모가정 신청절차를 밟아나갔습니다.
모자원 입소까지 1달을 기다렸는데 그 시간이 정말 1년 같았습니다.
한달 동안 흘린 눈물과 기도는 강과 바다를 이룰 만큼 쌓여갔습니다.
이윽고, 이사날짜가 정해지고 아이와 저는 새 희망으로 힘이 났습니다.
그렇게 다시 강릉에 오고 나니 마음도 몸도 새로이 태어난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초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그곳이 바로 ‘강릉지역자활센터’였습니다.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제 삶에 드디어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좋은 만남, 복된 만남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있듯이 자활센터의 사업팀장, 실장, 센터장님과의 만남이 바로 제 인생의 복된 만남 이었습니다.


먼저, 상담을 받고 이력을 이야기하자 전문가 분들이 내게 맞는 일자리를 권유해 주었습니다.
세공을 오래 했었다고 하니 ‘한지공예’라는 것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추천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업단을 방문하고 다음날부터 바로 출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곳을 나오면서 걱정과 염려보다는, 어디서 생긴 자신감이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든든히 자리 잡혀가고 있음에 감사 또 감사했습니다.


한지공예를 배우면서 한지식구들과 융화 되어가면서 삶에 찌들어 굳어있던 내가 조금씩 웃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니, 동생들과 친해지고 그동안 맘에 담아뒀던 얘기들을 하나씩 꺼내게 되었고, 들어주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상처받은 마음과 영혼이 위로받고 치료받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습니다!


내 적성에 맞는 한지공예를 배우는 일이며,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상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주5일 근무가 끝나고, 아이와 함께 주말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평범한 일상이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한지사업단에서 일을 하면서 사연 많은 자활식구들을 만나, 서로 울고 웃어주는 그야말로 한 자매 같은 인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받는 삶에서 나누는 삶으로... 자격증과 강사자격 취득


자활에 들어와서 부족한 능력이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공예의 꽃인 한지자격증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무언가 꾸준히 집중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으니,
무미하고 완성도 없이 소외되었던 내 삶이 다시 하나의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나아가, 그 작품들을 선물하거나 제작방법을 다른 이에게 가르쳐 주게되니 이것이 내 삶의 활력소가 되어 주었습니다.


또 하나의 놀라운 변화는 ‘한지인형 강사’와 ‘색지공예 사범’과정 및 ‘아이클리어 강사’과정을 수료하고 더 많은 영역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강사 활동을 하고 안정된 수익과 전문가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용기를 내서 운전면허증도 취득해서 직접 차량을 이용해서 강사활동의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자활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얻게 된 것도 감사한데 이제는 봉사하며,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 아니 ‘대표님’ 소리까지 듣게 되는 기적 같은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외 ‘한국문화예술진흥회’와 ‘강릉서화대전 특선(2작)’ 등의 입상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고, 때론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얼굴을 꼬집어보곤 합니다.


2014년 7월 드디어 자활기업 출범을~


올 여름 드디어 자활기업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떠올려지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함께해 준 사람들, 우리 아이, 그 외 가족들, 자활센터 가족들이 격려가 되어주고, 울타리 되어 주었던 많은 감사로 인해 더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성분이 다른 사랑과 감사를 고백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초등학생들의 체험학습과 노인대학, 방과후 수업, 장애활동분야 등, 몸이 몇 개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프로그램 주문들이 줄을 서지만 찌푸린 내 얼굴을 본지 가물가물 합니다.
행복해야 웃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웃어야 행복해진다는 그 의미를 이젠 알 것 같습니다.
웃어 보려고 해도 웃어지지 않았던 내 얼굴, 이젠 미소 띤 내 얼굴을 보며 행복해 하는 또 다른 누군가를 보며 신이 인간에게 주신 두 개의 손,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한 손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손이라면, 다른 한 손은 세상과 나누는 손으로 기업을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 제 자신은 물론 남도 같이 클 수 있는 기업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갔다가, 자존심과 상처 많은 제가 자활 문을 두드리고 스스로 일어선 과정은, 앞으로의 자활기업을 운영함에 있어서 난관과 극복이라는 점과 많이 닮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사업이 정체되거나 어려움에 부딪혀 현상을 유지하는데 꽤 긴 시간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과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희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나아간다면,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 작은 시작을 마중물 삼아 가슴 벅찬 행복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움츠린 누구에게나 작게나마 희망을 줄 수 있는 선구자로서, 작은 자리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흔들릴 때마다 안아주고, 가족처럼 보듬어주신 강릉자활센터 가족 여러분!
자활기업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께 응원과 격려의 희망을 받았으니 이젠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나누어 주는 메신저 ‘희망비타민’이 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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