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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이 이끌어준 새로운 희망
  • 년도2015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문장미
  • 조회수2,142

 

*자활수기집 제11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문장미 님'의 이야기 입니다.

자활이 이끌어준 새로운 희망


힘들었지만 보람찬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멍하니 노을이지는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4년 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평범한 가정집들 보단 조금 힘들었지만 늘 행복한 웃음소리가 나던 우리 집.. 투석환자인 아버지와 나 그리고 여동생 우리 세 식구는 힘들어도 늘 웃으며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다.
아버지는 많이 아픈 몸이었지만 어린 나와 여동생을 위해 항상 이것저것 챙겨주고 여러 가지를 해주시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특히 아버지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TV에 나오는 유명한 요리사들처럼 정말 맛있고 색다른 요리들을 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가족은 행복한 하루 하루를 지내던 중 2009년 2월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꼭 참석해서 보신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나의 졸업을 축하해 주기 위해 그 누구보다 멋있게 입고 오신 아버지, 여동생, 고모. 추운 날씨였지만 졸업식이 끝나고 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날이었다.
이제 졸업도 하였고 성인이 되었으니 얼른 취업을 해서 아버지께 효도할 생각으로 여러가지 일자리를 알아보고 생각하던 중, 아버지는 많이 추웠던 나의 졸업식장을 참석했던 영향인지 감기에 걸리게 되셨다.

아버지는 단순한 감기라며 괜찮다고, 병원 가서 진찰받고 약 먹으면 된다고 말씀하셔서 나와 여동생은 안심 했었다. 하지만 어떤 병이든 쉽게 잘 걸리는 투석환자이셨던 아버지는 단순한 감기에서 심한 폐렴으로 바뀌셨다. 큰 고모네 계시던 할머니도 걱정이 되셔서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지내게 되었고, 아버지가 얼른 나으시기를 기도하고 바랬지만 하늘도 무심한지 아버지는 더욱 악화 되셨고, 결국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처음 일반병실에 계셨던 아버지는 점점 더 악화되면서 의식까지 잃으시고, 중환자실로 내려가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매일 병원에 와서 하루에 두 번 면회를 하고, 밤을 새기도 하면서 힘들게 하루 하루를 보내던 중 의사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우리 가족은 그 이후 더 슬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매일 똑같이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에게 가서 그날 있었던 이야기도 하고, 보고싶고 사랑한다고 매일매일 말을 하였는데, 아버지는 우리들의 말을 들으셨던건지 다시 일어나셨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너무나 기뻐하는 나와 여동생을 생각하며, 아버지는 힘들지만 꾸준히 조금씩 조금씩 걷게 되면서 운동도 하셨다.
우리가족은 다시 밝게 웃게 되었고, 아버지께서 얼른 건강해 지시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하루 하루를 다시 즐겁고 행복하게 보냈다. 아버지는 아직 다 완치되신 게 아니었지만 병원에만 있기 싫다고 우리 집에 가기를 바라셨고, 의사 선생님도 조금 나아지셨으니 집에서 쉬는 것도 괜찮다고 해서 퇴원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에 오셨을 땐 어린아이처럼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하지만 너무 일찍 퇴원하신 걸까.. 아버지는 집에 온지 딱 일주일 된 날 낮까진 집에서 행복하게 웃으시며 평범하게 지내시다가 그날 저녁부터 기운이 점점 없어지면서 다음날 새벽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여동생은 하루종일 울었고, 난 현실감이 없었던 건지, 충격을 많이 받았던 건지 눈물조차 잘 안 나왔다. 아버지한테 효도도 많이 못하였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프셨지만 듬직하셨던 아버지에게만 의지했던 나였는데.. 그런 아버지가 안계시니 너무 많이 힘들었다. 그렇게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내던 중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여동생을 보니 내가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보다 어린 여동생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이젠 내가 가장이니까, 내가 여동생을 챙겨줘야 하니깐 힘을 내기로 했다.

우선 직업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께서 항상 내게 말씀하시고 바라셨던 미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미용학원에 매일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실습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나서 미용실에 바로 취업을 하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 자주 다쳤던 발목에 점점 무리가 가게 되었다. 미용사 일을 하면서 밥을 빨리 먹고 바로바로 교대해야 해서 자주 체하였고, 매일매일 손님이 많이 있는 날이던, 별로 없던 날이던 나는 하루 종일 힐을 신고 창고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할 게 없으면 계속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도 힘들고 아프지만 꾹 참고 있었기에, 나만 아픈 것도 아니고 내가 열심히 일하면서 번 돈으로 동생을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꾹 참고, 매일 일 끝나고 집에 와서 아픈 발목을 찜질하면서 힘을 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 있기가 너무 힘들었고, 걸을 때마다 발목이 더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난 하루 일을 쉬고 병원에 가야 했고, 병원에서도 다친 발목이 나으려면 물리치료를 자주 받아야 하고, 하루 종일 서있거나 많이 걷는 일은 발목에 더 많이 무리가 가기 때문에 웬만하면 피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고 해보자 하고 생각하며 일을 하다 나는 결국 점점 더 아파지는 것을 참지 못하게 되어 미용실을 관두게 되었다. 난 왜 이리 몸이 안 따라 주는지, 왜 이리 운조차 없는지 내가 처한 상황과 내 자신이 너무 싫고 한심했다.

그렇게 절망하면서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시험기간인지 열심히 밤을 새가면서 공부하는 여동생을 보게 되었고, 대학을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여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다시 미래에 대해 생각을 했고, 다른 직업 특히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가지 않는 사무직 쪽의 일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나라에서 주는 생계비가 있어서 그나마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여동생의 학년이 올라가고, 졸업하는 날이 다가오고, 나 또한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취업이 안돼서 힘들어 하는 나를 보신 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 주사님이 “자활사업”에 참여해서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떤지 물어보셨는데 처음엔 자활이 뭔지도 몰랐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바로 하고 싶다고 말을 하고 그날 저녁에 난 바로 이력서도 준비하였다. 이번엔 꼭 잘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2010년 4월 19일 남동구청 주민복지과 자활고용팀에 첫 출근을 하였다.

솔직히 좀.. 많이 어색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고, 처음 보는 분들이 많이 있고 소심했던 나는 많이 떨렸었다. 처음엔 그저 주사님들이 주시는 쉬운 일들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정보에 관한 서류를 확인하고, 정리하고, 급여지급 관련 일도 하게 되면서 더욱 신중하게 집중해서 일을 하게 되었고, 조금씩 어려운 것들을 배워가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팀장님과 주사님들하고 조금씩 친해지면서 모두 나를 많이 챙겨주시고, 친절하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새로운 사회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셨다.
1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면서 팀장님도, 담당 주사님도, 주민생활복지과에서 희망복지지원과로 바뀌어 가면서 새로운 분들을 뵙고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갔다.

남동구청 자활지원팀에서 일한지 3년이 되던 날 나는 이제 많은 것을 알려주고 가르쳐준 이곳을 떠나야 할 시기가 다가옴을 알게 되며, 취업준비를 하던 중 나의 담당 주사님이 게시판에 있던 공문 중에서 총무과에서 계약직 공무원을 뽑는다는 내용을 보고선 나에게 알려주셨다.
처음엔 계약직 공무원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여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팀장님과 자활팀 주사님들이 면접을 보라고 적극 추천을 하셨다. 이런 기회는 많이 없고, 일단 면접을 보고 경험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셨다.
그래서 나는 면접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기로 생각했다. 이력서도 몇일을 생각하며, 쓰고 다시쓰기를 반복하였고, 자기소개서도 준비하고, 신체검사도 하고, 면접에서 물어보는 예상 질문을 찾아 어떻게 대답할지도 고민하고, 많은 것을 준비하면서 솔직히 좀 힘들었지만 내 옆에서 나를 응원해주고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이 있으셔서 나는 힘을 얻었고, 다행히 많이 떨지 않고 면접을 볼 수 있었다.
2013년 5월 24일 오후 6시 20분에 총무과 인사팀에서 합격했다는 문자를 받아 많은 축하를 받았고, 6월 3일 총무과에서 발령장을 받아 계약직 공무원이 되어 간석1동 주민센터 통합민원 담당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현재 통합민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 나가고 공부하고 있으며, 2013년 8월 29일 구월로 하나은행 점에서 3년간 적립한 희망키움통장 적립금을 타게 되었다.
희망키움통장 또한 정확하게 모르고 3년간 꼬박꼬박 10만원씩 적립을 하면 나중에 천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시작을 하였는데.. 막상 받고 나니 천만원이 넘었고, 생각했던 금액보다 많은 금액으로 예전에 전세자금대출 받았던 대출금을 갚을 수 있게 되었고, 어렸을 때 헤어졌던 어머니와도 다시 만나게 되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년간 자활을 하면서 많은 일을 배웠던 복지일도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현재 내가 담당하게 된 민원 업무도 많이 힘들고 어렵다. 둘 중 하나도 쉬운 것은 없고 어렵지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분들을 보면 그 분들에게도 많은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특히 수급자 분들 중 취업을 하고 싶은데 취업이 안되는 분들에게 자활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다.
처음 21살 아무것도 모르고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자활사업.. 자활은 3년간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며 많은 것을 알려주고 희망을 주었으며, 지금은 새로운 꿈과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고 있다.

지금 나는 노을이 되어 사라지는 태양을 보고 있지만,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뜨니까 나 또한 힘든 생각은 노을이 되어 사라지는 태양을 보며 지우고, 내일은 즐겁고 새로운 생각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가면서 나와 내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항상 내 마음속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나를 새로운 꿈과 삶으로 이끌어준 자활에 감사하며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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