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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먼 남쪽에서 온 이방인이다
  • 년도2015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이경희
  • 조회수2,166
*자활수기집 제11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이경희 님'의 이야기 입니다.

난 먼 남쪽에서 온 이방인이다



난 먼 남쪽에서 시집온 이방인이다.
난 항구도시 전남 목포에서 칠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당시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터라 달갑지 않는 탄생으로 어른들로부터 엄마는 많은 구박을 견뎌야 하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부모님들로 부터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지금도 칠남매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고 엄마는 지금도 전화 통화 때마다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꼭 표현을 하신다. 정말 사랑스러운 분들이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삼성에 입사를 했다. 그 후 친구의 소개로 애들 아빠인 남편을 펜팔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애들 아빠는 간염이 심해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인데, 이것이 나를 경상도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 계기가 되었다. 당시 결혼에 대한 많은 갈등이 있었지 결국... 지금 생각해 보면 모성애가 발동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생활력이 없었다. 또한 술, 도박, 당구, 여자, 낚시, 그 사람(남편)은 끊임없이 미쳐가고 있었고 난 애들과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시댁이 있는 영덕으로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고, 삶의 터전을 옮긴 시댁은 노할머니, 노할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 둘, 시동생까지 4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대가족 이였다. 앞이 깜깜했다.

생활이 넉넉지 않았던 시집살이는 정말 힘이 들었다는 표현으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힘든 생활을 어떻게든 이겨 보겠다고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도로공사 하시는 분들께 새벽밥과 저녁밥, 청소 빨래를 해주고 집으로 돌아와선 어른들 아침밥을 해서 차려 드리고,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다시 낮에는 파출부, 화장품 외판원 일까지 해야만 겨우 생활이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얼굴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고, 아이들은 이리저리 뒹굴며 엉망인 채로 잠들어 있기가 다반사 였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은 이런 나를 도와주기는 커녕 밤늦게 돌아오면 싱크대에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들어 오는걸 보면 살짝 문을 열고 ‘치워놓고 자라’하신다.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밤새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해 조금씩 모은 돈으로 야식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남편은 한전에 취직이 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가 올 때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은 음주에 중앙선 침범으로 세 사람을 병원에 눕게 만들었고 몇 천만원이나 되는 합의금을 준비해야 되는 상황이 생겨 또다시 생활에 큰 고비가 찾아 왔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는 듯 주위의 도움으로 큰 고비를 넘기고, 생선 구이집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업초기부터 나의 의도와 상관없는 상황과 남편의 무관심 등으로 결국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남편과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

힘든 생활 속에 나는 지쳐갔고 버티기 위해 나를 내려놓고 비우고 버리고 그렇게 연명하고 있던 도중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지역자활센터에서 일을 해보는 게 제의를 받게 되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지역자활센터란 곳이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두려웠다. 내 짐이 가장 무겁고 내 앞에 놓인 세상이 가장 힘들고 어렵던 상황에 주민생활지원과에서 한부모 가정 신청을 권하고 아이들의 양육 관계로 기초수급권자를 만들어주어 어렵지만 어느 정도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주말에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중에는 지역자활센터에서 가정봉사원사업단에 소속이 되어 저소득층 대상의 무료가사지원 서비스 일을 하게 되었고, 사업단 일을 보조하는 전담 관리자로 발탁이 되어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며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복지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물론 취업을 위한 수단으로도 좋을것 같았다. ‘내가 받았던 수많은 혜택들을 나 같은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 줄 수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이런 나를 보고 지역자활센터에서는 사회복지를 공부해 보는 게 어떠냐고 조언을 해 주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어렵겠지만 난 할 수 있다. 엄마니깐! 아이들에게 희망을 꿈꾸게 하고 싶었고 엄마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렵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복지 연계를 안겨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야간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부딪히는 대로 끈기와 오기로 드디어 졸업과 함께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가슴 벅찼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을 가게 되었고, 특별한 자격증도 없었던 내게 사회복지사는 물론 새로운 자격증들이 생겼고 따라서 자신감도 생겼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열심히 생활을 하다 보니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순수 자활 참여자에서 참여자를 관리하는 전담관리자로, 다시 전담관리자에서 당당히 사회복지사로서 일을 할 수 있는 자활 사례관리자로 지역자활센터에 취업이 되어 이제는 월 급여가 일반 회사원 보다는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소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드디어 전문직으로 인정받고 당당히 근무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 하루가 기쁘고 감사한 것 뿐이었다. 초기 상담에서 종결까지의 좌충우돌 과정에서 내담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아픔과 기쁨을 함께 누리며 생활하게 되었고 누군가의 응원이 누군가의 격려가 막막한 현실을 극복하고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는 엄마의 뜻에 보답이라도 하듯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바르게 잘 자라주었고 두 아들은 원하는 대학교도 가게 되었다. 큰 아이에 이어 둘째가 군 입대를 앞두고 탈수급 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도움의 손길이 왔다. 센터 및 주민생활지원과에서 희망키움통장에 가입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가입한 희망키움통장은 내일을 준비하는 나에게 또 다른 기쁨과 설레임이 되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마음 한편에 묻어 두었던 내 집 마련의 희망을 다시 꿈꾸게 되다니, 한 번도 맘 편히 누울 곳이 없었는데 매월 불어나는 희망키움통장을 들여다보면 이제는 연신 싱글벙글 웃음이 머금어 진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하다!!!

현재는 전문인으로서 당당히 내 자리를 확고히 다지고 있으며 내일을 생각하면 고민보다 행복한 미소가 먼저 떠오르는 자신감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 내 생활의 변화와 발달에 영향을 미친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내 소중한 아이들 그리고 주민생활지원과 관계자 분들, 지역자활센터 센터장님을 비롯한 모든 실무자님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나도 누군가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꽃으로 살고 싶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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