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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행복
  • 년도2014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이재연
  • 조회수2,804
*자활수기집 제11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이재연 님'의 이야기 입니다.

다시 찾은 행복




빚보증 때문에 찾아온 시련

1999년 IMF 한파가 우리나라 경제를 위기로 절망으로 몰고 갔던 위기의 순간, 우리는 동거 중 이었지만 나름 신혼 초였기에 남부럽지 않는 행복을 맛보며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뒤 소일거리로 시작했던 고급 현관문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사회경력이 조금 쌓여 서툰 직장생활을 하였고 아내 또한 직장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평탄한 신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형님들도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작은 사업체 운영을 하며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셨고, 그렇게 저희 삼형제는 우애가 남달랐습니다. 당시 형님들의 사업에 필요한 보증은 형제들의 우애를 돈독히 여긴 아내가 보란 듯이 자청하였고, 훗날 이것이 우리 가족의 행복을 빼앗는 시발점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2003년 4월 어느 날, 형님들의 사업이 연쇄 부도를 맞으면서 첫째 형은 가족을 남겨둔 채 잠적 하였으며, 둘째 형은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병원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보증을 섰던 제 아내는 빚을 갚으라는 독촉과 협박, 폭언 등 온갖 욕설을 받아야만 했고, 결국 정신과 처방을 받으면서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택시업으로 생계유지
하늘과 땅, 밤과 낮, 어디를 찾아보더라도 아무도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줄 리는 없을 것 같아 자살도 몇 번을 꿈꾼 적이 있을 정도로 쓰라린 시간들을 겪었고, 한계에 다다른 탓인지 아내와 나는 대인기피증이 생겨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며 칩거하는 시간을 2년 가까이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고민 끝에 생계를 위한 영업용 택시를 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마스크를 낀 채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지켜보고 들어주면서 차츰 자연스럽게 적응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부모, 처자식, 조카 등 여덟 명의 가장역할
택시를 운행하는 동안 처, 자식 등 가족은 물론 부모, 조카 등 8명의 가장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오면서 생활은 더욱 힘들어져만 갔습니다. 형님의 사업부도 이후 형수님께서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기 때문에 조카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들이 눈 앞에 일어 났었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조카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보호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실 택시운전으로 모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엔 역부족 이었습니다. 생활비, 의료비, 월세, 세금 등 수입에 비하여 지출요인은 점점 늘어만 갔으며 아이들 학원은 꿈도 꾸지 못하였습니다. 또 당시 중풍으로 병원생활을 오래 해야만 했던 어머님께서 치료도중 결국 의료비 부채만 크게 남긴 채 돌아 가시는 아픔도 겪어야 했습니다.

기초수급자 정부지원 대상
어쩌면 당연하고도 남을 정도로 일찌감치 기초생활 수급자를 신청하여 정부지원을 받아야만 했던 생활환경 이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뒤늦게 신청하게 되었고, 늦게 신청한 것에 대해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택시업은 그만 두고 스스로 일어 설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팔방으로 광고를 접하고 상담을 다녔습니다. 그 결과 과거 어깨 너머로 배운 고급 현관문 제작 기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술과 연관이 있는 알루미늄을 활용한 창호제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일용직에 몸담으며 일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정부지원 대상자로 지원을 받고는 있었으나 언젠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써 어려웠던 이 과정을 멋지게 극복할 수 있었다.’며 현재까지의 나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저소득층에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고자 몇 번이고 다짐을 반복하였습니다.

희망을 샘솟게 하는 키움통장
집안의 우환으로 인해 병원치료를 병행했던 아내의 건강이 호전되면서 조금씩 맞벌이도 할 수 있었고, 2010년 3월 희망을 샘솟게 한다는 ‘희망키움통장’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창호제작 일을 열심히 하면서 우리 부부는 아픈 것, 먹을 것, 입을 것 등 생활에 필요한 지출부분을 아끼고 저축하며 훗날 희망키움통장의 목돈과 함께 사용할 사업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형님의 보증금은 재정능력 부족으로 파산신고를 할 수 밖에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6천 만원이 넘는 부채는 개인회생 신청 후 5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모두 변제할 수 있었습니다. 창호제작 일을 5년 동안 열심히 배운 결과 자신감은 물론 사업의 큰 밑그림을 그릴수도 있었습니다.
더불어 인맥을 구성하기 위하여 일용직에서, 그리고 창호 제작 일을 통하여 만난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꼼꼼히 메모하여 안부도 묻고 상담 전화도 자주 하여 나름대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였습니다.

재연창호 희망차게 문을 열다
이렇게 3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그동안 돌봐줬던 조카가 D중공업에 취업하면서 경제적인 부담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으며 1년 동안 열심히 모았다며 3천만원을 가지고와서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동안 키워주신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삼촌 필요하신데 사용하십시오.” 라며 건네주었을 때 돌아가신 어머님, 형수님 그리고 그동안 받았던 서러움 등 힘들었던 장면들이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2013년 5월, 희망키움통장 만기금액인 2,700만원의 거금을 선물 받았고 조카의 지원금을 보태어 “재연창호”라는 간판으로 집사람과 아이들, 그동안 힘을 실어주신 지인들과 일용현장에서 만났던 50여명의 축하객이 모인 자리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현판식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업 시작과 동시에 여러 곳에서 제작, 배달, 시공 주문은 물밀 듯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찾은 행복
처음에는 희망키움통장 만기금액이 많아야 1천만원쯤 되겠지 라는 생각에 창업을 시작하게 되면 대출을 받아야 할 생각에 고민이 많았지만, 집사람과 열심히 벌고 모은 금액이 늘어남에 따라 장려금이 점점 늘어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에 힘들어도 중도에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섭니다. 제작주문을 받으며 가족들의 식사를 챙기면서 뒷바라지 하는 아내에게 늘 고생만 시켜 미안했지만, 성실하게 일한 탓인지 사업이후 조금씩 입소문이 퍼지면서 일상들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아 무한한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아내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정말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되었고, 저녁이면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행복한 마음을 싣고 퇴근하여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합니다.
얼마 전에는 친한 동생의 도움으로 인터넷 홍보를 위한 블로그를 만들게 되었고, 홍보에도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희망키움통장으로 인해 우리가족은 이렇게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는 생각으로 지금처럼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할 것이며, 작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사회환원 사업도 조금씩 할 예정입니다.
과거 힘들었던 어려움이 있었기에 오늘날 찾아온 행복을 더욱 즐겁게 맛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제게 찾아온 엄청난 행운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창업을 통하여 건강한 가정이 더 늘어나고 행복한 가정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창호제작에 노력할 것이며, 이런 저의 이야기가 어려운 환경에 계신 다른 분들께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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