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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될 수 있다면
  • 년도2014
  • 기관명음성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고경석
  • 조회수2,591
*자활수기집 제11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특별상 '고경석 님'의 이야기 입니다.

웃음이 될 수 있다면


오늘도 비가 내린다.
조그마한 사무실 창문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지난 세월 순탄치 않았던 과거가 떠오른다.
눈을 지그시 감아보니 옛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20년전 나는 중국에서 직원 및 중국사원을 두고 한국 전자제품을 생산하여 수출과 동시에 중국시장에 시판을 하던 중소기업의 CEO였다. 주요부품자재는 한국에서 공수하고 나머지는 중국에서 사출 가공생산해서 다시 한국으로 수출하고 생산 판매하며, 대기업 등에 납품도 하며, 한참 잘나갔다. 그러던 차에 한국경제의 불황과 IMF가 겹치면서 회사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회사사정이 좋지않게 되어 점점 부채가 늘어가고 있던 중 중국에 나온 많은 한국기업들이 도산과 부채로 인해 현지 중국 사원들의 급여를 못주게 되고, 기계 설비도 버리고 한국으로 도주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면서 한국기업들의 중국 공안의 특별 감시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회사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급기야 경찰차가 회사 대문을 가로 막아서 출입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사업이 재생불능 이라는 판단하에 어쩔수 없이 한국의 집을 처분하여 중국의 사원의 급여 및 임대비, 밀린 세금을 내고 사업을 접게 되었다.


중국의 시장에 진출해서 남은 건 부채와 신용 불량자가 된 내 자신뿐이었다. 절망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 그 힘든 와중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고, 아내는 어린 아들을 두고 가출해 버리고 말았다. 재기의 몸부림보다는 괴로워서 독한 술을 마시고 취하기를 반복하고 어린아이에게 항상 좋은 이미지만 보이던 내가 한순간 술에 취해서 세상을 포기한 아빠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1년 동안 임대해서 살던 집도 기간이 되어가고 아들은 중국한족 학교 기숙사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야 했다. 나의 불행, 아픔을 자식한테까지 넘겨 줄 순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난지 55일 만에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나한테 와서 원하지 않는 힘든 조기 유학을 시작하게 되었다.
타국에서 엄마도 없이 유치원 입학, 초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연속 이었지만... 중국 학교에서도 항상 1등을 해서 선생님이 많은 학생들 중에서 내 아이를 칭찬해 주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조금은 위안을 삼을 수 있었지만 알거지가 된 내 마음은 초라하고 자꾸 주눅이 들어 술에 계속 의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생활을 하던 중 아이가 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남은 건 아들과 내 자신 뿐 이었다. 나 혼자가 아닌 나를 지켜보고 있는 아이를 위해서 나의 모든 에너지를 통틀어서 다시 시작하려고 몸부림 치던 중 아는 지인이 나에게 한국으로 가보지 않겠냐고 하며 가면 자기네 집 방 한칸을 내어 줄테니 한국에서 다시 시작해 보라고 했다. 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홀몸으로 일가 친척 하나 없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으로 오게 되었다. 막상 와보니 도와줄 사람도 전혀 없고 먹을 것 조차도 부족하여, 하루 하루가 힘겨운 날들이었다.


똑똑한 아들도 어릴적 유학생활에 한국말도 서툴고 나또한 사업 실패로 남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 앉을 순 없었다. 내 자신 보다도 어린 아들을 위해서라도 일어서야 했다. 우선 어린 아들을 입학시켜야 하는데 어찌 해야 하는지 몰라 무작정 인근에 있는 무극초등학교로 가서 교감 선생님과 상담을 하니 교감 선생님이 한국말을 모르니 5학년 교과서 국어, 수학 과목을 알려주면서 한달 후 시험을 보아 합격하면 5학년 2학기 과정으로 입학이 가능하다고 하여, 직장도 잡지 못하고 아들을 데리고 국어 받아쓰기 부터 국어과목을 집중해서 가르쳤고, 수학은 기초가 있어서인지 문제를 잘 풀었다. 시험을 본 결과 합격을 해서 초등학교 5학년 2학기로 입학을 했다.


아들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 내 자신이 문제였다. 무엇을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가야만 하는데 일자리가 없고 찾기가 힘들었다.

사무직 일을 최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일을 해오던 내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때부터 아무 일이나 다시 시작해야 했다. 급기야 주유원으로 취업을 하려고 해도 나이가 많다고 연락을 해준다고 하고 연락이 오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직장을 잡을 동안 용역 사무소에 일자리를 신청하고 막일을 시작했다. 농가 하우스 짓는 일, 도로 포장일, 집짓는 보조, 비록 막일 이지만 함부로 하진 않았다. 하는 일 마다 최선을 다하니 업주들은 흡족해 하였다. 그러나 비오는 날 등을 제외하고 나면 일거리가 많지 않아 수입이 넉넉치 않아서 걱정이 많던 중 대지공원 묘지관리 직원을 채용한다고 해서 지원을 했더니 합격을 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순수 정원관리 일인지 알았는데 막상 일은 무덤을 파고 돌을 고르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라 너무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 안 하던 일을 해서 인지 허리와 손이 너무 아프고 담이 걸렸지만 참고 일을 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고통을 느껴 병원을 가보니 진찰 결과 허리 척추 뼈가 내려 앉았다고 했다. 그동안 무척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느냐며 주사치료를 권했다. 하지만 나는 의료보험을 가입하지 않아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서 비싼 병원비를 지불해야 했기에 병원비가 없어서 간단한 치료만 받고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담이 결리고 허리가 많이 아팠지만 참고 일을 해야 했다. 이 일을 안 하면 먹고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여름에 시신 수습은 너무 냄새가 나고 역겨웠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일을 해야만 했다. 좋지 못한 몸으로 하루 종일 고된 일에 시달리고 나서 저녁엔 청소, 빨래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가끔씩 회의가 들기도 하고 우울해 지기도 했다. 삶의 목적도 불분명하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삶을 유지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마다 성경의 요한복음 구절을 떠올렸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나의 희생을 감수하고 아들을 잘 교육시키게 되면 힘들어도 행복하지 아니한가, ‘꼭 공부만 잘하는 그런 아이 말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심성이 바른 그런 아이로 키워야 겠다’고 마음먹고 열심히 일을 하던 중 근처에 사시는 분이 APT 경비원을 구한다고 하여, 이력서를 제출했더니 전화가 왔다.


그동안에 했던 일은 아이와 시간이 맞지 않아 힘들었는데, 경비원 일을 하니 아이와 시간을 맞출 수가 있었다. 아이도 구김살이 없어지며 한국생활에 잘 적응해 주었고, 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내가 먼저 최선을 다했다. 상대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대하니 상대방도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렇게 한국에 온지도 1년이 넘어 2009년 12월쯤이 되었을까? 갑자기 한겨울에 집을 비워 달라고 하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가진 돈도 없고 어린 아이와 이집 저집 다니던 중 할머니 내외가 아들하고 살면서 방을 하나 내주셨다.


월세 20만원에 방을 얻고 또 다른 생활이 시작 되었다. 추운겨울 난방을 못하니 방문이 얼어 문이 열리지 않아 뜨거운 물을 끓여 부어서 문을 열고 나가고, 수도가 수시로 얼어 밥을 제때 하지 못해서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지 못한 날이 여러 날 있었다.


그래도 태양은 뜨고 내일은 반드시 왔다. 육체, 정신도 황폐해지고 힘들어도 아들을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지금 시작은 미약하지만 반드시 창대해 지리라는 말씀대로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던 중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APT 경비 일을 하던 중 한겨울 밤에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오면 APT 단지내 눈이 쌓이면 다음날 세대원들이 출근을 못하니 밤새 눈을 녹여야 했다. 창고의 염화칼슘을 꺼내 손수레에 싣고서 그 넓은 APT 단지를 혼자서 염화칼슘을 뿌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 뿌리고 눈이 녹는 것을 보면서 내일 APT 단지내 사람들이 무리 없이 차를 이용하여 출근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경비실로 와서 잠시 쉬는 도중에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며 매스꺼움과 함께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 변기가 붉게 차올라서, 나는 순간 저녁에 먹은 사발면 국물을 토 한지 알았다. 허나 그것은 전부 피였다.
경비실로 저녁에 심심하면 오시던 APT 단지 대표님이 오셔서 나를 보고 얼굴색도 하얗고 하니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일의 심각성을 모르고 잠시 어지러울 뿐 이라고 하며,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또 피를 토하게 되었고 그 때 대표님이 119 구급차를 불러 삼성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위의 출혈이 멈추지 않아 위험하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한밤중에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충주 건대병원 중환자실로 가게 되었다.

간단한 치료와 그 다음날 내시경 검사와 조직 검사를 하고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오니 퇴원 후 일주일 후에 보자고 해서 그동안 일을 했다. 그 뒤, 병원에 가보니 교수님이 위암 3기말이고 담낭으로 전이가 된 상태이므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정말 하늘이 노랗고 왜 그리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는지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준비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아파트에서 같이 일하시던 과장님이 수술하고 나올 동안 아들을 보살펴 줄 테니 맘 놓고 수술을 하라며 도와 주셨다.
아들문제가 해결되니 이젠 수술비가 없어서 막막했는데, 다행히 암은 수술비를 정부에서 지원되어 5% 만 내면 수술을 할 수가 있었다. 어려운 수술이지만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수술 후 마취가 깨지 않아 다시 병실로 오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나, 수술 후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팠다.

배에 구멍을 뚫어 피고름을 뺄 수 있게 좌우로 통을 4개나 달았다. 그리고 소변을 볼 수 있게 또 하나를 달고 장들이 흩어지지 않게 긴 호수로 내부에 고정을 시키고, 피가 모자라 피를 보충 할 수 있는 바늘이 꼽히고, 산소호흡기 등등 내몸에 13개나 되는 호수가 꼽히고 관통해서 나를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 위 1/3절단 담낭제거 장장 13시간의 수술 후 완전히 암 조직을 제거하여 수술은 잘 되었다고 교수님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의 병원생활은 간병인 하나 없이 간호사를 통해 해결하고 간호사가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담당 교수님이 5년간 항암치료와 식이요법으로 음식을 잘 조절해서 먹고 치료를 잘해야 한다고 하며 입원을 해서 치료를 해야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병원비 문제로 한 달에 한번씩 오기로 하고 4일 후 퇴원을 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무는 동안, 동네 의원에서 상처 치료를 하기로 했다.

병원비를 보건소에 가면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준다고 하여 가보니 한국에 기록이 하나도 없어서 안 된다고 하였다. 사업이 기울면서 채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니 그전에 가입한 보험도, 아들 교육보험도 다 없어지고 혜택을 한 가지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삶이 시작되었지만 그리 낙관하지도 실망 하지도 않고 다시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열심히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죽을 써줄 사람하나 없어서 직접 밥을 해서 아들을 먹여 학교 보내고 남은 밥을 푹 끓여 죽을 만들어 간장에 찍어 먹으며 생활을 연명해 갔다.
이것이 아들을 향한 부성애가 아닌가 생각했다. 또 한차례 큰 태풍이 지나갔다. 더 어려운 고통이 올지라도 나는 헤쳐 나갈 자신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 아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생활이 어려워도 밝은 모습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어느 지인이 우리의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수급자 신청을 해주었다. 군청 조사팀이 도착해서 우리가 너무 어려워 보였는지 한가지라도 더 도움을 주시려고 노력 하시는 게 보였다. 처음 받아보는 배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혜택을 주려고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어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신용회복 위원회에서 부채도 균등 조절해서 매월 얼마씩 나누어서 채무를 탕감하게 해주었다.


또한 돈이 없어 치료를 중단했던 함암 치료도 약으로 복용하며 치료하게 되었다. 여러 넘치는 도움을 나도 언젠가는 남을 위해 조금이라도 베풀 수 있으면 베푸리라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을 하니 세월은 흘러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 또한 몸도 많이 회복되었을때, 금왕읍 사무소 담당 주사님한테 자활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음성지역자활센터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은근히 고민을 하면서 문을 들어 섰다. 모든 직원 분들이 인상도 좋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특히 곽미옥 과장님의 꼼꼼한 상담을 통하여 우선 인큐베이팅 사업단에 배치되어 교육과 간단한 부업을 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일과 맞는 사업단을 찾아보기로 하고, 다음날부터 자활사업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음성지역자활센터는 재활용, 청소, 세차, 영농, 도배, 인테리어, 다듬이세탁소, 요식, 복지도우미, 복지간병, 홈크린, 크린운동화, 국수랑만두랑 사업단을 운영하며 지역의 저소득층들에게 자활의 의지를 높여 스스로 자립 할 수 있도록 자활 능력을 배양하고 기능습득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며, 자활기업으로의 창업 및 취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곳으로 여러 개의 자활기업이 운영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자활사업단 중 나에게 맞는 인테리어 사업단으로 배치가 되어, 나와 같이 어려운 기초생활 수급자 및 어르신들과 장애인들의 집수리, 지붕잇기, 창문, 출입문, 화장실 변기, 세면대, 정화조, 보일러, 도배장판 설치 등 모든 것을 지자체 도움을 받아 무료로 설치해 주었다. 사업단 이었기에 몸은 고되었지만 나도 무엇인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만 1년을 자활사업단에 배치되어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인테리어 사업단이 자활기업으로 출범을 할 수 있게 되어, 2012년 5월 1일자로 공동체 인증서를 받았다. 또한 ‘태민건축’이라는 자활기업으로 사업자 등록증을 내어 수급자 1인 차상위 1인으로 조그마한 사무실을 얻어 간판을 걸고 내 사업, 우리사업을 하게 되었다.


지자체에서 어려운 분들을 위한 집수리사업, 장애인 집수리 개조사업, 한국에너지재단의 열효율 개선사업의 하나로 창호공사를 하며, 주택 점검카드와 관리 카드를 만들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찾아가 도움을 주고 있다.

지역의 어르신들 및 장애인 가구, 기초수급자 가정의 집을 수리해 드리고 나면 그 분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게 된다.

사업실패, 암투병을 이겨내고, 지금의 삶이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지만 내 삶이 남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는 삶이라면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내일을 위해 살 것 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비는 내리고 있습니다. 언제 해가 떠서 맑은 날이 올런지 모르지만 꼭 맑은 날이 오고 내일은 반드시 옵니다. 자활참여주민 여러분 모두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저는 성공하지도 않았고, 재산도 전혀 없지만, 작은 보람으로 아들과 자활기업을 운영하며, 이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많은 분들에게 이 힘없는 재주나마 재능기부를 하면서 그분들에게 조그마한 힘이되어 그 분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항상 자활센터 참여주민 및 자활기업을 위해서 애쓰시고 계시는 음성지역자활센터 박용훈 센터장님, 고헌식 실장님, 곽미옥 과장님, 김주영 팀장님을 비롯하여 모든 직원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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