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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복 이야기
  • 년도2014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김행복
  • 조회수2,054

*자활수기집 제11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금상 '김행복 님'의 이야기 입니다.
 수상자 요청으로 가명을 사용합니다.


작은 행복 이야기
 

 


책상 위 물건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서자 비릿한 가을비 냄새와 어느 새 차가워진 바람이 뒤숭숭한 내 마음 한 귀퉁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시청으로부터 수기공모와 관련하여 전화를 받고 몇 날 며칠을 곱씹어도 끊이지 않을 내 힘겨웠던 10여년의 순탄치 않았던 삶의 조각들이 몇 컷의 필름처럼 지나가며, 잊고 싶었던 그 때를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2003년 어느 날 두 아이의 아빠 이면서 내가 믿고 선택했던 남편과 헤어지고 커다란 비닐 한 봉투에 내 결혼생활의 전부를 담아 좁다란 원룸 안에 툭 던지며, 상대방에 대한 성숙한 배려의 의미를 곱씹으며 아파하던 그 때 그 날로…. 그렇게 시작되었던 나의 또 다른 삶은 너무나 낯설고 고달팠지만, 착하고 밝은 두 딸의 성장만으로도 무거운 삶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나가기 에 충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초등학교 2학년이던 큰 딸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며 투덜대는 일이 있었다. 쉽게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혼내며 그 이유를 듣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 옆으로 야외수업을 오는데 친구들에게 우리 집이 여기라는 사실을 알리기 싫다는 것이었다. 몇 일 전 딸아이가 방과 후 같은 반 친구 몇 명을 집으로 데려와 놀았는데 공부방도 없이 단칸방에서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산다고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약 반 친구 전체가 알게 되면 창피하니 제발 오지 않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부모의 이혼을 어린 나이에 감당해 주는 아이들에게 늘 감사하기만 했지 어미로서 아이들이 감추며 얘기하지 못하는 상처에 대해서는 미처 돌보지 못하고 생각해 주지 못함에 그저 먹먹한 마음과 죄스러운 눈물로 자책했었다.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려 결국 야외수업을 다른 곳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고, 그 일로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 특별한 수입원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실행에 옮기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내 아이들을 위해서 그저 넋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성서의 말씀처럼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먼저 읍사무소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일자리를 부탁했고, 조금의 기다림 끝에 복지 도우미로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낯설고 서툴지만 일용직으로 사회생활의 기회가 주어지면서 희망의 불씨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직장생활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아 갖고 있던 달란트가 없었음에도 어떤 마음으로 사무직으로 일하겠노라 하였는지 모르겠다.


그러한 악착같은 내 모습을 보이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서일까? 이사를 항상 염두하고 있던 나에게 친언니가 다른 곳으로 이사 하면서 본인이 살고 있던 20평 규모의 아파트를 임대해 주었다. 물론 남들보다 적은 비용의 월세를 내고 아이들에게도 방을 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사를 한다는 자체만으로 기뻤다. 정서적으로도 민감해져 가는 딸들을 위해서도 더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매달 들어오는 월급으로는 생활비 지출도 빠듯했던 상황에서 몇 십 만원 하는 월세를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니에게는 차마 다음에 주겠다는 말도 내뱉지 못하고, 몇 달씩 밀리는 상황에서 괜찮다는 언니의 말은 더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쌓여만 갔다.

그러한 각박한 생활비 부담 속에서 세월은 이만큼 흘러왔고, 나의 삶에 있어서도 변화가 생겨 일자리는 처음 시작 할 때 보다 다소 안정되었고 아이들은 잘 자라주어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될 즈음 희망키움통장 가입 안내를 받았다. 소규모 저축도 정기적으로 납입하지 못하는 여전히 어려운 경제 여건에다가 3년 이내 탈수급을 해야 하는 통장이므로 쉽게 결정하지 못하다 큰 아이의 대학입학 자금을 위해 어렵게 신청을 하였다.


매월 불입하면서 위기도 있었지만 3년이란 시간은 참 빠르게도 지나갔고 바라던 대로 탈수급을 하였다. 때를 맞추어 큰 아이는 대학을 진학하였고 생각지도 않게 입학자금으로 쓰려던 돈은 다른 곳에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 예쁜 딸아이는 국비 장학금을 받게 되어 엄마의 어깨를 펴게 만그 동안 못난 동생을 위해 돈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던 우리 집 주인장 언니에게는 그동안 밀린 임대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모처럼 친정엄마에게도 물리적인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껏 살면서 항상 가족에게 걱정만 안겼던 내 삶의 많은 짐 중에서 작지만 하나를 덜어내는 순간이었다.


희망키움통장은 나에게 추운 겨울 날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주는 털장갑 같은 존재였다. 한 코씩 뜰 때는 힘들었지만 완성되어 손에 낄 때의 만족감과 그 속에 느껴지는 온기 마냥, 내 아이와 함께 따뜻한 꿈과 희망을 키워 나갈 수 있는 공간을 공유하고, 언니에게는 미안함을 갚고 동생으로서의 도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땐 그랬지’라며 옛 일을 회상할 수 있는 오늘이 좋다.

뜨거운 여름이면 시원한 가을을 기대하고, 비바람 부는 오늘이지만 내일은 화창한 새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듯이, 인생의 긴 여정에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잘 버티고 이겨내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날들이 펼쳐지리라는 믿음이 있다.

얼마 전에는 그 믿음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장래 외교관이 꿈인 여고 2학년 둘째딸이 총학생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고 환한 웃음으로 자랑을 했다.
오늘처럼 우중충한 날 보글보글 맛있는 청국장으로 두 아이와 오붓한 만찬이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덧 눈에 들어오는 우리 집 대문. 그 문턱을 넘으며 오늘 하루에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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