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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쁨
  • 년도2014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박숙재
  • 조회수2,528
*자활수기집 제11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대상 '박숙재 님'의 이야기 입니다.

삶의 기쁨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멋모르고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남매를 낳았고 그냥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우리 가정에 찾아왔다. 마치 영화의 일처럼 말이다. 남편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3개월 만에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 살, 아이들은 여섯 살과 세 살이었다.

혼자 막막한 삶을 살다 아이들이 열 살과 일곱 살 되었을 때 재혼을 하였다. 아홉 살짜리 딸도 생겼다. 나는 이 가정만큼은 최선을 다해 지키고 싶었고 잘 살고 싶었다. 모두들 IMF를 어려워하고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했다. 스무 살 때 철없이 가정을 꾸렸던 것처럼 또 다시 어떤 막연함을 가지고. ‘아이들 아직 어리고 큰 돈 들을일 없으니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그럭저럭 살았다.

어쩌면 삶에는 항상 복병이 있는 듯하다. 남편이 하는 일도 주춤해지고 생활도 어려운 차에 몸에 이상을 느껴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임신이라고 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 셋도 감당하기 벅찬 터라 두 사람 합의하에 분명 피임을 했기 때문이다. 생명이 감사하지만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낳더라도 지금은 아니고 형편이 좀 나아지면 생각해보려 했었다.
원장님은 낳으라고 했다. ‘아이가 셋이에요’라고 말하니 착상이 잘됐으니 낳으란 말만 하신다. 낳으면 다 키운다고. 남편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한숨만 쉬어댔다. 어차피 둘 사이에 아이는 있어야 한다는 친정엄마의 권유로 넷째가 태어났다. 너무너무 잘생긴 아들이었다. 정말 예쁘고 튼튼하게 태어난 아들을 남편도 아이들도 너무나 좋아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이들은 줄줄이 중학생에 고등학교도 가야 하는데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앞날은 캄캄하고 나와 가정을 위해 살아야 할 남편은 친구와 술을 더 좋아했다. 아이를 바라보면 마냥 예쁘다가도 눈앞의 상황에 한번 마음이 사로 잡히면 앞날이 암담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잠들면 마당 마루에 앉아 한없이 밖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차가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중에는 하루에 버스가 몇 대 지나가는지, 몇 시에 가는지까지 모두 알게 될 정도였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때부터 아기는 아이들이 돌봐 주었다. 큰아이 고등학교 입학할 때가 다가오자 부담감에 더욱 마음이 조여왔다. 넷째가 네 살이 되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사이 일할 생각은 안하고 나라의 도움을 받아 살려니 자존심이 상해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면사무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신청 결과 우리 가정은 근로하며 기초생활 지원을 받는 조건부수급자가 되었다. 담당 선생님은 자활사업 참여를 조건으로 보호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사업이 아직 시작 단계이고 자활기관이 있는 읍까지 출퇴근 해야 하니 좀 기다려보자고 했다.


한편 직장생활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나는 일도 해야 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다행히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업 참여를 유예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내가 일곱 살이 되면서 다시 자활사업 참여를 권유받았다. 그냥 두려운 마음이 찾아왔다. 자활센터 상담 중 못하겠다고 말하니, 담당 직원은 면사무소에 가서 이야기 하라고 했다. 그리고 면 담당자에게서 사업 참여를 안 하면 수급 정지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 형편에 아직 아이도 어리고 수급은 유지되어야 할 것 같아 다시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엄마의 손이 필요하다. 자활사업 참여를 보류해 달라’고 부탁해 보았다. 그때 복지담당 선생님은 한참을 나와 상담해 주었다. ‘자활 참여는 해야 하고, 아이도 이젠 자랄 만큼 자랐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어머니 정신건강에도 안 좋다’고 하시며 일주일에 네 번, 하루 다섯 시간 면사무소 청소를 해보라고 했다. 일찍 퇴근해서 아이도 볼 수 있으니 한번 시도해 보라며 오랜 시간 나를 다독거리고 또 설득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땐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 사람을 만나고 대한다는 것, 집을 벗어난다는 것 등등.. 그 당시 나는 무기력할 대로 무기력해 있었고, 모든 것이 귀찮은 상태였다.


그렇게 떠밀리듯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마음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생활도 변함이 없었다. 큰 아이 대학도 보내야 하는데, 남편은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 고등학교 나와 돈 벌어 시집가면 되지?’라고 말했다. 집안 사정도 어렵고 남편도 힘들다는 건 알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럴 때면 면사무소 상담실을 찾아가 담당 선생님 앞에서 이런저런 일을 얘기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속엣 것을 털어놓고, 마음에 쌓인 것과 슬픔을 이야기 했다. 그렇게 상담하고 돌아서면 창피한 마음도 들었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많은 도움과 힘이 되었다. 복지사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고 아이들이 장학금 받을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셨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조금씩 내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함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내가 처음 참여했던 근로유지형 자활사업은 근무시간과 날수가 적어 한 달 35만원 급여로, 생활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이 연이어 대학을 진학해야 하는 때에 나는 스스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젠 자활센터에 나가 하루를 온전히 일하며 좀 더 적극적인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면 복지담당 선생님에게 이 새로운 결정을 얘기했다.


그 선택과 결심을 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나도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전보다 자라났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의 막막하고 고통스럽고 주저했던 시간들이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활사업 참여는 단순히 돈을 더 벌어 가계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보다 내게 더 크고 소중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과 절망감, 재혼, 그리고 불화와 자녀양육의 부담, 계속된 경제적 어려움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희망도 자신감도 모두 잃었었다. 오직 무기력한 감정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스스로 일어나 가정과 면사무소에서 한 걸음 세상으로 나가 자활센터 사업 참여를 결정한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도무지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나의 되풀이 되는 투정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격려해준 면 복지담당 선생님,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출근할 곳과 할 일이 있다는 사실, 일터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격려가 나의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 나는 아직도 작고 부족하지만 세상 앞에 한 걸음 내딛기 위해 서 있었다. 때문에 그동안의 모든 시간과 만남과 경험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활센터에서 나는 처음 가축방역팀의 인원이 추가되면서 그 팀에 배치되었다. 생소한 일이었지만 관내를 다니면서 축사를 방역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소독일지 기록, 민원인 도장받기 등 그런 대로 할 만한 일이었다. 고맙다고 주시는 박카스가 그렇게 고마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장님이 갑자기 본인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있어 준비해야 되니, 내게 방역팀장을 맡고 운전도 직접 하라고 했다.


티코는 운전해 봤지만 1톤 화물봉고, 그것도 소독물 탱크를 싣고 운전해야 했다. 평지에서도 물이 심하게 출렁대면 차가 휘청거려 무서웠는데 막막했다. 골짜기의 가파른 언덕, 포장되지 않은 도로, 진흙길, 차를 돌릴 수 없는 막다른 곳 등등 예상치 못한 위험이 참 많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업으로 바쁜 단장님은 ‘한번 해보라’고 간단히 말하며 그냥 사라져버렸다. 본의 아니게 나를 참 강하게 만든 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방역 운전을 전담하며 방역자격증도 취득하였다. 운전면허증 다음으로 자격증이라는 걸 취득하게 되어 뿌듯했다. 그렇게 한동안 방역팀을 전담하다 운전이 필요한 다른 사업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2011년 전국적으로 자활사업에 택배 시범사업이 시작되면서, 우리 횡성자활센터도 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에 지원되는 정부양곡 배송사업을 위탁받게 되었다. 센터장님은 나에게 담당해 보라 권유 하였고, 마음 속으로부터 할 수 있을 거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센터장님의 도움을 받으며 첫 한 달을 시도해보았다. 처음 시작은 차상위 계층만 대상으로 100가구 정도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소만 들고 집을 찾아다니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낯설었다. 외딴 산골짜기 까지 들어가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놀라고 한편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기초생활수급자도 같이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배송 기간 안에 몇 백 집을 주소로 찾아다니고, 20kg의 쌀 포대를 여자의 몸으로 수 백개씩 들고 나르는 것이 정말 지치고 힘들었다. 나중에는 양곡 배달만으론 수익이 한정되어 꽃배달 퀵도 함께 하면서 열심히 뛰어 다녔다.


꽃집 사장님은 만날 때마다 ‘대단해! 멋있어! 어떻게 늘 웃고다녀!’ 하며 칭찬해 주셨다. 매일 계속되는 일상에 지치고 힘들다가도 그 말씀에 힘을 얻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보니 방안에만 처박혀 몇 시간이고 넋 놓고 앉아 있고, 먼산·먼길·지나가는 차들만 하루 종일 쳐다보며 보냈던 날들이 있었다. 그것도 싫증나면 아기 재워 놓고 장롱이며, 냉장고, 책상 등 가재도구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내 빈 마음을 채웠던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도 놀라고 남편도 놀랐다. 또 바꿔놓았냐며 아이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남편은 ‘힘이 장사라고, 그 힘이 어디서 나오냐’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정말 무기력했고 마음이 공허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는데, 이젠 변해도 너무 변했다.

예전의 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활발하고 늘 미소를 짓고 다니는 나를 보며 다들 깜짝 놀란다. 사장님 포스라고 놀림 반 칭찬 반 얘기하며,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당찬 모습이 엿보인다’고 말한다. 1톤 화물차, 그것도 영업용 화물운송 자격증을 취득하여 양곡을 배송하다 보면 어르신들의 칭찬이 이어진다.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펴 최고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한다.

하루 종일 운전하는 것이 힘이 더 드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양곡 포대를 어떻게 들어야 좀 쉬울까 싶어 어깨에도 매보고, 머리에도 이어보고, 등에도 업어보고, 가슴에 끌어안고, 나르기도 했다. 먼 거리는 작은 이동 구루마를 사용하였다. 특히 우리 사업단은 남자 없이 여자 둘이 배송을 하고 있어 힘든 일이 참 많다.


그러나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기다렸다 박카스를 준비해주는 어르신, 당신도 다 꼬부라진 허리로 우리를 안쓰러워하며 쌀을 받아주려는 어머니들도 계셨다. 아주 깊은 산골짝에 외로이 사는 분들은 사람 구경을 못해 우리를 보면 한 마디라도 더 얘기 나누고 싶어 하였다. 배송 기간에 쫓겨 마음이 바빴지만,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앉아 이런저런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어드렸다.


장애가 있어 몸이 불편해 면사무소까지 가기 힘든 분들은 왕복 택시비가 쌀값보다 더 나오니 대신 신청해 드리면 너무 고마워 하셨다. 처음 배송을 맡았을 때 늦게 온다고 항의하던 분들도 이제는 서로 친해져 점심도 주시고, 참 때라고 국수도 삶아주셨다. 민폐가 될까 조심스러워 마다하면 오히려 실망 하시는 것 같아 맛있게 먹어드렸다.


깊은 산골짝에서 힘들고 어렵게 사는 어르신들을 보면 내가 도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 말이라도 상냥하게 해드려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 조금이라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보이는 분들을 만나면, 그 분도 나처럼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그래서 예전의 내 모습을 이야기하며 자활사업을 소개해 드리고, 일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기도 하였다.


자활사업에 참여하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늘 박카스를 준비해 주시던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시고, 배송 명단에서 주소는 같은데 할아버지 이름이 할머니 이름으로 바뀌어 찾아가보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는 것이다. 대상자들 대부분이 고령이시니,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미우나 고우나 양곡을 배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고, 사는 이야기와 정을 나누며 의지했던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남은 어르신이 눈시울을 적시면 나도 그 곁에서 같이 눈물이 났다. 사람 사는 모양은 다 똑같은 것 같다.


얼마 전엔 웃음치료사에 대해 매력을 느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을 만나도 말 한 마디 할 줄 몰랐던 내가 말이다. 이젠 입이 가만히 있질 않고 성격도 남성화 되어가는 것 같다. 마음도 급하다. 세월아 네월아였던 걸음이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게 되었다.


현재 내가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업단은 ‘송아리택배 사업단’이라고 부른다. 전국 네트워크사업이라 배송 실적이나 명단 등을 전산으로 중앙협회에 올려야 해서 컴퓨터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지만, 컴퓨터는 면사무소 일할 때 복지사 선생님의 배려로 잠깐 배웠던 것이 전부였다. 읍사무소나 군청에 들릴 때면 창피를 무릅쓰고 직원분들께 하나하나 물어보며 배워 모든 업무처리도 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때그때 맞게 된 모든 어려움과 문제들은 결국 나에게 힘을 주고 도움을 주었다. 나를 강하고 똑똑하게 만들어주었다. 네 아이들을 어찌 먹이고 기르고 가르치나 걱정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다 성장했다. 어쩌다 아이가 몇이냐고 물으면 ‘넷입니다’ 한다. 모두 놀란다. ‘대학생이 셋이예요’라고 말하면 거기에 또 놀란다. 어떻게 가르치냐고 물으면, ‘다 장학금으로 다녀요’하고 얘기하면 더 놀란다. 전액 장학금이라는 말에 또 놀란다.


지금 우리 큰아이는 석사과정이고, 둘째는 대학 4학년이다. 내가 마음이 어려울 때 같이 사춘기를 겪고 반항하며 방황하고 가출도 했던 우리 셋째는 대학 2학년 휴학하고 늠름한 군인 아저씨가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막내 아들 넷째는 초등학교 6학년! 지금도 너무 예뻐 버릇없어 질까봐 잠잘 때만 살짝 예뻐해준다. 그때 내 짧은 생각으로 힘들고 어렵다고 안 낳았으면 어쨌을까? 지금 이렇게 행복한 날들이 내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 ‘나’라는 존재를 잊고 살 뻔했는데 이전의 나를 벗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앞으로 정부양곡 택배 수익만으론 자활기업으로 나가 독립할 때 힘들 것 같아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도전해 보려 하고 있다. 예전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것, 나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활사업 참여에 대한 선택과 결정이 나를 새롭게 하고, 내게 삶의 기쁨을 선물해 주었다. 이제 나는 ‘나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삶으로 살게 된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지금 나는 삶의 진정한 행복과 참다운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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