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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날개를 달아드립니다
  • 년도2014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송영현
  • 조회수2,619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송영현 님'의 이야기 입니다.

희망의 날개를 달아드립니다


악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밝은 세상으로 나와 눈부신 햇살을 보듯 희망찬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뿌듯하고 대견함을 느끼는 마음으로 충만했다. 사람이 일할 수 있다는 기회와 건강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살면서 몸으로 체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행복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면서 살아 온지도 벌써 2년 6개월 이란 시간이 흘렀다. 자활공동체 생활 속에 바쁘게 살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였고, 몸이 고단하니 일일이 시간을 쫓아다닐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계절에 대한 감흥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 사치였고, 오직 내 한 몸과 세 자녀들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였고 풀어 나가야 할 숙제였다. 이렇게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나에게는 희망과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센터에서 자활 수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과연 내가 살아온 과거를 밝혀야 할 것인가를 놓고 많이 망설였고, 글재주가 없는 내가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에 많이 고민도 했으나 살아온 과정을 솔직히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고백”이 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반성의 기회”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졸필을 들게 되었다.


나에게도 지난날 행복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남들이 평범하게 누리는 행복, 부모님이 나이 들어 늦게 낳아 늦둥이로 귀염을 받고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자라온 날들이었다. 남들 다니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입학해서 3학년에 다니던 가을날! 내 앞에 운명처럼 다가온 남자를 만난 시간부터 안온하고 편안했던 시간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남자를 사귄다는 아니, 일방적으로 나를 쫓아다니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집에서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의 불행의 씨앗은 잉태되었다.” 라고 생각한 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어머니는 “애야 너는 지금 학생 신분이 아니냐? 학업을 마치고 남자를 사귀어도 늦지 않다.”며 나를 설득하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내가 보기에는 영 내키지 않으니 아버지 말씀을 듣는 것이 좋겠구나.” 하시면서 아버지 편을 드셨다.


나는 어머니께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며, 제가 사는 것이니 제 뜻대로 하게 해주세요.” 라고 말씀드렸더니 한숨만 내쉬셨다. 불같이 강한 성격의 아버지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며 부모가 자식을 망치는 길로 보내는걸 보았냐? 그러니 말을 들어라” 하며 일축 했다.

참으로 야속하고 서운하고 슬펐다. 나는 속으로 “우리 부모님은 고지식하고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 세대 차이나!” 라고까지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이요 불효 중에 불효였다. 그러나 젊은 혈기가 왕성하고, 눈에 콩깍지가 끼였으니 앞을 내다보거나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었고 또 어린 나이였다.

결국 잘 다니던 대학을 3학년 때 포기하고 동거에 들어갔다. 임신을 하거나 아기를 출산하면 “인정을 해주시고, 받아주시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만의 달콤한 밀월을 꿈꾸었으나 늘 한편으론 부모님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축복받지 못한 두 사람의 동거였지만 살림하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첫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께 연락할 자신도 없었고, 어렵게 출산한 터라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나는 가슴을 조아리며 혼자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막막하고 외롭고, 쓸쓸했던지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 스물세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즈음 아버지께서 위암말기라는 진단결과가 나왔다며 “위급하니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와 보라”고 연락한번 없던 친정집에서의 연락이 왔다.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졌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어머니를 비롯한 오빠와 언니들, 온 집안이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병실에서 본 아버지의 얼굴은 초췌했으나 그래도 딸자식인지라 아기를 보듬고 간 나를 그윽한 눈으로 올려다보시면서

“그래 이 놈이 내 외손주구나” 라고 하시면서 희미하게 웃으셨다. 이어서 아버지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젠 너도 부모가 되었구나.”
“늦었지만 결혼식은 올리고 살아야지” 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 제가 잘못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가 이렇게 병을 얻으신 게 다 제가 속 썩인 탓이예요.” 라면서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급속도로 결혼식 준비를 하고 병약한 몸을 이끌고 나오신 부모님의 축복과 형제들의 축하 속에 사회에서 인정하는 남들 다하는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동안의 과정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가면서 만감이 교차되었다. 늦둥이 막내딸 면사포 쓴 모습을 보신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 마음에 큰 못이 하나 냉큼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정식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1남 2여를 키우면서 순탄하게 가정살림만 하는 주부로 살았다. 그러나 순탄하게 지내던 시간을 시샘하듯, 그저 금술 좋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너무도 평범한 남편에 의해, 어느 날 일순간에 내 인생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도 잊을 수만 있다면 잊고 싶은 그날, 하늘이 유난히 높고 맑았던 1995년 가을날.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자동차 사고소식은 119구급차에 실려 전주 예수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건설업을 하던 남편은 그즈음 사업이 잘 되지 않던 관계로 입에 잘 대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족에게 관심을 두기 보다는 밖으로만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는 나로서는 남편의 말과 행동으로만 희미하게 판단하고 감지할 뿐, 나의 직감과 후각은 “혹시 사업에 문제가 생겼나? 아님 바람피우는 건 아닐까?” 벼라별 상상을 하며 남편을 의심하게 되었고 말다툼도 늘어만 갔다.


그 날도 회사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차를 운전한 것이 화근이었다. 119구급대 에서 연락이 왔는데 남편이 교통사고를 일으켜 전주예수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것이다. 황급히 택시를 타고 도착한 응급실에는 간신히 의식만 붙어 있는 남편이 흰 시트가 깔려있는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지 이틀 만에 네 식구를 남겨 놓고 정처 없는 길로 떠나 버렸다.


남편은 마지막 눈을 감기 전에

“여보! 아이들 사랑하지? 부탁해”
“그리고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 마음 아프게 해서...” 라고 말 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들은 걱정 말고 어서 일어나야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생명의 불꽃은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때의 막막함 이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걸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말이다.


온통 세상이 먹구름이 꽉 낀 것처럼 새까맣고 눈물만이 샘솟아 평생 울어야 할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았다. 시집 식구들이 와서 남편의 유품들을 정리하고 떠나면서 “이제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 한마디 남겨놓고는 지금껏 연락을 끊고 살고 있다. 당신들의 핏줄이 이렇게 예쁘게 자라고 있는데도 말이다. 참으로 야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덩그라니 남겨진 나는 당장 자식들과 먹고 사는 일이 급선무였다. 남편이 남겨놓고 간 것은 무일푼 이었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회사는 부도 직전 이었단다.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서 혼자된 딸이 안되어 보였는지 친정어머니가 함께 살자고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 밖에 없다는 생각과 고마움에 목이 메었다.


세월과 시간은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인가?

가족이라는 일원에서 한 사람이 빠져 그 공간이 크게 느꼈을 것이지만, 호구지책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어떻게든 산 사람은 목구멍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살아야 하니까, 가정살림만 하고 있다가 세상 속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빈주먹뿐인 나에게 어머니께서 외손자, 손녀들에게 당신이 가지고 계셨던 목숨과도 같은 전 재산인 집을 넘겨주셨다. 이 세상 누가 출가외인인 딸에게 선뜻 집을 주실 수 있을까? 지금은 좋은 세상에서 편안하게 쉬시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은혜를 언제 다 갚을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마음 한 구석이 싸해 온다.


처음 시작한 일은 「피자와 치킨」 집. 잘 아는 언니와 동업을 하면서 나는 자금을 대고 언니는 판매를 책임졌지만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투자한 돈을 건지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장사가 먹는 장사라고 했는데 쉽게 시작한 장사가 잘 안된 것은 어쩌면 불을 보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번에는 서울에서 잘 나간다는 「비디오 버스」 라는 인터넷 이동차량 비디오버스 사업을 전주에서는 처음으로 창업했다. 두 번째 하는 장사라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받고 자녀들과 함께 아파트를 돌며 전단지를 부치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고 단골들이 생겨서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인터넷이 활성화 되지 않은 중소도시에서는 대상층이 한계가 있었다. 투자금에 비하면 고물 값에 불과한 돈을 받고, 가지고 있던 차와 장비, 재료들을 팔아버렸다.


결국, 2년 후 어머니가 주신 재산을 모두 까먹고 또 다시 빈주먹이 되었을 때 두 번째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친정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동안 정신적으로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자식들을 돌봐 주시던 분이었기에 나는 심한 충격과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어찌 나에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지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얼마 후, 새롭게 생활을 시작해야겠다는 각오로 낮에는 대학교 앞 분식집에서 근무를 하면서 그 동안 못다 한 대학 공부를 시작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밤낮을 바꿔가며 돈을 벌기로 하였지만 한 부모가족에게는 나날이 고달픈 생활이었다. 그래도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던지 동 주민자치 센터를 통하여 수급권자로 지정되었다. 최저생활은 보장 된다고 하지만 커나가는 아이들의 양육비며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도 병행 하였다.


2005년. 그간 물불 가리지 않고 몸 돌볼 사이 없이 어린 자식들과 여자 혼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몫으로 한다고 해도 건강 하나는 자신 있어 하던 나였다.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목숨을 더 연장시켜 주시려고 나에게 예지를 주셨다고 믿는다.


대한가족계획협회 앞을 지나다가 이상하게 몸이 기운이 없고 어지럽고 머리가 띵한 것이 아무래도 진찰을 한 번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건강검진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진찰을 한 의사선생님이 내 눈치를 살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혹시, 보호자가 오실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를 내
“선생님! 저는 제가 보호자입니다. 저에게 그냥 말씀해 주세요.”
“그래요? 그~럼 말씀해 드리겠는데 유방암이 의심되는군요.”
“네?” 제가 유방암에 걸렸다구요?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소견서를 써 드리겠으니 예수병원으로 가보세요. 지금 바로...”
선생님은 말끝에 덧붙여 “만약 유방암이라면 자궁암도 검사해 보셔야합니다.” 라고 하셨다.

“제가 지금 바빠서 시간나면 가보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선생님이 하시는 말

“지금 당장 가셔야 합니다. 암은 촉각을 다투는 겁니다.” 의사 선생님은 당신의 진찰 결과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나는 병원 문을 나서면서도 입으로 이렇게 중얼 거렸다.
“아니? 아닐 것이다. 내가 몸 하나는 얼마나 건강한데” 그러면서도 발길은 이미 예수병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정밀검사와 조직검사를 통해 유방암 초기와 자궁경부암 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또다시 시련이 닥쳐온 것이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여자로서 생명 같은 부분이 둘 다 암이라니?”
“서울에 있는 언니나 오빠에게 알려야 할까?”
“아님, 나 혼자 자식들과 헤쳐가야 할 것인가?”
“그런데 헤모글로빈 등 수치가 너무 낮아 수혈을 해야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수혈하다가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그때 당시에는 수혈을 잘못하면 에이즈에 걸리는 등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무섭고, 두렵고, 도망가 숨어버리고 싶었고 누구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은데 어린 아이들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서울 오빠까지 내려오는 야단법석을 떨고 자식들은 엄마가 어떻게 될까봐 울고불고 하면서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병원생활 3개월이 지난 후 얼굴이 희다 못한 멀건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여성가장이며, 주부로서, 또한 아이들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해내기 위해 몸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업전선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할 만한 일들은 건강을 이유로 제한적인 것이 많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렇게도 염원하던 공부를 하기 위해 2009년 사회복지상담과를 지망하고 전문대학에 문을 두드렸다.


대학생활에서 오는 공부의 재미를 느끼던 중 같은 과 선배로부터 전주생명지역자활센터에 대한 소개를 받고 드디어 2010년 3월 안정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나로서는 대학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인 것이다. 더더욱 사회복지상담을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사회적 약자의 자활을 지지하는 지역자활센터가 그야말로 임상 현장이나 마찬가지이며,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보드레기저귀 사업단에서 단장으로 맡은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면서 기저귀를 사용하는 어려운 분들과의 소통은 인생의 살맛을 느끼게 하고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삶의 체험 현장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기저귀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 승합차를 운전하고, 때로는 기저귀를 삶는 가마솥 열기 속으로 들어가 뻘뻘 땀을 흘리는 경험을 하면서 사업단 안에서 수고하고 있는 보드레기저귀 가족들을 볼 때마다 늘 고맙고 감사함을 느낀다.


보드레기저귀에서는 기억나는 많은 사례가 있지만 나를 많이 당황하게 만들고, 힘들게 했던 한 시민단체의 수혜자가 있었다. 그분은 사업단에서 깨끗하게 삶아 빨아서 말린 기저귀를 포장해 집에 가져다주기까지 하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의 집 세탁기에 넣어 다시 빠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자신이 한 번 더 빨아 쓰겠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고객은 왕이 아닌가 싶어 출고 시 부터 수혜자에게 기저귀가 도착할 때까지 대 소변을 따로 구분하고, 대변은 솔로 일일이 털어 4회의 애벌빨래를 거쳐 가마솥에 삶고 삶아 그것도 모자라 다시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햇볕에 자연 건조하여 기저귀 하나하나를 손으로 예쁘게 사각으로 개어 비닐포장을 해서 수혜자 집집마다 배달하는 것이라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제서야 “아~하 그랬구나” 라고 하면서 음료수를 건네며 “사업단 안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고생 하겠네요” 라며 미안해 했다.

그일 말고도 그분은 여러 차려 나를 곤궁에 빠지게 했다. 그렇게 시작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기가 기저귀를 때었다. 기저귀를 회수하는데 트집만 잡던 그 분이 “그동안 정말 고마웠으며 기저귀 잘 썼고 경제적으로 많이 보탬이 되었다고, 아기엄마가 힘을 많이 덜었다”고 하면서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고 나를 안아 주는 것이었다. 연신 내게 감사하다며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또한 자기가 홍보해 주겠다며 다짐까지 해주셨다. 나는 순간 이런 것이 보람인가? 라는 생각에 잠겼고 “그동안 사용해 주셔서 내가 더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주생명지역자활센터에 있는 동안 전문대학도 졸업하였고 지금은 종합대학에 편입해 올 해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아이들도 엄마와 같은 대학생으로 잘 자라 주었고 지금은 대한주택공사의 도움으로 네 식구가 살만한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전주생명지역자활센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하기 싫은 부분이다. 나에게 행운의 여신은 웃음과 희망을 보내주었다. 이제 3년차가 다되어 가는 시점에서 전주생명지역자활센터에서 희망키움통장 담당 사례관리자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센터장님께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셨고 그동안 준비해둔 사회복지상담사 자격으로 응모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처음 시작은 참여자였으나 이제는 참여자분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드리는 사례관리자로 역할이 바뀐 것이다.


누구보다 나는 참여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작은 체구지만 내 가슴은 푸른 바다와 같다. 그 가슴에 프리허그란 단어를 새겨 놓고 누구든 포옹 하고자 한다. 나는 어제, 참여자로 시작은 초라하였으나 지금은 어엿한 사례관리자로 겸손하게 참여자들과 동반자로 서 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무던히 속상하고, 고민하고, 화나고, 짜증났던 일들이 많았지만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견뎌왔다. 이제는 희망을 일구는 전도사로서 그 소명을 충실히 해 나가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시기 바란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좋은 일이 있게 마련이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으시길 바란다.


지역의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고 생명을 꿈꾸게 하는 자활센터야 말로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도록 지지하고 견인하는 지렛대가 되어준다고 확신한다. 나는 지금 꿈꾸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진짜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나는 이제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니라, 스스로 몸을 일으켜 내게 손을 내밀어 생명의 꿈을 잉태케 해준 자활처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경청하고 공감하고 포옹 할 것이다.


그 길만이 나에게 베풀어 준 사회적 은혜를 되돌려 주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두 번의 사업 실패와 사랑하는 부모님과 남편을 마음으로 보내고 여자로서 두 가지 암수술을 견뎌낸 내가 이글을 쓰는 이 순간에는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의 여유가 그동안 나에게 부족했던 것이다.


지금껏 생명의 끈을 이어가게 해준 우리 세 아이들에게도 고맙다. 더욱 감사한 것은 우리 보드레기저귀 사업단에서 열심히 일하며 가족이 되어준 식구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함께 근무하는 팀장님들에게도 새내기로서 따뜻한 응원과 실무에 많은 가르침을 줄 것을 부탁한다. 또한 10여년을 한마음으로 생명자활사업을 통하여 소외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의 나무를 심어 주신 센터장님과 저를 도와주신 주민센터 실무자 선생님들에게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아름다운 천사들이라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며 따뜻한 마음과 희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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