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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도 살아가는데 희망을 갖고 싶다
  • 년도2014
  • 기관명인천연수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예병화
  • 조회수2,211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예병화 님'의 이야기 입니다.

이제는 나도 살아가는데 희망을 갖고 싶다

나는 물 맑고, 공기 좋은 경북 영주에서 1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비록 정상적인 몸으로 태어나지 못했지만, 부모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탓한다고 해도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분들인데...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나의 마음이 상처받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따가운 말들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주위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쳐다보면서, 애 어른 할 것 없이 쳐다보면서 ‘난장이! 키가 왜 이렇게 작냐?’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는 부모님께서 학교에 데려다 주시고 데리러 오시고 하셨다.
부모님은 항상 나를 이렇게 낳았다는 마음에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고 걱정해 주시고 돌봐 주시려는 분들이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는 나의 몸(다리)으로는 학교가 너무 멀어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힘이 드신대도 불구하고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자전거로 태워주시고 학교 끝나면 정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나를 태워서 가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아프셔서 자리에 눕게 되셨다. 몸이 많이 안 좋아서 계속 병원도 다니시고 했지만 더 안 좋아지셨고 그 2년 후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다.

나는 그 뒤 1년이 지난 후 경기도 일산에 있는 장애인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전국각지에 있는 장애인들이 학교에 입학해서 기술을 배우는 곳이며, 기술을 배워서 자기 적성에 맞는 직장을 구해 주는 곳이다.


직장을 구하는 학생들도 있고 구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
거기서 처음으로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서 애들 아빠를 만났고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로 인해 내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도 후회가 된다.

그때는 이렇게 될지 아무도 몰랐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못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남들처럼 사랑받고 싶었고, 관심 받고 싶었고, 그때 그 사람이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만 거기에 넘어가 버렸다. 처음에는 정말 좋아서 마음이 갔었다. 양쪽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서로의 사랑과 안 됐다는 마음에 끌려서 정이 갔다... 그러다가 큰애를 갖게 됐고 부모님의 반대에 밖으로 떠돌아다니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는 내가 스무 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고 두 사람 다 돈 한 푼도 없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때 애들 아빠는 막노동을 하면서 겨우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일을 하다가 힘들고 아프다는 핑계로 일을 놓게 되었다. 집도 아무것도 없이 돌아다니며 항상 배고픔에 젖어 있었고... 먹고 싶은거,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참고 살았다.

그러다가 엉뚱한 짓을 하게 되었다.
거지가 한다는 구걸을 하게 되었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한 푼만 도와달라고 사정하면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한푼 두푼 얻어서 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애들 아빠한테 원망도 많이 했지만 내가 택한 일이고 누구 도움하나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대구에 기숙사 있는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일하면서 먹고 자고 했기 때문에 잠깐 동안은 불편하지 않게 지냈다. 그러다가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몇 달 다니다가 그만 두었다. 애기 아빠는 잘 다니다가 사람들과 다투면서 그만두게 되었고 또 다시 힘든 시간이 돌아왔다.

애를 가진 상태에서 또 다시 구걸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애기 아빠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고, 남들한테 한두 푼 얻어서 하루하루 생활하고... 그 다음날 또 얻어서 먹고 살아야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어쩌다가 시어머니가 아시고 시아버지 모르게 방을 하나 월세방을 얻어 주셨다. 그 방에서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살다가 그나마 돈을 내지 못해 쫓겨나게 되었다.
애를 낳을 때가 되어서 친정엄마랑 연락을 하게 되었고 엄마의 도움으로 애를 낳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크면 클수록 엄마를 닮을 거라고 했다. 정상적인 애를 낳지 못했다.

시어머니께서도 이 소식을 듣고 내려오셨다.
하지만 애기 상태를 보시고 키우는 걸 반대하셨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사이에 실랑이가 오가고 시어머니는 ‘애기를 고아원에 보내고 각자의 길을 가라’고 하셨고 친정 엄마와 나는 ‘그것도 한 생명인데 어떻게 그러냐고 키우겠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고 화를 내시곤 다시 집으로 올라가셨다.

친정어머니는 한 생명인데 어떻게 하냐며 친정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어머니께 연락이 왔고 우리는 시댁으로 올라갔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시선은 따가웠다.
나를 닮은 딸아이를 싫어하셨다.

시댁에서 살다가 형과의 불화가 생기면서 시어머니께서 다시 대구에 방을 하나 얻어주셨다. 그러나 거기도 방세를 못 내서 어머니가 내 주기를 반복... 결국은 쫓겨나고 다시 생활비도 없는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애기 분유 값도 없어서 구걸을 해서 사 먹이고 분유도 하루 이틀이 멀다하게 동이 나서 분유 값을 구해야만 했고, 어떨 땐 분유를 아끼느라 생우유를 사서 먹였다. 물만 먹인 적도 많았다. 애기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둘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기대를 했지만 둘째 아이도 나를 닮은 아들이었다. 혹시나 하며 기대를 했는데 그 아이 역시 식구들의 축복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또한 고생시키는 것이 맘이 아팠다.

둘째 아이 소식에 어른들께서 다시 올라오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큰 딸애를 볼 때처럼 그렇게 좋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당신 손자이기에 그나마 조금의 사랑을 주셨다. 다시 함께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3~4시간에 한 번씩 우유를 먹여야 하는데. 애기 우는 소리, 밤낮으로 우는 애기 소리에 잠도 못 주무시고 형과도 또 싸우게 되고 다시 집을 나오게 되었다. 이번에도 다른 동네로 집을 하나 얻어 주셨다.

다시금 힘든 생활이 돌아왔고, 어른들이 도와주셔도 얼마나 도와주시겠냐는 생각에. 그렇게 또 구걸을 하며 생활을 유지했고. 애들은 점점 커갔고. 돈이 더 많이 들어갔다.
임대아파트를 신청해서 1~2년 만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의 생활도 어려움이 많았다. 애들은 점점 크고 어려운 생활은 점점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또 다시 애들 아빠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일도 안하고 놀고 먹고 그런 생활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사람이 변하기 시작했고 무능력해지면서 폭력과 욕설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돈은 벌려고 하지 않고, 없으면서 담배만 피우고, 담배가 떨어지면 구해오라고 시키고, 안 구해오면 욕설에 폭력까지... 무능력한 아빠는 이제 애들까지 괴롭히며 욕설과 손찌검을 해댔다.

그때쯤 생계비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 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몇 장만 주고는 밖으로 돌았다. 매달 그렇게 해놓고 집에 들어와서는 다시 돈을 구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구걸을 하는 게 남들한테는 창피하지만, 아예 마음을 꺼내놓고 해야 되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 창피, 욕이고 다 견뎌내야 했다.

술집, 식당, 가게... 그런데 가서 무작정 구걸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감에도 애들 아빠는 점점 더 무능력해지고 나를 괴롭히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고, 사람 만나는 것까지... 집 밖에 나가면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도 금방 나갔는데 애들 보내서 오라고 시키고... 그런 생활이 계속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애들 아빠는 아는 사람을 따라 지방으로 일을 하러가게 되었다. 그렇게 자주 집을 비우게 되면서 애들과 나는 조금씩 편해졌다.

그러기를 몇 달, 애기 아빠가 갑자기 변했다.
아는 사람 따라 일을 다니면서 여자를 한명 사귀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돈을 달라해서 내려갔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다. 나하고는 헤어져도 그 여자하고는 못 헤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이혼을 하게 되었고 애들은 아빠가 키우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 딸을 데려와 키우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사랑으로 키우고 남들 못지않게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것도 잠시, 전 남편은 애를 핑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와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딸아이를 전 남편에게 보내게 됐다.

딸한테 미안하고, 부족한 엄마라서 아무것도 못 해주는 게 맘 아프고 속상했다. 가기 싫다는 애를 억지로 보낸 게 미안하고 그 아이도 엄마한테 맺힌 게 많을 것이다.
엄마가 아빠한테 자기를 보내서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에 나를 원망할 것이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많이 힘들 것이다. 그 아이들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많을 것이다. 그 뒤로 1~2년이 지나서도 남편은 다른 핑계로 나를 가끔씩 괴롭히고 있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나도 나의 삶과 생활을 찾고 싶고... 살아가는데 희망을 갖고 싶다.
지금 나는 인천연수지역자활센터 되살림(미싱) 사업단에서 1년 넘게 근무하고 있다. 기술만이 내가 살아나갈 희망이라는 생각에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이제는 인정도 받고 있다. 장애로 인해, 아이들로 인해, 남편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었지만 이곳만큼은 편견 없이 나에게 기회를 줬고 부족하지만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오늘도 나는 언젠가 당당하게 만날 아이들을 위해 힘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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