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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지막 꿈을 향해 달려보자
  • 년도2014
  • 기관명대구북구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최정식
  • 조회수2,047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최정식 님'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꿈을 향해 달려보자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 새삼 내가 살아 온 날들을 되돌아본다. 긴 시간은 아니라지만,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는 길다고 느껴지는 세월이다.
가난, 중국집, 성공, 결혼, 실패, 이혼, 알코올중독, 딸 사고, 수급자, 자활근로사업, 자활공동체 창업, 내 인생의 마지막 꿈……. 이 단어들은 내 60인생을 대변하고 있는 말들이다.


가난은 나에게서는 태생에서부터 시작된 말이다. 너무 질긴 인연이 아닌가 싶다. 삶의 일부분이 되어 오히려 무덤덤하게 살아온 것 같다.

공부를 하고 싶었는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가난과 싸워야 했던 청년시절은 한 푼이라도 벌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기에 고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힘으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었다. 경북 예천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나 가난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견디다 못해 무작정 서울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집에서 농사지은 고추 15근을 훔쳐 도망치듯 상경했었다. 아무런 연고지가 없는 난 가방공장에서 1년 정도 일을 하여 살았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어리다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고 일만 시키는 사장님 때문에 더 이상 못 버티고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는 예천으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와서도 공부대신 여러 가지 일들을 했으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일곱이 되어 우연찮게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길이 나의 직업이 되어 한 평생 한 남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국집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 당시에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돌파구였다.
내가 해 본 여러 가지 일 중 하나였던 중국집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내 직업으로 이 일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한 유일한 일이였다.
하지만, 현실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고 주방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배달과 잡일을 도맡아 한지 3년 정도가 지나서야 주방에 들어가서 접시를 닦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요리는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했고 면 뽑는 사람, 칼질하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며 실력을 조금씩 키울 수가 있었다.

그 뒤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았고 돈을 조금 더 준다고 하면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5살 되던 해부터 난 주방장으로서 일을 할 수가 있었고 감격에 겨워 주방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중국집 주인은 나에 대해 신뢰를 조금씩 가졌고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너무 고마운 분들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어리고 모아둔 돈이 없지만, 시간이 지나서 내 식당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뜻을 주인에게 말을 했고 주인은 날 기특하게 생각해서인지 조금씩 더 많은 요리기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난 정말 열심히 일을 했고 목표를 향해 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이제 떳떳한 주방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 정말 악착같이 일을 하면서 내 가게를 운영 할 날을 생각하며 돈도 계속 모아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38살이 되어 내 이름으로 된 가게를 열 수 있게 된 날이 온 것이다.

이 날을 위해 얼마나 기나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 온 건지 서러웠던 일, 힘들었던 일들이 생각나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실컷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난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아껴가며 돈을 모아갔다. 내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식당은 나날이 번창해 갔고, 없이 산다는 얘기는 듣지 않을 만큼의 돈도 벌었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그 당시에는 날 아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듣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거창한 성공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난 성공이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더 큰 목표를 향해 계속 달렸다. 하루 매출이 점점 더 올라갔고 그로 인해 배달인력이 더 필요하게 되어 직원도 더 들여서 바쁜 일상을 매일같이 보내곤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난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가 훨씬 지나버린 것이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 여자를 만나 미래를 꿈꾸며 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 마음이 더 풍요로워 지는 걸 느꼈다. 남보다 늦게 한 결혼인 만큼 나에게는 또 다른 행복이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기뻤고 아내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면서 남매를 키우며 남부럽지 않게 평범한 삶을 이어갔다. 이전까지만 해도 난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서 살았지만, 노력으로 극복하고 행복의 길로 접어들어 그것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꿈꿔온 길로 순조롭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갈 것 같았던 행복은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장사가 잘되어 종업원 수도 늘리면서 가게를 키웠는데 매출이 날로 감소하면서 운영이 점점 어려워져 사업을 시작한지 3년 정도가 되어 결국 가게 문을 닫고 또 다른 시련을 맞았다.


실패는 행복해져가는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술과의 인연도 이 때 부터인 것 같다. 실패했다는 자책과 상실감을 술로 달래기 시작한 것이다. 평상시에 남들처럼 간혹 먹던 술을 매일같이 먹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아내와의 다툼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었다. 심지어 난 의처증까지 생겨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아내는 날 멀리하며 가정은 파탄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내는 결국 참다 못 해 집을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 당시 난 정상이 아니었기에 당장은 슬프지도 더 힘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을 보면 나의 가난한 시절이 생각이 나서 괴로웠다. 내 자식만큼은 내 인생을 닮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그 바램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못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집을 나 간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조금씩 그 공백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내를 찾아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결국 아내를 찾기는 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정식으로 이혼을 해 달라는 말이었다.
늦었지만 아내에게 빌며 제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으나 너무 많은 상처를 준 뒤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만이 나에게 남았고, 이는 앞으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할 것인지도 예견했다.홀아비 밑에서 서러움을 견뎌가며 살아가야하는 자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

살아야 했다. 술을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중국집을 전전하며 주방장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술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건 자식들이었다. 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렇게 또 다시 돈을 모아서 두 번째로 중국집을 차렸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탓일까?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종업원도 늘리지 않고 그렇게 가게를 운영해 갔다. 인건비를 아껴야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종종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온 후에는 아빠 일을 돕겠다고 식당에서 거의 매일 살다시피 했었다. 장사도 그런대로 잘 되는 편이었고 우리가족은 다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또 나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뜻 하지 않는 사건으로 더 이상 일어서지 못 하고 옛날로 돌아가 버렸다. 딸에게 사고가 나고 말았다. 그날도 여전히 바쁜 휴일을 보내고 있었고 두 남매는 가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주문이 밀려들어 정신이 없었던 터에 딸이 아빠 일을 돕겠다고 하다가 그만 면을 뽑는 기계에 손이 말려들어가고 말았다. 딸아이의 비명소리에 세상은 무너져버렸고 우리 세가족의 행복은 한 순간에 날아 가 버린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고 큰돈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모아둔 돈은 딸의 병원비로 다 써버렸다.

딸은 7번의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앞날이 구만리인 우리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날 짓누르기 시작했다. 난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때부터 또 다시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의 모습을 주위에서 너무 안타깝게 본 이웃의 도움으로 그 때부터 나라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수급자 신청을 하고 내 인생을 한탄하며 참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자식들을 위한 길이였고 나도 여기서 인생을 포기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거리도 다시 찾아야 했지만,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중국집에서는 아픈 기억에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동사무소에서는 자활근로사업을 추천해 주었고 대구 북구 지역자활센터에서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면서도 술은 완전히 끊지 못 해 많은 애를 먹었다. 담당 선생님은 내 사정을 듣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술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해 주었다.

그렇게 몇 년을 청소사업단에서 다양한 청소관련 일을 하면서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음식을 만들어오던 내가 생소한 일을 한다는 것이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신규사업단으로 음식관련 사업단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담당 선생님께 사업단 변경을 신중하게 요청하였으며 사무실에서는 나의 사회경력과 의지를 보고 변경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결정이 있기까지 사무실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술을 완전히 끊지 못해 한 번씩 과음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다.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술은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서약을 하고서야 사업단을 변경 할 수 있었던 것 이였다.
음식관련 사업단에서는 내가 가진 경험들로 더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난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다. 역시 내가 잘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자신감도 있었고, 능률도 더 많이 높일 수 있었다.

그 사업단에는 날 더 자극시킨 열정적인 동생이 있었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어찌 보면 난 그 동생 때문에 무언가를 다시 해 볼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결국 그 동생이 먼저 자활공동체를 창업하고 나가게 되었고 난 결심을 했다. ‘다음은 내 차례라고……. 반드시 나도 열심히 해서 보란 듯이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을 해 볼 것이라고…….’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바로 중국집을 다시 경영하고 싶어졌다. 목표가 생기고 나니 내 생활도 너무나 적극적으로 바뀌고 희망도 부풀었다.

이제는 사무실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술도 거의 조절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자활공동체를 꿈꾸며 같이 일을 할 동료들과 오래 전부터 얘기를 해 왔고 준비를 계속 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010년 12월 29일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자활공동체를 인정받게 되었다.
드디어 “후루룩 짜장” 이라는 중국집을 3명이 창업하게 되었다.

자활공동체로 인정을 받은 “후루룩 짜장”은 나에게 던져진 새로운 도전과제로 보고 당당히 맞설 것이다. 30년 가까이 내가 해 왔던 일이 아닌가!

다시 프라이팬을 잡은 난 매일 매일 설렘으로 출근을 하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사실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나로 인해 엄마 없는 삶을 산 자식들에게 지금까지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한 것도 없고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 준게 아닌가 해서 가슴 한 편이 항상 아련하게 아파왔고 실패자의 인생이라는 자책 속에서 늘 헤어나지 못 한 것도 사실이다. 늦었지만 내가 다시 용기를 내고 살아가는 이유는 내 자식들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에게 마지막 남은 소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언젠가는 자식들과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딸은 사고 이후 고등학교까지 진학해서 다니다가 방황을 하였고 결국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다행히 20살이 되어 센터의 도움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사회에 나아가 사회인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은 불안정한 가정 속에서 의기소침하며 엄마의 그리움을 삼키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지금은 당당히 군복무 중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난 우리 세 가족이 함께 모여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그날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몸은 지쳐가고 체력은 약해져 있지만, 나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이기에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다.
난 장사가 잘 안 되는 날에는 혹시나 공동체 문을 닫지 않을까 노파심에 사무실에 절대로 문을 닫으면 안 된다고 자주 얘기를 한다. 사무실에서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오히려 나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실어준다. 이 또한 실패를 거듭한 내 인생의 경험 때문에 나타나는 걱정인 것이다.

내가 이 나이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북구 지역자활센터 선생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이 글에서나마 선생님들에게 평소 잘 하지 못했던 감사의 인사를 꼭 하고 싶다.


내 인생의 마지막 꿈을 실현하는 날이 그렇게 멀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기술을 내 자식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다. 지금까지 자식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못해보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 세 가족에게 펼쳐질 미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고 희망이 되고 싶은 마음이 지금 살아가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어려운 과정들이 있었지만, 정부의 도움이 있었기에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었다. 이제는 빨리 자립해서 도움의 끈을 놓고 홀로서기를 하고 싶다.

나의 마지막 꿈은 반드시 이룰 것이고, 그때는 남매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싶다.

사랑한다. 내 새끼들아!

우리의 마지막 꿈을 향해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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