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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난 멋진 도배사이고 싶다
  • 년도2013
  • 기관명천안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이선영
  • 조회수3,288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이선영 님'의 이야기 입니다.

앞으로도 난 멋진 도배사이고 싶다

“이 아줌마 로또 맞았나? 어디서 큰소리야!” 매니저는 도리어 큰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손을 꽉 쥐며 “이보세요? 일을 시켰으면 돈을 줘야지 뭐하시는 거예요?” 내 목소리는 마음과 달리 떨리고 있었다.

지난 일 년여를 매일 보며 ‘일을 하네, 안하네’ 떠들어 대던 매니저는 언제 알고 지냈냐는 듯 안면몰수로 일관하고 있었다. 벌써, 두 달째 나는 천금 같은 급여를 받지 못했고 고통스러움에 작정하고 따지자고 나선 길에서 서러움이 몰려왔다.
울지 말아야지는 머리고, 내 모습은 감정이 앞서 눈은 벌개지고 손이고 몸은 감당할 수 없이 떨려왔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찾아간 노동부에서 다행히도 받지 못한 급여를 해결 할 수 있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불현 듯 생각나는 일이다.
이뿐인가!! 식당서빙, 오후에 출근해서 다음날까지 전화하고 연결해 주는 보험 렉카, 아이들과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 많은 직장을 찾아다니며 일을 했다. 마지막으로 요구르트를 배달하는 일을 했는데 나름 재미도 있고 의욕도 생겼다. 그런데 이때 친정아버지 부음소식이 전해졌고 아이를 태우고 강원도로 향하던 중, 고속도로에서 차가 전파되는 사고를 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들과 나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그나마 생계유지의 수단이던 낡은 차마저 없어져 버렸고 그로 인해 난 직장을 잃어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생각한 것이 도배 기술을 배워보는건 어떨까? 였다. 막막한 느낌에 동사무소 복지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천안에서 도배 배워서 일할 데가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담당자는 전화번호를 주며 상담 받아 보시면 도배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전화번호를 받아 찾아간 곳이 “천안지역자활센터” 였다. 그간 물불 안 가리고 일한 탓에 아이들과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상담을 통해 들은 자활의 급여는 실망감을 느끼게 했고 잠시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도배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었고 2009년 9월 1일 도배사업단의 구성원으로 처음 일을 하게 되었다.
들어갈 당시엔 여자가 한명도 없었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지만 나로 인해 여자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도배라는 일이 힘들다고 들어서 ‘내가 도배 일을 할 수 있을까? 도배하는 집에 꽉 찬 짐은 어떻게 옮기고 도배를 한다는 걸까? 그걸 내가 들고 나르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다행히 도배 팀원들의 앞선 경험으로 일에 대해 이야기도 해주고 조금씩 배워 나가며 나도 처음 도배란 걸 하게 되었다. 정말 열악하고 지저분했던 집이 이틀 만에 아주 깨끗하게 도배가 완성되었을 때 그 기쁨이란…….
그 기쁨으로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갓 배운 기술로 일반 기술자처럼 하지는 못했고 느리고 더디기는 했지만 우리 팀원 모두 꼼꼼하게 잘 해드리자는 생각으로 일했다. 광덕에 가서 도배를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주워 말리신 귀한 호두를 주머니에 넣어주시곤 하셨다. 한 할머니는 삼겹살을 사 오셔서는 안 된다는 우리를 극구 붙들며 같이 삼겹살을 먹자고 붙드셨고 우리와 함께 삼겹살을 먹으니 사람 사는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할머니의 외로움이 아프게 느껴졌고 나는 도배만이 아닌 정도 함께 주는 사업단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도배, 장판을 시공하러 가면 집집마다 먼지 냄새가 다르다는 것도 알았고, 시공 칼에 손이 베어 고생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내겐 신이 내린 직장이란 감격이 더 컸고 처음으로 나는 내 미래를 알고 싶어졌다.

도배 팀을 이끌어 주신 분은 센터장님이셨다. 틈틈이 비전을 제시하면서 도배사업단이 제대로 일하는 일터로 거듭나길, 교육이나 회의 때마다 동기부여를 해 주셨다.
그런 노력 끝에 우리 사업단은 2010년 시장형 일자리사업단으로 한 단계 발전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성격에 차이 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문가가 되어보자는 공감이 이루어진 때도 이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센터장님도, 그 시절 ‘도배사업단이 한계를 스스로 정하지 말자!’를 종종 주문하였다.
자활기업 창업을 준비해야 할 즈음 자활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란 과제로 떨어졌다. 진짜 제대로 일하려면 뭐가 필요 할까? 당면과제가 절실해졌다. ‘도배기능사’ 자격증을 따보자. 그러나 금액이 만만치 않았고 나는 대출을 감행하며 학원을 등록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국가 자격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을 가는 힘든 시간들이 지났다.

2010년 11월 시험일을 받아놓고 센터장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한계를 정하지 말자” 그러나 학원 원장님의 우려대로 시험장에서 벽지를 잘못 재단하였고 자격시험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헛웃음이 났다. 나는 애써 그럴 수 있다고 나를 다독였다. 다음을 기약하고, 주변에 비웃음도 흘려보냈다. 포기하기엔 이르고 실수는 되풀이 하지 않으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배기능사 자격을 따냈다.

도배사업단 뿐 아니라 센터에서 하는 교육은 항상 경청했고 그만큼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극복되지 않는 열등감이 있었다. 아이 넷을 낳아 기르면서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말하고 내 자신을 인정하는 게 힘들었다.

나는 방송통신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이수하여, 그리 염원하던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하나를 이루니 욕심이 생겼다. 대학이 가고 싶어진 것이다. 그 당시는 감당이 될까라는 걱정보다 그냥 무작정 도전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컸던 것 갔다. 군산의 한 대학 아동복지과에 입학했고 우여곡절 끝에 이제 한학기만 남았다. 졸업하면 나는 사회복지사2급 자격을 갖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당당하게 일어서고픈 열망으로 가능했다.
자활기업으로 나갈 즈음 구성원들의 여건과 상황들이 내가 대표가 되어야함을 암시하고 있었다. 대표가 되는 것이 물론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그리고 내안에서 떳떳하게 대표가 되기를 원했고 그런 생각들로 도전을 감행 할 수 있었다.

세상이 너무 힘들어도 나에겐 아이들이 있었고 그 힘으로 버텨왔다. 그저 나는 평범한 아이들의 엄마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자활기업 민들레하우징의 대표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지금도 싸우고 마음 상해하며 일한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지역자활센터. 사회적일자리로 시작해서 시장형 일자리, 그리고 자활기업으로 오는 4년여 시간을 함께 동거 동락했던 팀원들이 생각난다.

부족한 내게 공제조합 이사직을 하게 했던 천안지역자활센터에 또한 고마움을 느낀다. 회의에 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와서 전달조차 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 회의 때 가면 다른 기관 센터장님들이 앉아 계셨고 처음에 내겐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들이 나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어 주었음을 느낀다. 그리고 또한 감사한다.

자활센터로 인해 나는 진정한 자활을 꿈꾼다. 온전히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옆에서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내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음을 또한 감사한다.

민들레하우징 개소식 때 했던 말을 난 하루의 지침으로 삼는다.
“정년이 없는 일터로 만들자”

지난 4년 동안 기울였던 노력으로 힘들겠지만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누구보다 전문적이며 멋지게 일을 해내는 팀원들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극복한 그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하고 있다.
지금도 난 열심히 도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난 멋진 도배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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