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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 아빠다!!!
  • 년도2013
  • 기관명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기흥
  • 조회수2,430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김기흥 님'의 이야기 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아빠다!!!


“아빠! 사랑해!” 어스름이 이제 막 걷히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 6시. 부천에서 안산까지, 열 네 살의 여자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먼 통학 길을 재촉하면서도 딸아이는 이 한 마디를 잊지 않는다.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데 학교 오가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뭣 하나 쉽지 않을 터인데 언제나 씩씩한 모습으로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나의 딸! 그래! 너희가 곧 나의 전 재산이고 희망이다.’



내 나이 올 해로 마흔 하나. 예정대로라면 한창 일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제법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커가는 아이들 보는 재미에 묻혀있을 나이이기도 하다.
한 때는 내게도 분홍빛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별 아쉬울 것 없던 어린 시절과 미래가 촉망되는 청소년기를 겪으며 대학에 진학해 25세 되던 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이듬 해 큰 아이가 태어나면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어 행복하기만 했다. 대기업에서 시작한 첫 직장 생활은 젊은 혈기만큼이나 신나는 하루하루였고 이런 사업 아이템이 모아지기 시작하던 96년 어린이 전문 종합 쇼핑몰을 오픈하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내 인생은 내 뜻대로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다.

그런데,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IMF를 맞으며 회사는 어려워지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기 시작하자 아내는 남매를 남겨두고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직은 젊은 나이인지라,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버리지 않았고 다행히 선배 회사에 재취업을 하였으며 곧 코스닥 상장 회사의 팀장 직을 맡아 아이들과 홀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사업으로 진 빛도 거의 다 갚아가고 차츰 생활이 안정되어 갈 때 쯤 나에게 새로운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충격을 어린 아이들과 나이 드신 어머니가 감당하지 못할 듯하여 말도 못한 채 2년이라는 긴 세월을 홀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해야 했다. 지방에 장기 출장 갔다고 핑계를 대었지만 아이들과 어머니를 버린 못난 사람이 된 듯해 괴로웠다.
이 일로 회사에서는 긴 공백을 이유로 권고사직 당했고, 2년간의 병원비와 생활비는 퇴직금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여 다시 빚을 지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교통사고로 얻은 상처는 결국 지체장애 5급이라는 판정으로 되돌아왔다.

2009년 5월.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 왔지만 아이들과 어머니는 2년 여 만에 보는 상처투성이의 나의 모습에 절망하며 울었다. 이때의 나는 이미 살고 싶다는 의지나 희망 따윈 바닥난 상태였다.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나에게 희망이란 게 있을까?
하지만 산 목숨은 살아야 했고 상처투성이의 나를 가장이라고 바라보는 어린 아이들과 연로하신 어머니가 있었다. 이것 저것 재보는 것도 나에겐 사치였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취업을 하려 구직 활동을 했지만 가는 곳마다 장애인에다 신용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하였다. 공장이나 일용직은 기술도 없고 장애도 있어서 안된다고 하였으며 기존에 다녔던 회사들은 정보통신이나 전산업무는 신용 상에 문제가 있어 보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퇴원하면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직장생활도 하고 아이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은 곧 좌절로 바뀌었고 벌이가 없어서 아이들 용돈은 커녕 먹을거리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한생활고에 시달렸다. 처음 6개월은 실업수당으로 생활비라도 할 수 있었지만 6개월이 지난 11월부터는 월세와 세금조차 납부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였다.
이듬 해 3월이 되자 결국 주민센터로부터 긴급지원을 받아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이는 채 1개월도 가지 못했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차에 어머니가 저혈당으로 쓰러지면서 팔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병원에서 화장실에 가시다가 넘어지면서 고관절이 부러져 응급 수술을 받았고 결국에는 장기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밀리는 치료비와 생활비, 돌봐야하는 어린 아이들과 어머니는 어마어마한 큰 짐으로 밀려왔으며 더 이상 내가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벅찼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나의 암울한 인생항로를 한탄하며 현실도피를 선택한 나는 2년 여 넘게 치료받으면서 받은 약과 진통제, 수면제, 우울증 예방약까지 모두 모아 놓으니 세 주먹이 넘는 양이었다.
자살을 결심하면서 어머니와 아이들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한 마음에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고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마지막 한숨을 몰아쉬는 순간, 느닷없이 경찰들과 병원 총무과에서 들이 닥쳤다. 어머니가 고관절이상으로 피가 모자라 인공관절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보호자는 연락이 되지 않고, 어머니는 위독하여 경찰 입회하에 집에 들이닥쳐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게 한 것이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힘없이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직까진 내가 보호해야 할 가여운 사람들이 이렇게 남아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평생을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못해본 내가 주민센터를 찾아가 떼를 썼다. 정말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보겠노라고. 뭐든 다시 한 번 해보겠다고.

2010년 10월 20일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와의 인연이 시작된 날이다. 자활센터라는 낯선 곳. 상담을 한 다음날부터 택배 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남녀구성원 모두 나이도 많고 몸도 많이 불편한 분들이었으며 특히 나처럼 나이가 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여긴 여태껏 내가 보아왔던, 그리고 꿈꿔왔던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내가 자활을 할 수 있을까?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피폐해진 모습과,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던 당시의 나. 무엇하나 신기할 것도 희망할 것도 보이지 않던 하루하루가 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나 보다 더 나이 들고 더 많이 몸이 불편하고, 함께 할 가족조차 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자활센터는 어려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더 절절한 희망을 꿈꾸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처음 해보는 아파트 택배사업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모두들 익숙치 않은 일인지라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물건 분실 건이 자주 발생하였고, 11월이 되니 착불 미수금이 2백 여 만원이 나왔다. 그동안 업무미숙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하루 전의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건망증 환자들에겐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가혹한 일이었다.

반장을 필두로 착불금 장부를 꼼꼼히 체크하면서 50만원을 찾아내었고 고객과 통화를 하고 사정사정해 50만원을 받아냈지만 나머지 100여 만원은 꼼짝없이 변상을 해야 했다. 이러저러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니 동료들끼리 다툼이 잦아졌고 주먹다짐이 오가는가 하면 알코올에 의지하며 세월을 보내는 이도 생겨났다.

그러던 중 2011년 6월 새로이 양곡사업단이 발대식을 했고 택배사업단 구성원 중 가장 정신력이 뛰어난 6명이 한 팀이 되어 차상위 양곡 700포를 시작으로, 정부사업의 일꾼으로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일도 서툰데 7월부터 시작된 장마는 왜 그리 지루하게 계속되는지, 양곡이 젖을 것을 우려하여 입은 우비 안으로 땀이 흘러내려 급기야 피부 발진이 생겼고, 나중에는 아예 우비를 벗은 채 그 비를 다 맞으며 배송을 하니 때 아닌 한 여름 감기가 떠날 줄을 몰랐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구 주소는 왜 그리 복잡 미묘한지 지도를 봐도 어렵다. 그나마 신 주소는 눈에 잘 띄게 만들어지긴 했으나 주소 하나만으로 집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배송 전에는 미리 전화를 하는데 전화를 받는 경우는 반도 안 된다. 귀가 어두운 노인 분들, 번호가 가족명의로 되어있는 경우, 세대주가 자녀로 되어 있는 경우 등등 사연도 가지가지다. 또 배송은 이미 마무리 했는데도 한 달도 훨씬 지난 후에 쌀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이후로는 반드시 사인을 받거나 가족이라 하더라도 이름을 명확하게 표시하여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우리 부천은 2개의 자활센터가 양곡배송을 하는지라 처음에는 농협창고를 함께 임대하여 사용했는데 분실되는 쌀이 다달이 늘어만 갔다. 무슨 이유로 분실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마치 우리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화도 치밀고 의욕도 떨어졌다. 아무리 정확하게 배송을 해도 2포, 5포, 12포, 22포 늘어만 가니 할 수 없이 창고를 구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시에 기금을 요청해 어렵사리 우리만의 공간을 얻게 되었다.
재개발 지역 한 켠의 건강원 이었던 자리에 벽을 허물고 바닥을 수리하고 엉성하나마 우리만의 공간을 마련하니 너무도 뿌듯하여 잠도 설칠 지경이었다. 우리만의 공간에서 첫 배송을 무사히 끝내고 보니 단 1포의 쌀도 부족하지 않아 뛸 듯이 기뻤다.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한 마음이 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나 겨울이 되자 난방이 되지 않는 창고사무실은 그야말로 냉동고 그 자체였다. 일을 하러 나오려 해도 사무실이 너무 추우니 제대로 챙겨먹지 않은 빈 속에 소주를 털어 넣고 오는 사람, 감기 몸살이라고 드러누워 나타나지 않는 사람, 아예 연락두절인 사람 등등,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전혀 진행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몸이 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하다 빙판에 미끄러지거나 접촉사고를 내는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빈번해졌고, 동료들은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핑계를 들어 현장 반장인 나의 지시를 묵살하기 일쑤였다.

몇 십 년만의 강추위를 견디며 배송사업을 수행하던 지난 2월, 센터에서 우선 난방공사를 하고 간판도 우리만의 이름으로 새 단장을 하고 무너져 가던 바닥을 튼튼하게 공사를 마무리 하는 동안 반장인 나는 동료들을 설득했다. “나이 많아도 장부정리를 가장 잘하는 명규형님, 귀가 어둡지만 책임감이 강해 성실한 영규형님, 허리가 좋지 않지만 어깨가 튼실해 양곡배송을 잘 하는 재흥 형님, 나이가 젤 어려도 컴퓨터 활용 능력이 있어 전체 일을 정리하는 기흥이 까지, 어딘가 부족하면 어딘가 넘치고 그게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여기 정상적인 사람이 어디 있어?” 라는 말을 달고 산다. 스스로가 어딘가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단지 몸이 약간 불편할 뿐이지,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더 비정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들 중에는 알코올중독증이 있거나, 귀가 좀 어둡거나, 눈이 잘 보이지 않거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관절이 좋지 않거나 등등 단순하게 육체나 연령으로만 따진다면 자활사업에 특히나 양곡을 배송하는 사업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최소한의 먹거리인 쌀을 배달하고 누군가에게는 기다림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자부심은 우리를 점점 강하게 만들었다. 어려움을 함께 해온 동료들도 이제 서로를 잘 알게 되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자양분이 되어 지금은 기초수급, 차상위, 경로당까지 합쳐 한 달 평균 3,500여 포가 넘는 양곡을 기일을 어기지 않고 잘 배송하고 있다.

열심히 해보려는 노력들이 가상했는지 일거리가 늘어, 여름방학기간에는 아동도시락 배송과 노인반찬 배송사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동이나 독거노인 등 누구보다도 그들의 처지를 더 잘 아는지라,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우리는 숙련된 솜씨로 배송을 한다.


자활일이 나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하던 무렵, 함께 있어주지 못해 서먹서먹하던 아이들과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멀리는 못가지만 같이 여행도 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 갔다. 사실 아들은 별 걱정이 없었는데 딸아이는 키울 자신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말도 잘 안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 지역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열린 ‘아버지와 자녀가 함께하는 1박2일의 캠프’에 딸아이를 데리고 참가했다. 우선은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어렵게 결심한 터였는데, 이날의 경험을 통해 딸아이도 나도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해로 중학생이 된 딸아이는 국가대표를 꿈꾸며 현재 탁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아이들과도 말문도 트이면서 가정도 조금씩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행복이란 게 꼭 좋고 비싸고 큰 것에만 있지 않음을 느끼며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을 10여년 만에 해 보게 되었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도록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준 일이 생겼다. 세상에는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분들이 있다. 바로 사회복지를 실천하고 있는 분들인데 나도 앞으로의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국비로 경희사이버대학 사회복지과에 편입한 것이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공부하는 바쁜 생활이지만 꿈이 있기에 난 너무 행복하다.

올해 우리 유통사업단이 자리를 잡았다면 내년도는 유통사업단이 자활기업으로 나가는 원년이 된다.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 12년 역사를 통해 돌봄 영역의 자활기업이 수없이 생겨났지만 수도권 유통을 전담하는 사회적 기업으로의 확대를 꿈꾸며 생겨나는 유통자활기업은 우리가 처음이다. 총 12명 중 같은 비전을 갖고 레전드가 되고 싶은 동료는 나를 포함하여 총 6명이다. 비록 육체는 약간 씩 불편하지만 화물운송종사자격취득을 위해 공부 중인 경우, 판단력은 좀 떨어져도 지역전체의 지도를 훤히 꿰고 있어 민원 발생 시 모든 문제를 그 자리에서 해결 가능 한 경우 등 우리는 각자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꾸는 꿈은 더욱 그렇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의 자랑스런 아빠로 살 수 있도록 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꿈을 꿀 수 있도록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를 해주신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에 감사드린다.
한 때 세상의 풍파에 지쳐 쓰러진 적이 있지만 우리들은 꿋꿋하게 일어섰다. 비록 지금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여도 큰 꿈을 안고 큰 세상을 바라보며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하는 나는, 당신은, 여러분은 대한민국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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