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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맛
  • 년도2013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박민자
  • 조회수2,203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박민자 님'의 이야기 입니다.

살아가는 맛

우리 집은 서른을 갓 넘은 딸아이와 아홉 살 터울 아들 녀석이 있다. 걸음마를 떼며 곤지곤지 재롱을 부리던 조막만한 내 새끼들이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 버렸는지... 아침부터 딸아이가 머리맡에 앉아 재잘 거린다.
“엄마, 엄마! 오늘 날씨가 정말 좋아요, 일어납시다! 오늘도 할 일이 많아요. 어제 저녁을 시원찮게 먹었는지 무지 배가 고프네. 아침밥 메뉴는 뭐예요? 엄마, 엄마 일어나보세요, 어서”
꿈속인지 정신이 든 건지 수다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씩 웃고만 있다. ‘그래 이 여유로움이 이제 정말 나의 것이구나...’

늦장을 부리다 서둘러 나선 출근길, 이제 막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나뭇잎들의 살랑대는 바람에 수줍게 춤을 추는 몸짓, 눈이 부실정도로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온 몸으로 천고마비의 가을을 느끼면서 ‘이게 살아가는 맛이구나! 참 맛있다!’ 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시작된다.

강가에 서서 바람에 살랑이며 춤추는 버들가지를 보자 예전 힘들고 칙칙했던 시절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보면 누구나 아픈 사연 하나쯤은 있겠지만 나 역시도 감당키 어려운 사연들에 좌절하고 눈물 흘리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울컥 쏟아져 그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푸르른 하늘에 위안을 받는다.


남편의 사업실패와 빚 독촉으로 도망치듯 부산으로 내려온 게 올해로 딱 15년째다. 그날 밤 3평 남짓 단칸방에 앉아 아이들과 한없이 울었다. 한순간 날아가 버린 지난날의 피땀과 노력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전략해 버린 내가 비참했고 죽고 싶었다. ‘그냥 아이들과 같이 죽어버릴까?, 아이들을 버리고 숨어 버릴까?’ 하는 무서운 생각들을 했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고 희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실성한 사람마냥 보내고 있는데 딸아이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죽 한 사발에 간장 몇 방울, 주인집에서 쌀을 빌려 끓였단다. 뭐라도 드시고 기운 내셔야 하지 않겠냐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날부터 나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밤새 그릇을 닦았고 노점에서 옷을 팔았고, 새벽녘 동네를 돌며 제첩국 장사를 했다. 내가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야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힘든 생활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딸아이가 몸이 아파 큰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엄마를 생각해서인지 제 몸보다는 자꾸 수술비를 걱정하는 딸아이에게 역정을 냈다. 어린 아이들을 고생에 찌들게 한 엄마의 미안함과 속상함 때문에 정말 힘이 들어 죽을 것만 같았다. 큰아이 병원비에, 둘째는 중학교에 보내야 했고 하루 종일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을 해도 돈이 모이기는커녕 갚아야 할 빚더미뿐이었다. 주위사람들이 보기에 안됐는지 동사무소에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나같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제도가 있으니 신청해보라고.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못난 자존심 때문에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나였는데... 몇 날 며칠을 고민 끝에 무거운 표정으로 들어선 동사무소, 그렇게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지역자활센터까지 인연이 이어졌다.

지역자활센터에서 내가 하는 일은 재활용사업단으로 재활용품을 분리하는 일로서 지저분하고 냄새난다고 다들 외면하지만 나에겐 9시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정상적인 직장인이 가지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그 어떤 일도 나에겐 감지덕지였으며 마냥 감사하기만 했다. 이젠 아이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그 한 가지 생각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다. 일이 고되고 힘들지만 같은 환경에 있는 동료들의 마음 씀씀이도 한결같이 고와 서로 아껴주며 위로하며 함께 나누는 동료들이 있어 힘든 게 사라진다.
지역자활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일정한 급여, 정확한 근로시간으로 인해 나 자신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내가 안정되자 가정도 점점 안정되어 갔다. 밤늦도록 일하기 바빠 아이들에게 간식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고 따뜻한 밥상 한 번 차려주지 못했는데 이제는 간식도 챙겨주고 함께 밥도 먹게 되는 일반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안정적인 가정으로 변해갔다. 아이들은 수업료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엄마 속상할까봐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활기차게 살아주었다.

밤낮없이 일하던 일상에 삐걱대던 건강도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살았다 싶었다. 죽고 싶다, 죽자, 하던 내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날그날 살아가기에도 버거웠던 내가, 늘 도망갈 궁리, 죽음만을 생각하던 내가 이젠 좀 살겠다고 했다. 웃음이 나오고, 주변사람들이 보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우리 딸아이는 요즘 언제 아팠냐는 듯이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주었다. 혼기가 지났는데도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개발에 여념이 없으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다. 둘째 녀석은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 대신 산업체에 들어가는 늠름한 대한의 아들로 성장하였다. 대견스럽다. 자랑스럽다. 언제나 나의 힘이 되어주는 사랑스런 내 새끼들.

지역자활센터를 몰랐다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시간에 쫓겨, 일에 쫓겨 만신창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 동료들과 지난밤의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도 한잔하며 큰소리로 웃으며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의 여유가,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한 목표가 생겨 저녁에 검정고시학원에 다니고 있다. 나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새로운 삶을 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난밤 딸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어요?”
그냥 웃으며 대충 흘러버린 질문의 답, 내 나이 훌쩍 50을 넘어 이제 60을 바라본다. 반평생 넘게 살아오면서 왜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겠는가? 내 어머니 아버지 손을 잡고 거닐던 나들이길, 남편과의 연애시절, 아이들이 태어나던 순간, 두 자녀가 대학에 입학 하던 날, 내 아이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는 모습... 지금 생각해보면 절망적인 나날에도 행복은 숨어 있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헤맸었을 뿐 오랜 시간이 지나 찾아낸 내 인생의 답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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