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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콩이 익기에 아직은 이른 계절
  • 년도2013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박수정
  • 조회수2,400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금상 '박수정 님'의 이야기 입니다.

10월, 콩이 익기에 아직은 이른 계절

아이들 소리가 학교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간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나서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교문을 나선다.
맑은 가을바람이 분다. 아무 거리낌 없이 불러대는 선생님,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듣게 된 그 호칭이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듯 익숙해졌음이 놀랍다.
 
 
유난히 추운 겨울

2008년 12월, 그 해는 유난히 추운 겨울로 기억된다.
남편은 건설업 하청을 받아 몇몇의 일꾼들을 데리고 일하면서, 친구와 동업으로 카페를 두 개나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큰 부자는 아니어도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나름 자리잡은 셈이었다. 노력하면 안 될게 없다고 자신하는 젊은 혈기와 의리가 넘치는 남편이었다.

사업장이 담보된 도박 빚만 남기고 카페 운영을 맡아하던 친구가 사라져버릴 때까지는 나는 그저 승승장구하는 남편을 응원이나 하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라며, 모두 믿고 맡긴 남편이 바보 같고 원망스러웠다.
건설현장의 사업자금까지 털어 빚 정리를 해도 끝나지 않는 남편의 징그러운 우정.
나는 갑자기 열이 오르고, 호흡이 거칠어지다가 온몸이 마비되며 쓰러졌다. 게다가 단순히 충격 때문이 아니라, 병명조차 명명되지 않은 희귀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증세로 언제고 쓰러질지 모른다. 의료진들은 몸 속에서 있다가 없어지는 균의 종연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마디로 무료로 모든 의료비를 대줄테니, 실험대상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보니 그냥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갈까 생각했지만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구차하게 사느니,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정만큼 상처도 깊었는지, 허탈감에 술로 보내는 남편이 잘못된 마음이라도 먹을까 겁이 났다.

일을 찾아야 했다. 아이들과 친정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어떻게든 다시 살집을 만들어 볼게” 하고,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남편이 아는 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난 곳이 제주도였다.

 
무일푼으로 고향으로 간 남편은 끼니도 거르면서 막일을 시작했다.
월셋방이 준비되었다며, 친정집에 있던 나와 아이들을 제주도로 불렀다.
당시 나는 중환자실에 입원중이어서, 아이들을 먼저 내려 보냈다.
병세가 약간 나아진 틈을 타, 제주도병원에 입원한다고 둘러대고는 도망치듯 친정집을 나왔다.

서울의 삶이 아득히 멀어져가고

초겨울 공항은 겨울휴가를 떠나는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무거운 내 마음을 실은 제주행 항공기는 연착도 결항도 하지 않은 채, 가뿐히 활주로를 벗어나 날아올랐다. 서울과 서울의 삶이 아득히 멀어져가고 머리속도 귓속도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어떤 삶이 나를 휘둘러댈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위태로운 겨울밤
따뜻하다는 제주에서 우리는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옆집에서 빌려준 전기장판에 온가족이 마치 구명보트인양 동동 매달려서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아이들 옷 보따리만 섬처럼 놓여있는 방에서 맞는 겨울밤은 지독히 길었다.

젊은 나이에 못할 일 없을 것 같은 것은 마음뿐이었고, 끼니 해결도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난, 한 푼 벌기는커녕 병원비가 없어 냉방에 웅크려 누워있어야 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 끙끙대며 괴로워하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뒤돌아 울었고, 난 이불 속에서 울었다.

인큐베이팅, 미숙아가 된 것처럼,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도 가고 봄이 왔다.
옆에서 지켜보시던 분들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하는 것을 알려주셨고 우리가족은 수급자가 되었다.
동사무소에서는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나에게 지역자활센터를 소개해 주었고, 인큐베이팅이라는 사업에 참여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아기의 건강상태가 안 좋으면 들어가는 인큐베이터에서 따온 인큐베이팅이다. 인생에서 낙오가 되었거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안 좋을 때 잠시 머무를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라 했다.
그 곳에서 자신의 인생계획, 미래의 모습을 적고 계획하라는데... 정말 미숙아가 된 것처럼, 이름 외엔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었다.

삶이 계획처럼 되지 않음을 온 몸으로 배운 시점에서, 삶을 계획하라니, 세상을 너무 모르는 교육담당자들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다단계판매로 재산을 말아먹었다는 사람들,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그런 뻔한 수에 넘어가지? 했던 내게 인큐베이팅 교육은 무슨 사이비교단 교리처럼 여겨졌다.
어찌 적었든,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므로, 교육받고 자립계획하는데, 급여와 생계비를 주니 못마땅하지만 하루하루를 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되돌아보면, 계속되는 교육 속에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고, 그 변화들은 내 삶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뜻하지 않은 세계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놓아 진행되던 집체교육이 끝나고, 파견근무 차례였다.
달리 자신 있거나, 욕심나는 일도 없었고, 아이들도 키워보고 아이들도 좋아한다는 이유로 지역아동센터를 무작정 신청했다.

그 곳에서 난 뜻하지 않은 세계를 만났다. 교육과 보육의 사각지대, 다문화, 조손가정, 다양한 아이들이 그 곳에서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외계층의 아이들이 꿈을 키워가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과 차별되지 않게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동안 그렇게 적으라고 할 때마다 막막하던 개별계획서가 내 머릿속에는 작성되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이 있는 교육생이 9명이나 되니, 담당직원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했다.

엄마입장에서, 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사업을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아동관련 사업기관을 방문하고, 어려운 논문과 자료를 찾아 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관을 찾아다닐 때, 처음에는 잘 설명해주는가 싶더니 우리들이 자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자세가 바뀌고, 무시하듯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낄 때도 많았다.

삶에 독기만 남은 우리에게 차라리 그건 약이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열심히 밤마다 공부하며, 방과후지도사, 가베지도사, 아동심리상담사와 같은 자격증을 준비했다.

또 하나 도전

인큐베이팅 참여기간 만료를 앞두고, 계획만 있던 사업은 2011년 3월 일자리 박람회에서 ‘자기비전발표’를 통해 세상으로 나왔다.

꿈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를 계획이 사업화 되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동안 싸우고, 그만 두겠다고 짐 정리하면서 눈물 흘린 많은 날들도 고스란히 무대에서 발표되었다.
센터에서는 우리들의 노력을 가상히 여겼는지, 관련 사업이 없었지만, 유사사업단에서 우리가 바라던 일을 할 수 있도록 사업내용을 추가해 주었다.

병원에서 입원해 있는 아이들을 위해 책과 놀이활동을 지원하는 환아돌봄으로 시작해서,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심지어 학교에서까지 우리는 가베수업을 하고 책을 읽어주며, 놀이 선생님으로서 여러 곳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죽지 않을 만큼 숨을 참는 법

하면 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어려움만 더 해가고, 넘었다 싶으면 또 다시 막아서는 벽 앞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게 된다.
그러다보니, 가정에 대한 소홀함이 생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 사이 해양연구소 일을 하는 잠수부가 된 남편은 남의 집 아이들 챙기면서 내 새끼 돌보지 않는다는 불만이 생겼고, 싸움이 잦아졌다. 어쩌면 이런 다툼이 생길 만큼 우리의 삶이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남편은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며, 죽지 않을 만큼 숨을 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서로 서운함도 많았지만, 긴 겨울을 함께 이겨 낸 그 시간을 기억해 내고 마찰을 이겨냈다.
작년 겨울, 남편이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야간대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라며 등록금을 내 주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뜨거움이 내 안에서 가득 찼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기관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초등학교 돌봄 교실에서 수업하고 밤에는 남편의 배려 덕에 야간대학교 사회복지과에 다니면서도 공부 하고 있으니, 하루 종일 학교에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제주에서 지낸지 5년, 작년 대학에 간 큰 애부터 막내까지 그새 부쩍 자란 아이들, 여전히 월세방을 준비하던 때처럼 가족을 지켜주는 남편 그리고 다시 꿈꾸는 나.
생각해보면, 수급자로 생활한 5년, 바닥까지 가서 우리는 바닥을 차고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 동안 그 짧은 시간의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

희망이란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나는 매일매일 내일이 기대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곧 사회복지사가 될 것이고, 더구나 내년이면 희망키움통장도 만기가 된다.
내 삶이 희망인 이유는 이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아졌다. 물론 나의 병은 내 몸과 함께 여전히 오랜 친구처럼 데리고 살고 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며칠 전, ‘세 얼간이’ 라는 인도영화를 보았다.
서커스의 사자가 아닌 자신만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는 일, 그것은 나의 꿈, 나의 계획과도 맞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마음은 금방 속아 넘어 가는 것, 꿈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마음의 방향대로 인생이 진행되어지지 않을까? 라는 주문을 오늘도 외워 본다.
내 인생의 목적지는 분명하고, 나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앞으로 우리 모든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그 순간 까지 나의 인생도 레이스를 펼쳐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갈 것이다.


내 삶에도 콩알이 여물고 있다.

학교 근처 공터를 이용해 누군가 농사지은 콩, 꼬뚜리 안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콩알이 눈에 들어온다. 태풍이 많았던 여름을 잘 이겨낸 콩나무.

풋콩은 10월 햇살 아래 하루하루 여물어 가고 있다. 콩 심은데 콩났네...
당연한 일을 생각하며 웃는다.
5년 전 가장 비참한 기억을 주었던 제주에 뿌리 내린 내 삶에도 저만한 콩알이 여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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