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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 한 반평생
  • 년도2013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강혜경
  • 조회수2,264

*자활수기집 제10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대상 '강혜경 님'의 이야기 입니다.

당신과 함께 한 반평생


거울 앞에 앉아...
난 어젯밤에도 새벽 1시 반에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는 시간은 어김없이 새벽 5시 반!
조그마한 전기판넬 평상위에서 늘 새우잠을 자다보니 몸이 항상 무겁고 찌부등하지만 6시면 나의 하루 일과는 어김없이 시작된다.
365일 중 단 하루라도 마음 놓고 잘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하지만 15년간 힘들게 지나간 그 날들을 돌이켜 보면,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불평하지 않고 고맙고 감사해 하며 살아왔음이다.

오늘도 역시 가게 문을 열고 세수하고 화장을 하며 거울을 보며 밝게 웃어본다. 그리고 이렇게 내 스스로에게 말한다. ‘웃자! 웃다보면 언젠가는 웃는 날이 반드시 온다.’ 라고...


어느 날 오후 손님
어느 날 오후 군청 직원 두 분께서 우리 가게에 오셔서 저는 무척 놀랐지요. 항상 그랬듯이 누군가가 정장차림을 하고 오면 난 나도 모르게 긴장하지요. 그 이유는 살면서 빚 독촉을 너무 받고 살았기에 혹시 아직도 갚아야 할 것이 남아 있는가를 생각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곤 하지요. 잠시 후 여직원 분이 이런 수기모집이 있는데 한번 적어 보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그 순간 전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고맙고 감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성공한 것도 아니고 뭐하나 크게 내세울 것도 없는데 저희를 직접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그 분들과 이야기하는 도중 순간 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 한 번 적어 보자는 생각이...
왜냐하면 내 고생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아이들을 앉혀놓고 그 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기에 못 쓰는 글이지만 글로써 알려주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제 아이는 넷입니다. 딸 둘. 아들 둘.
전 이 아이들을 낳았다는 그 한 가지 외엔 지금까지 밥 한 끼 따뜻하게 해주지도, 같은 자리에서 먹어보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정말 열심히 살아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에 이 글을 적어 봅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쓰기 때문에 제 자랑같이 들릴 줄 모르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너무너무 착한 남편과 저의 시어머님과 친정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첫 출발!
저희 부부는 처음 만날 때부터 큰 빚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20년 전, 3800만원!
지금도 큰 돈 이기는 하지만, 그 때는 너무나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남편은 저를 만나기 전, 카센터를 하다가 많은 빚을 지고 있더군요. 제대 후에 아무 경험 없이 사업을 시작해 착한 성격 탓에 가게를 잘 운영하지 못했나 봅니다.
가게를 접을 무렵 저를 만났고, 저는 빚이 있는 줄도 모르고 착한 성격 하나만 보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살림을 차렸지요.
조금 살다보니 평소 알고 있던 농협 직원이 자꾸 전화가 오기에 남편에게 물었더니 농협에 이자가 너무 많이 밀렸으니 빨리 갚으라고 독촉한다는 걸 알고 나니 난 너무 겁나고 무서웠지요!
빚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오다가 그것도 아주 큰 빚이라니, 그 순간 저는 이 사람하고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중, 큰 아이를 가져 어쩔 수 없이 그 때부터 제 인생은 하루도 눈물 없는 날이 없었답니다.

남편은 카센터를 접고 마음을 잡지 못해 날이면 날마다 술로 살았던 그 때, 언니의 권유로 작은 수입코너를 차렸습니다. 작은 구석방에 보일러도 세면장도 부엌도 없는 그 곳에서 큰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에 밀쳐 두었던 밥상에 물이 얼어 있었고 갓난 딸아이의 입술은 워낙 방이 추워 항상 새파랬습니다. 모유가 적어 아이는 우유를 먹여야 했지만 우유 살 돈이 없어서 물 한통에 겨우 우유 한 스푼 밖에 넣어 먹일 수밖에 없어서 너무나 안쓰럽고 불쌍했습니다. 가게의 수입물건을 사러 서울 가는 날이면 저는 젖이 불었고 하루를 넘기는 날이면 아파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집에 있는 젖먹이는 배가 고파 친정 엄마와 밤새 울어야 했죠. 전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저절로 줄줄 흘러내립니다.


그러나 다행히 장사는 잘 되었지만 남편이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 제 수입으로는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아무리 갚아도 갚아도 원금과 이자는 불어가기만 하여서 결국 보증인에게 쪽지가 날아가서 작은 촌 동네에 소문이 나 온 동네가 시끄럽게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원금 상환일이 돌아오면 몇 날 며칠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저는 보증인을 찾아가 무릎 꿇고 “저희를 한 번만 도와주세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이렇게 14년을 그렇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저희들 보증을 14년간 서준 그 분들 덕분에 저희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 보증인들에게 사정을 하면서 “아저씨, 저희들 이번에도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면 보증인 두 분 중 한 분께서 하시는 말씀 “지혜엄마! 우리 한 번 사는데까지 한 번 더불어 살아 봅시다! 살다보면 끝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며 갈 때마다 웃으시면서 그렇게 말씀해 주셨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 어르신을 잊고 살아가겠습니까?
아저씨 너무나 고맙고 감사합니다!


놓쳐버린 결혼반지
그 후 3년을 그렇게 살았지만 어느 누구도 저희에게 결혼식을 올려 줄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평소 저희를 가까이서 지켜 보시고 때론 조언도 해 주시던 동네 할머니가 저희 사정을 아시고는 “여자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에게서 기를 못 펴고 살지” 하시면서 선듯 돈 100만원을 빌려 주시면서 결혼식장 계약금을 걸고 축의금이 들어오면 갚으라고 하시던 그 어르신 한마디를 듣고 전 일을 저질렀습니다.

결혼식장 예약금을 몽땅 다 걸고 나니, 동네 어르신들이 시아버님이 안 계시니 저승 옷을 사야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옷을 살 3만원도 없고 머리 파마할 돈도 없었지요. 그래서 궁리하다 친정엄마가 해준 금반지 2개를 되 팔아 260만원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아쉬워서 손가락에 한 번 끼워 보았지요. 너무나 예쁘더군요. 전 그 돈으로 파마도 하고 시아버님 저승 옷도 샀지요. 어르신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치루었으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갚아야 할 돈이 너무 많았기에...
결혼 후 저의 앞날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곗돈 3000만원 부도와 귀향
목돈을 갚아보자고 곗돈을 부었지요. 2년을 부어 3천만원의 곗돈을 타는 날 계주의 부도로 제 꿈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답니다. 이제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아 가게를 접고 저희들은 시댁으로 들어와 농사일을 시작했답니다. 논 9마지기, 12다랭이. 묵은 논이란 논과 밭은 다 얻어 힘 닿는 대로 죽을 각오로 일을 하였지요. 밤낮을 모르고 일 했습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내 맘같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년을 묵혀 놓아 밭도 아닌 밭을 일구어 놓으면 주인이 되찾아 가버려 눈물 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농사를 시작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전기가 끊기고, 전화도 끊기고 농협에서 빚 독촉이 빗발치는 그런 와중에 그렇게 아이들이 하나씩 늘어났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저는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주위에서 한 마디씩 내 뱉는 말들이 너무나 제 맘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를 낳았단다. 또 아이를 낳았단다. 이 소리가 듣기 싫어 셋째 넷째는 임신한 사실도 숨긴 채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래도 전 이 아이들 때문에 너무나 행복합니다. 전 지금 이 네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해준 것도 없는데 저렇게 잘 자라 준 것이 너무 고마워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뿐입니다.

어느 날인가 저희들 형편을 아시고 동네 이장님께서 오셔서 기초생활수급자로 보호 받도록 신청을 해 주셨지요. 고맙기도 하였지만 한편 너무나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4명의 아이들이 커 갈수록 생활비와 학비 등으로 살림이 쪼들렸기에 창피한 마음은 접고 먼저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2005년 기초수급자로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비와 자녀학비, 급식비 등 국가에서 도움을 주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남을 도우며 살아야지 길지 않을 거야!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지! 이 다음에는 우리가 받은 도움 남에게 꼭 돌려 줄 것이라고 다짐도 하였습니다.

늘 주어진 여건에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노력에 감동되었는지 돌돌 감겨있던 실타래가 솔솔 풀려 나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씩 빚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십 마지기 남의 농사를 지어 양식도 남겨두지 않고 농협에 큰 빚을 갚아 나갔습니다. 식당일, 노동일 등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였습니다. 그간 누구하나 저희들이 어려웠기 때문에 도와주지 못했고 단 한 푼도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저희 부부는 한 푼 한 푼 갚아 나갔습니다.
빚 갚는 재미도 돈 모으는 재미만큼 재미있었습니다.


1억 5천만원 농협 빚 상환
빚 상환 15년 만에 드디어 저희들은 농협의 빚을 다 갚았습니다.
3,800만원의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해 눈덩이처럼 불어 결국 1억5천만원을 갚았지요!
빚을 다 갚은 그 날, 전 너무나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15년이란 세월을 지켜 봐 주신 그 보증인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래! 넌 대단한 여자야! 앞으로 넌 뭐든지 잘 해낼 거야! 너의 앞날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라며 그 날 저는 저 자신에게 이렇게 되뇌이며 다짐했지요.


어느 정도 빚을 청산하고 나니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게 ○○생명을 다녀 보라는 권유를 받고 장사일도 농사일도 험한 일도 해 봤는데, ‘이 일인들 하지 못하겠어’ 라는 마음으로 알고 지내던 지인들을 만나 보험의 장・단점을 얘기해 주면서 필요한 보험가입 유형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더니 아는 사람한테는 안속는 다며 하나 둘 가입해 주어 만 2년만에 8천 만원이라는 돈을 벌었습니다. 모두 주변 이웃들의 도움이었지요.


열심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시던 마트 건물 주인이 마트를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재 운영하고 있는 마트는 세 들어 시작하게 되었고, 장사에도 자신이 있었고 지역적으로 위천면은 수승대와 국제연극제로 알려진 관광지로 여름철에는 관광객들이 많아 마트 운영이 잘되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내 땅, 내 가게를 갖게 되자...
마트를 시작한지 3년만인 2011년 12월 5억 가까이 들어가는 마트건물과 딸린 분식점, 사무실 점포를 샀습니다.
드디어 제 땅이 생긴 거죠. 이 기분을 그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래서 동네잔치를 하였습니다. 우리 부부 노력의 대가였기에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부자가 되어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평소 생각을 가진 저는 지금부터라도 제 분수껏 베풀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전 마트건물을 산 후 우리 면의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는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비록 작지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죠. 올해 처음으로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내가 마트를 운영하는 한, 어렵고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 남에게 베푸는 기쁨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을 전 다시 한 번 알았지요. 오전 우리 아이들이 배 골며 학교를 다녔고 라면 한끼로 하루를 보내던 어려웠던 과거를 생각하면 남에게 베풀며 산다는 것은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행복해 진다는 기쁨을 맛 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눈망울
은행 마감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이 지역에 아주 예쁜 딸아이가 날 찾아와 “아줌마! 저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하더군요. 이 아이는 엄마가 안 계시는 한부모 가정으로 아주 어려운 형편에 진주보건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부족했나 봅니다. 저도 월말이라 이곳저곳에 현금을 마감하느라고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서는 그 아이의 눈빛을 지울 수가 없어 전 보험을 해약해 등록금을 내 주었습니다. 제가 어려운 그 고비를... 돈 걱정을 뼈저리게 겪어보지 못하였다면 그 아이의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순간 아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요. 이 다음 그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전 그 아이를 지켜볼 것입니다. 제가 받은 것 만큼 제가 베풀 수 있을 때 까지 도와 줄 것입니다.


행복, 그 행운의 미소!
돈의 힘이 얼마나 큰 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돈의 힘을 빌어 나누는 기쁨은 얼마나 더 크고 행복한지 알고 계실 겁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노력하니 분명 그 대가는 있었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서 혹 지금의 삶에 너무 지쳐 좌절에 직면하신 분이 계시다면 감히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정이 아닌 긍정의 힘으로 살아보시라고요!
분명 머잖아 행복한 날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화이팅!

마지막으로 착한 우리 남편, 우리 아이들, 시어머님, 친정엄마!
힘든 고비 잘 견디어 주어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저희 부부의 살아온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행복과 그 행운의 미소가 늘 함께 하시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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