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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자리
  • 년도2013
  • 기관명하동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원삼
  • 조회수2,104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김원삼 님'의 이야기 입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지난 밤 태풍의 위력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 속에서도 울려 퍼지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알리듯 세차게 울어 댑니다. 지금은 검은 비구름이 하동의 하늘을 덮고 있지만 내일이면 맑은 하늘이 보이겠지요. 그리고 아직은 남아 있는 무더위가 가을이 옴을 시샘할 테지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과 지리산, 섬진강을 함께 품은 경상남도 끝자락에 위치한 하동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어떻게 제가 그 길을 걸어왔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많은 생각과 푸념에 한숨이 내쉬어 집니다. 이제 짧게나마 주마등처럼 스쳐온 제 인생의 일부분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고향 제주에서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생의 황금기인 삼십대에, 당시 한창 인기가 있었던 알루미늄 대리점 겸 공장을 인수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임신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제주에 왔을 때 고향에서는 지인들이 있고 넓다고 생각한 저의 인맥으로 제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에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2002년도 한창 월드컵 경기로 제주에서도 건설경기가 좋아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 세 명을 직원으로 데려다가 젊음의 패기와 열정으로 거침없이 헤쳐 나갔습니다. 내 일이라 피곤한 줄도 모르고 낮에는 현장에 찾아다니며 일거리를 얻어왔고 저녁에는 혼자 공장에서 제품을 조립하며 나름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런 중에 형님으로부터 연락이 오게 되었고 예전에 제가 기술을 배우러 다니던 사장님이 부도를 맞아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형님이 그 분에게 많은 액수의 돈을 보증을 섰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H회사 알루미늄 제주 총판을 하시는 분으로서 나를 매우 아끼고 동생같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던 분이지요.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형님과 또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 세 명이 앉아 있던 모습이 지금도 저의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된 듯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먼저 저의 형님이 말을 꺼내더군요. “너 H알루미늄 제주 총판을 맡아서 해볼 생각이 없느냐” 순간 저는 꿈꾸어 왔던 기회가 찾아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앞뒤 생각할 것 없이 “좋지요. 하지만 자금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하고는 싶은데 자금이 없다는 뜻을 확실히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분은 형님이 도와주마하고 저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찾아온 그 행운은 순조롭게 진행 되는듯 하였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전 주인이 회사를 다시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맛볼 겨를도 없이 그 꿈은 일장춘몽, 그대로 한순간의 꿈으로 끝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형제의 우애가 돈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에 아쉽고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형님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의 삶을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시발점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자신이 동의하고 돌려준 회사에 대한 미련만 남을 뿐 이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꿈과 용기는 온데간데없고 후회와 원망만이 내 생활의 모든 곳에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가족처럼 지내던 직장 동료들을 공장에 남겨 놓고 저는 공사대금을 수금하고는 밤이면 술로 힘든 마음을 달래곤 하였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흐를수록 저를 도와 일을 하였던 주변사람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고 결국 홀로 남게 되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제가 끝까지 지켜야만 하는 가정에서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초라한 가장의 모습으로 남아버리게 되었습니다.



한도 끝도 없는 원망과 후회 속에 마지못해 사는 삶, 그것은 지금도 생각하면 지옥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나마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한 사회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힘든 시간 눈물로 제 옆을 지켜 주었던 아내가 있기에 가능하였다 봅니다.



가정과 삶을 포기한 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를 대신하여 어린 자식 둘을 거느리고 악착같이 가장의 역할까지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며 제 자리를 대신 해주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지쳐갈 무렵,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내던 아내는 처가 식구들에게 현재의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여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식당을 하는 처남부부와 작은 건설업체를 하는 손위동서부부가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태풍 매미의 피해로 하동으로 가면 일거리가 많으니 같이 가서 일하자는 동서의 의견에 선택의 여지없이 2003년 10월경 아내와 아이들은 제주에 남기고 홀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처남의 장모가 지내시던 주택이 비어있어 거처로 사용하기로 하고 그날부터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동서를 따라 토목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열심히 하고자 아내와 자식을 떠나 왔음에도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많은 방황과 술로 세월을 보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제 맘속에 가정은 지켜야겠다는 조금의 양심은 있어서 그다음 해인 2004년 2월 철없는 초등학교 4학년과 3학년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여수행 여객선에 무거운 몸과 마음을 안은 채 한라산을 뒤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비로서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어 뻔뻔하게 아이들을 볼 수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고 처가댁이라는 보호막이 있었기에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고 고향에서는 창피하다는 이유로 하지 않던 토목공사일도 차츰 몸에 배고 일이 없을 때에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아파트 공사현장을 찾아 광주며 울산이며 전국을 돌며 돈벌이를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제 자신의 마음에는 평안보다는 늘 원망이 앞서서 삶을 지배하고 있었고, 아내와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삶과 마음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변화가 없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야 하기에 열심히 하였고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아 조그마한 공사 현장 책임자로 정신없이 현장을 돌며 최선을 다했고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2007년 9월 7일 현장에서 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던 중 운전하던 동료의 실수로 큰 사고가 나게 되어 구급차에 실려 경상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사고라는 것이 누구나 그렇듯이 또한 저의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또 다른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 없이 원망하고 저주하여 왔던 지난날의 일들이 모두가 나의 잘못으로, 그리고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몇 차례의 수술로 10개월의 병원생활과 1년여의 재활기간이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안정이 되고 나니 새로운 힘과 책임져야 할 가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삶의 현장으로 다시 들어가려니 사고를 당한 절뚝거리는 다리가 방해가 되고 자신감을 잃게 하였습니다. 노동부의 워크넷을 통하여 주위의 많은 곳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 다녔고 힘들고 지쳐갈 무렵 하동군에서 숲 가꾸기 사업이라는 일자리 창출 사업이 있다는 주위의 이야기를 듣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2010년 1월말 하동읍사무소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군청으로 가신 김향화 복지과 주사님께서 다리가 불편하셔서 숲 가꾸기 사업에는 어렵고 하동지역자활센터를 찾아 가면 알맞은 일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추천을 받았지만 생소한 이름과 어딘지 모를 소외계층의 집단일 것 같은 이질감은 그 앞을 막아서는 듯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습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작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하동지역자활센터의 문을 들어섰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부는 언덕배기의 싸늘한 바람이 그 앞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을 붙잡듯이 무겁고 힘겨운 걸음이었습니다.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창피한지 몇 번이나 망설이다 들어선 센터의 식구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는 여기의 모든 참여자들이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잘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며 독려해 주었고 이틀 후인 2월 1일부터 인큐베이터사업단에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처음의 어색한 주위의 환경에 조금은 머뭇거리게도 하였지만 몇 주간의 실습기간을 지내고 그 기간 동안 현장에서 체험하면서 느낀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어느 곳에 적합한지 실장님과 상담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짧은 실습시간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소외계층의 가구를 방문하여 무료 도배와 장판 시공을 하며 생활환경 개선을 지원하는 주거복지사업단이 제일 맘에 다가왔습니다. 낡고 허름한,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러운 살림살이 속에서 생활하시는 몸이 불편하신 분들과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생활을 보면서 저의 건강함과 풍요함을 부끄러워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이제 일년 육개월 여의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때에 가지고 있던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은 하동지역자활센터 주거복지 사업단에서 주거복지 공동체인 (주)편안한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편안한집은 2004년 자활공동체로 인정받아 도배ㆍ장판을 제외한 모든 주거복지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2010년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지정과 2011년 경남형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지정되면서 더 많은 주거복지사업을 실시하고 있고 현재 제가 소속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는 저의 직장입니다.



이렇게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지침삼아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고, 그 안에서 이제는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자’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과 보잘 것 없는 기술이지만 내 주위에 나보다 어려운 저소득층계층에 힘이 되고 보탬이 되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자’ 다짐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 3, 고 2 두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많은 걱정과 고민이 앞서지만 하동지역자활센터와 주위의 도움으로 희망키움통장에도 가입하게 되어 매월 차곡차곡 적립금도 아이들의 학자금으로 쌓여가고 있습니다.



제가 받았던 많은 도움, 내 아이들에게는 이 모든 도움을 잊지 말고 다시 사회에 돌려 줘야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늘 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지만 나 또한 이 은혜 잊지 않고 반드시 사회에 돌려주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제가 받은 도움과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아직은 막막하지만 우선은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빌어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처제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정리도 안 되고 두서없는 글이지만 지금도 주위에서 격려와 힘이 되어주는 동료들과 센터장님, 실장님, 여러분의 팀장님과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시는 편안한집 공동체 대표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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