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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로 일군 희망의 꿈
  • 년도2013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송영현
  • 조회수2,208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송영현 님'의 이야기 입니다.

자활로 일군 희망의 꿈

전주천을 지나 삼천 천변을 타고 언더패스를 달리고 있으면, 초록 갈대밭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물길위로 한 쪽 발로 서있으면서 물속 먹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희디흰 백로를 마주하게 된다.  얼마나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인지 모른다. 나는 이 길로 출퇴근을 하면서 많은 생각들을 한다.

문득, 하루가 시작 되면 일할 수 있는 튼튼한 몸과 직장이 있다는 것을 대단한 행복으로 여겼다. 아니, 행복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면서 살아 온지도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바쁘게 살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였고, 몸이 고단하니 일일이 시간을 쫓아다닐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계절에 대한 감흥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 사치였고, 오직 내 한 몸과 세 자녀들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였고 풀어 나가야 할 숙제였다.
이렇게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나에게는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도 지난날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남들이 평범하게 누리는 행복,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알콩달콩 살았으니까 말이다. 그저 금실 좋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너무도 평범한 남자에 의해, 어느 날 일순간에 내 인생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도 잊을 수 만 있다면 잊고 싶은 그날, 하늘이 유난히도 높고 맑았던 1995년 가을날.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자동차 사고소식, 119구급차에 실려 전주 예수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건설업을 하던 남편은 그즈음 사업이 잘 되지 않던 관계로 입에 잘 대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집안일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밖으로만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날도 회사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차를 운전한 것이 화근이었다.

급히 막내를 둘러업고 택시를 타고 도착한 응급실에는 간신히 의식만 붙어 있는 남편이 흰 시트가 깔려있는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지 이틀 만에 네 식구를 남겨 놓고 정처 없이 떠나 버렸다.

남편은 마지막 눈을 감기 전에
“여보! 내가 얼마 못살 것 같은데 남은 아이들 잘 부탁해”
“그리고 당신한테 미안해 마음고생을 시켜서”라고 말 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이들은 걱정 말고 어서 일어나야지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생명의 불꽃은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때의 막막함이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걸까?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말이다.



온통 세상이 먹구름이 꽉 낀 것처럼 새까맣고 눈물만이 샘솟아 평생 울어야 할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았다. 시집 식구들이 와서 남편의 유품들을 정리하고 떠나면서 이제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 한마디 남겨놓고는 지금껏 연락을 끊고 살고 있다. 당신들의 핏줄이 염연히 살아 있는데도 말이다. 참으로 야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덩그라니 남겨진 나는 당장 자식들과 먹고 사는 일이 급선무였다. 가족은 오빠와 언니가 서울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 가셔서 홀로 된 어머니만 따로 살고 계셨다. 남편이 남겨놓고 간 것은 무일푼 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서 혼자된 딸이 안되어 보였는지 어머니가 함께 살자고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 밖에 없다는 생각과 고마움에 목이 메었다.



세월과 시간은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인가?
가족이라는 일원에서 한 사람이 빠져 그 공간이 크게 느꼈을 것이지만, 호구지책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어떻게든 산 사람은 목구멍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살아야 하니까, 가정살림 만하고 있다가 세상 속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빈주먹뿐인 나에게 어머니께서 외손자, 손녀들에게 당신이 가지고 계셨던 목숨과도 같은 전 재산인 집을 넘겨주셨다. 이 세상 누가 출가외인인 딸에게 선뜻 집을 주실 수 있을까? 지금은 좋은 세상에서 편안하게 쉬시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은혜를 언제 다 갚을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마음 한 구석이 싸해 온다.



처음 시작한 일은 “피자와 치킨” 집. 잘 아는 언니와 동업을 하면서 나는 자금을 대고 언니는 판매를 책임졌지만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투자한 돈을 건지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장사가 먹는장사라고 했는데 쉽게 시작한 장사가 잘 안된 것은 어쩌면 불을 보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번에는 서울에서 잘 나간다는 “비디오 버스”라는 인터넷 이동차량 비디오버스 사업을 전주에서는 처음으로 창업했다. 두 번째 하는 장사라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받고 자녀들과 함께 아파트를 돌며 전단지를 부치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고 단골들이 생겨서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인터넷이 활성화 되지 않은 중소도시에서는 대상층이 한계가 있었다. 투자금에 비하면 고물 값에 불과한 돈을 받고 가지고 있던 차와 장비, 재료들을 팔아버렸다.



결국, 2년 후 어머니가 주신 재산을 모두 까먹고 또 다시 빈주먹이 되었을 때 두 번째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친정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동안 정신적으로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자식들을 돌봐 주시던 분이었기에 나는 심한 충격과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어찌 나에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지 한탄스러울 뿐 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얼마 후, 새롭게 생활을 시작해야겠다는 각오로 낮에는 대학교 앞 분식집에서 근무를 하면서 그 동안 못다 한 대학 공부를 시작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밤낮을 바꿔가며 돈을 벌기로 하였지만 한 부모가족에게는 나날이 고달픈 생활이었다. 그래도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던지 동 주민자치 센터를 통하여 수급권자로 지정되었다. 최저생활은 보장 된다고 하지만 커나가는 아이들의 양육비며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도 병행 하였다.



2005년. 그간 물불 가리지 않고 몸 돌볼 사이 없이 어린 자식들과 여자 혼자서 산다는 것이 어떨 것인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몫으로 한다고 해도 건강 하나는 자신 있어 하던 나였다.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목숨을 더 연장시켜 주시려고 나에게 예지를 주셨다고 믿는다.



대한가족계획협회 앞을 지나다가 이상하게 몸이 기운이 없고 머리가 띵한 것이 아무래도 진찰을 한 번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검진을 한 의사선생님이 내 눈치를 살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혹시, 보호자가 오실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를 내
“선생님! 저는 보호자가 없습니다.”
“저한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그래요? 그~럼 말씀해 드리겠는데 유방암이 의심되는군요.”
“네?” 제가 유방암에 걸렸다구요?
“설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소견서를 써 드리겠으니 예수병원으로 가보시지요.”
선생님은 말끝에다 덧붙여 “만약 유방암이라면 자궁암도 검사해 보셔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제가 지금 바빠서 시간나면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지금 당장 가셔야 합니다. 암은 촉각을 다투는 겁니다.” 의사 선생님은 당신의 진찰 결과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나는 병원 문을 나서면서도 입으로 이렇게 중얼 거렸다.
“아니? 아닐 것이다. 내가 몸 하나는 얼마나 건강한데” 그러면서도 발길은 이미 예수병원을 향해 택시를 잡아타고 있었다.



정밀검사와 조직검사를 통해 유방암 초기와 자궁경부암 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또다시 시련이 닥쳐온 것이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여자로서 생명 같은 부분이 둘 다 암이라니?”
“서울에 있는 언니나 오빠에게 알려야 할까?”
“아님, 나 혼자 자식들과 헤쳐가야 할 것인가?”
“그런데 수혈이 문제인데, 수혈하다가 오염되어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그때 당시에는 수혈을 잘못하면 에이즈에 걸리는 등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결국, 서울 오빠까지 내려오는 야단법석을 떨고 자식들은 엄마가 어떻게 될까봐 울고불고 하면서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병원생활 3개월이 지난 후 얼굴이 희다 못해 멀건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여성가장이며, 주부로서, 또한 아이들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하기위해 몸이 회복되자마자 직업전선으로 뛰쳐나갔다. 할 만한 일들은 건강을 이유로 제한적인 것이 많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렇게도 염원하던 공부를 하기위해 2009년 사회복지상담과를 지망하고 전문대학에 문을 두드렸다.

대학생활에서 오는 공부의 재미를 느끼던 중 같은 과 선배로부터 지역자활센터에 대한 소개를 받고 드디어 2010년 3월 드디어 안정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나로서는 대학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인 것이다. 더더욱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사회적 약자의 자활을 지지하는 지역자활센터가 그야말로 임상 현장이나 마찬가지이며,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업단에서 반장으로 맡은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이곳에 와서 일하는 동안 전문대학도 졸업하였다. 그리고 종합대학에 편입하여 사회복지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주부 학생, 아줌마 학생으로 말이다.
아이들도 엄마 속을 썩이지 않고 잘 자라 주었고 지금은 대한주택공사의 도움으로 네 식구가 살만한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지역자활센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생각하기 싫은 대목이다. 지역의 자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고 생명을 꿈꾸게 하는 자활센터야 말로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도록 지지하고 견인하는 지렛대가 되어준다고 확신한다.
이제 알게 되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진짜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꿈꾸고 있다.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니라, 스스로 몸을 일으켜 내게 손을 내밀어 생명의 꿈을 잉태케 해준 자활처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심리상담소를 개원할 것이다.



그 길만이 나에게 베풀어 준 사회적 은혜를 되돌려 주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두 번의 사업 실패와 사랑하는 남편과 어머니를 내손으로 장사지내고 여자로서 두 가지 암수술을 견뎌낸 내가 이글을 쓰는 이 순간에는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다.



지금껏 생명의 끈을 이어가게 해준 우리 세 아이들에게도 고맙다. 더욱 감사한 것은 우리 보드레기저귀 사업단에서 열심히 일하며 가족이 되어준 식구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한 10여년을 생명자활사업을 통하여 소외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의 나무를 심어 주신 센터장님과 실무자 선생님들에게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여러분이 이 세상의 아름다운 천사들이라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며 따뜻한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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