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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속 흑진주와 같은 가치있는 삶을 청인씨엔씨와 함께 이루고 싶다
  • 년도2013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홍순금
  • 조회수1,882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홍순금 님'의 이야기 입니다.

바다 속 흑진주와 같은 가치있는 삶을 청인씨엔씨와 함께 이루고 싶다 


 


자활성공수기를 부탁받고 나의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나의 삶 속에서 절망을 넘어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시댁에 시집 올 때의 나이가 만 19세였습니다. 당시 시아버님께서 내 이름의 도장을 파서 결혼을 원하지 않던 저를 혼인신고 해 버리고, 남편은 의료보험증에 저를 부인으로 올리면서 회사에 가족 수당이 나온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세상에 순응하며 모든 걸 체념하고 5년이란 세월동안 아들과 딸 남매를 낳고, 증조모와 시어른 두 분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한 집에서 4대가 같이 생활을 하던 중에 남편이 음주운전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면서 우리 가정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든 세월을 겪어야 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여자가 기가 세서 남편을 잡아먹었다.’라고 남편을 잃은 슬픔을 가누기도 힘든 저에게 말을 하였고, 이러한 환경은 살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저의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꺾어 버렸습니다.

한 살 난 딸과 두 살 배기 아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26세의 어린 엄마란 참으로 초라했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죽고만 싶다’를 수도 없이 되뇌었습니다. 한 살짜리 딸이 젖을 먹고 있었기에,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주변 지인들은 저에게 ‘너 거기서 살면 미쳐버린다. 시댁을 빨리 나와라. 따로 살면서 무슨 일이든 아이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라고 하였고, 독립하고자 어느 정도 결심을 굳었을 때 시댁 어른들은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아들을 저에게서 빼앗아 서울로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아들을 빼앗긴 슬픔은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컸습니다. 이젠 정말 죽어야지 결심을 하고 새벽에 집 밖으로 뛰쳐나가 집 근처 저수지로 향했었고 아무런 느낌도 두려움도 슬픔도 없는 상태에서 저수지로 뛰어 들려는 순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히 들렸습니다.

남편을 잃은 후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먹는 건 다 목으로 넘기지 못 해, 젖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어린 딸이 삼일을 우유나 그 다른 어떤 것도 먹지 못 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귓속에 울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나의 발길을 집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틀 후, 그야말로 이불 한 개, 밥공기 두 개, 리어카로 한 봇다리 싣고 나올 정도의 이삿짐을 싸서 안성에서 평택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힘들게 힘들게 생활하던 중, 지금은 고인이 되신 동장님께서 지인을 통해 저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생활보호대상자로 해주셔서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있었고 영구임대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복 바느질 일감을 받아 지인들의 도움으로 그걸 계기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97년도에 IMF가 터졌고 때문에 바느질감도 점점 줄어 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일용직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을 전전하다보니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막막했던 저는 최후의 심정으로 그 당시 우리 집 가까이 있는 평택자활센터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첫 상담의 기억에는 함께 걱정해주고 걱정하지 말라며 정말 친절하게 상담해 주는 실무자분이 있었기에 제가 평택자활센터에 지금까지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첫 배치를 받은 사업단은 청소사업단이었습니다. 출근을 한 첫 날부터 기계를 다루는 방법과 알맞은 약품 사용법, 그리고 건물 관리를 어떻게 하고 고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많은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관리해야 할 학교를 배정 받았을 때 정말 열심히 해서 성공을 해야겠다! 라는 결심을 굳게 하였지만 막상 학생들과 교직원 또 외부 손님들이 오실 때면 부끄럽고 수줍어하던 때가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학교에서 4년을 관리하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우면서 자신감과 겸손, 인내, 사람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되었고 특히 즐겁게 일하는 보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곡식이나 과일도 시간이 지나야 영글어가듯이 나 또한 그러리라...’

저는 ‘내가 혼자 청소를 하지만 이 일은 우리가 함께 가꿔온 회사의 이미지와 나에 대한 모든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긴 세월 속에 터득을 했기에 맡은 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여 친절과 미소 띤 얼굴로 많은 분들에게 불편하지 않게 지금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제가 성장하고 제대로 된 교육으로 청소 전문가로서 약품 사용법과 장비들의 특징을 알고 하다 보니, 학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면 거기에 대한 상식들을 설명해 드리므로 고객에겐 만족을, 나에게는 자신감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물로 현재 (주)청인씨엔씨가 대표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노력한 끝에 자활공동체로, 사회적 기업으로 평택에서 으뜸가는 청소회사가 되고 있고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것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기초를 평택자활센터에서 가르쳐 주신 점에 가슴 깊이 감사함을 느낍니다.

(주)청인씨엔씨라는 자활 공동체는 세상에 많은 회사 중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내가 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배려와 교육을 해 줌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도와주었고, 저에게 꿈만 같은 일들이 현재도 진행형으로 이뤄가고 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4년간 가꿔온 학교를 다른 분에게 물려주고 사무실 관리직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현장에서 근무하는 주민들에게 청소노하우 및 고충처리를 해드리고 있으며, 그중에 저의 꿈 중 제일 바랐던 운전면허도 딸 수 있도록 경제적인 면으로도 많이 도와주셔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1종 면허를 따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건 정말 꿈만 같은 일입니다.

현재 저의 생활은 우울하고 힘들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항상 행복하고 웃음이 넘칩니다. 매일 매일이 즐겁고 또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자활근로에서의 경험, 학교에서의 고객을 대했던 경험, 또 자활공동체 (주)청인씨엔씨에서의 경험은 삼겹줄과도 같이 튼튼할 것이며, 술과 사람은 오래 묵을수록 좋다했던가요? (주)청인씨엔씨란 회사와 관련이 깊은 모든 분들과 오래도록 묵고 싶습니다.

끝으로 바다 속 흑진주가 자기 몸속에 이물질을 감싸고 감싸서 영롱한 빛이 아름다움으로 아우르듯이 자활사업의 꽃이라 불리는 자활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모든 임직원분들과 함께 (주)청인씨엔씨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활 센터와 동사무소 담당자 분들 그리고 시청 관계자 분들께 저를 이 자리에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청인씨엔씨 이사 홍순금’

평생 들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이사’라는 직함과 직책, 제 이름 석자가 평택시의 자랑 ‘(주)청인씨엔씨’에 꼭 필요하게끔 오늘도 자활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며 살겠습니다. 모든 분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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