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홍보

아름다운 날 햇살 속으로..
  • 년도2012
  • 기관명부산사하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조선희
  • 조회수2,222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조선희 님'의 이야기 입니다.





아름다운 날 햇살 속으로...


미혼모...!!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2007년 레포츠 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지금의 아이 아버지지요. 서른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만났기에 누구보다 신중히 둘의 만남을 가졌고,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우리 둘은 사랑을 소중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뜻하지도 않게 2008년 2월 뱃속에 둘만의 결실을 맺게 되어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시였습니다.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하였던 약속을 뒤로하고 아이 아버지와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헤어짐과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습니다.

그렇게 미어진 가슴을 부여잡고 둘의 결실을 지워야겠다는 미련하고도 너무도 못된 생각으로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산부인과 병원 문 앞을 하루하루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다 집에 돌아오기를 몇 달여... 결국 뱃속에 하나의 생명으로 꿈틀대고 있는 핏덩이와 어미라는 모질지 못한 모정 속에서 혼자 충분히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새겨가며 극구 반대하는 부모 형제의 눈에 커다란 눈물을 지어주면서까지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최선의 선택이자 최악의 선택이었지만 올바른 선택이었던 같습니다. 이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해 그 해 12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이쁘고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나 지금 내 곁에 있으니까요.

혼기가 꽉찬 처녀가 하루하루 달이 차올라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주위의 두려운 시선을 이겨낼 만큼 당시의 나는 그리 강하지도 못하였나봅니다. 결국, 아이의 출산으로 인해 다니던 직장에서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아이를 출산 할 때까지 부모님께 신세 질 수밖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던 그 막막한 상황에서 막상 아이를 놓고 나니 스스로 감당해야 할 분유 값부터 기저귀 값까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차마 부모님께 손 벌여 가며 생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없는 형편에 대출을 받아 당장의 생활비는 해결을 할 수 있었지만,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이기조차 너무 죄스럽고 힘들어 수도 없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날 부모님께서 ‘요즘은 입양 가서 더 잘 산다고 하니 아이를 입양 보내자’고 하셨습니다. 그나마 생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이 아이였었는데... 차마 어미가 되어서 배 아파가며 낳은 자식을 버려가면서까지 나하나 살자고 떨어져야 한다 생각하니 이 말을 하시는 부모님이 너무도 무섭고 원망스럽기도 하며 이 암담한 현실 또한 두려웠습니다. 그 길로 무작정 짐을 싸들고 도망가다시피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오니 오갈 곳이 없었습니다. 일단 양해를 구하고 신혼인 여동생 내외가 살고 있는 집으로 아이와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편하게 지내라고는 하지만 며칠이 지나니 제부의 눈치도 보이고 맘이 편치 만은 않더군요. 사람이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늘 좋지만은 않습니다.
부부가 잘 지내다가도 사소한 일로 자주 언쟁이라도 하게 되며, 제부가 휴무인 날 집에서 쉬게 될 때에는 평소보다 더 조심해지게 되어 아이를 조용히 시키려고 하루 종일 아이에게 조용하란 말만 하게 되면서 아이에게 못할 짓이다 싶어 수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 놀이터에서 같이 있다 저녁에 들어오기도 셀 수 없이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여동생을 도와주는 언니가 되지는 못할망정 얹혀사는 입장에서 불안한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습니다. 거기다 매달 나오는 대출금 이자에 여동생이 매달 사 주는 기저귀를 언제까지 받아쓰면서 더더욱 마냥 있을 수만도 없었습니다.

결국 동주민센터를 찾아가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하여 생활비를 지원받아 조금이나마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고, 집 없는 서러움이 이러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어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궁창이라도 내 집 내 공간은 있어야겠다. 아이한테도 아이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모자원에 입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를 출산하고 이 시점에 오기까지 ‘돈이란 벌면 되지, 덜 쓰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항상 돈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이 사회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집 없는 서러움과 사람들이 왜 그리 돈에 목을 매는지를...

그렇게 모자원에 입소 후,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이젠 취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아직 어리다보니 한참 엄마의 품이 많이 필요할 시기인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도 어린이집에 있지 않는 시간에는 함께 해야 하므로 그에 따르는 시간적 조건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식조리기능사 및 요가강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외의 전문 기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15년 간 경리 및 캐셔직으로만 근무하였고 나이도 많아 취업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던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가는 시간 소에 잠자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으로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 부모 형제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혼자 잘 키울 수 있다는 처음의 그 자신감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아! 이것이 현실이구나... 더 이상 바닥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만 되뇌었습니다.

하루하루 머리를 쥐어짜는 이 고통 속에서 한바탕 실컷 울고 난 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바로 서야 한다.’ 그리 마음을 고쳐먹고는 아이를 업고 폐지를 모아 고물상에도 팔고 헌옷들도 모아 팔면서 겨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너무도 작고, 더구나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만큼 그리 호락호락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결국 어쩔 수없이 이마저도 그만두고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던 차에 지역자활센터에서 자활근로에 참여 중인 주위분의 소개로 기초생활수급권을 가지고 있으니 지역자활센터에서는 저소득층에게 구직처를 알선해주거나 자활근로 사업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근로를 하면서 자활급여를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니, 동주민센틀 찾아가보라는 말을 듣게 되어, 동주민센터를 찾아가 상담을 통한 상세한 설명으로 지역자활센터를 연계시켜주었습니다.

이에 아이를 양육하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더 없이 반가워 점점 희망이 보이고 자신감이 생기게 되어 이젠 살았다는 생각으로 뛸 듯이 기쁜 희망의 마음을 부여잡고 한달음에 부산사하지역자활센터를 찾아가 상담을 받고는 참여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암담한 상황에서의 절망스러웠던 그 심정이 마치 영화 속에서만 봤던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2011년 4월 1일 고대하던 부산사하지역자활센터 인큐베이터 사업단에 소속되게 되었고, 자활・자립의 꿈을 위한 첫 발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내딛게 되었습니다. 담당 팀장님의 따뜻한 배려 아래 여러 참여자들 모두 팀장님과 상시 의논하고 상담하면서 열심히 자립・자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인생을 먼저 살아오신 연세 많으신 분들도 나의 상상 이상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너무나도 적극적인 그 모습에서 큰 감화를 받아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많은 용기와 자신감을 얻게 되어 여러 자활근로 사업단에서의 근로 실습을 통해 스스로 적정 근로 탐색도 해보고 구직처 등도 알아보던 중 담당 팀장님의 권유로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한지 한 달도 채 못되어 평소 관심 있어 하던 아이에게는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일을 할 수 있는 행정사무직으로 4월 25일 「예비사회적기업 환경문화연합」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고, 5월 1일자로 채용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비록 크게 넉넉하지는 않은 급여일지라도 우리 두 식구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으며, 무엇보다 희망의 날개를 펴가면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이 아름다운 현실에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한, 나의 미래에 대해 항시 걱정해주고 상담을 통한 나의 앞길에 같이 고민해 주시던 인큐베이터사업 담당 팀장님과 사업단이 있어 덕분에 그간의 공백을 깨고 어렵지 않게 다시금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어 그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에 늘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인큐베이터 사업단에 있으면서 여러 참여자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배우며,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살아가는 모습들에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아 지금도 그 모습들이 생생히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나 스스로도 현재에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틈틈이 다른 공부들도 하면서 알차고 희망찬 미래를 위해 더 열심히 달려 갈 것입니다.

부산사하지역자활센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를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아직까지도 나의 미래를 위해 하루하루 혼자 고민하면서 힘겹게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저 같은 미혼모들이 살아가기에 힘이 부치는 이러한 사회를 비판하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요.

부산사하지역자활센터 같은 기관들이 있기에 저소득 계층도 일반 계층과 같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만 할 우리 사회는 아직 따뜻하고 희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은 삶의 절망 속에서도 살아나려는 희망으로 포기하지 말고 이러한 사회복지 기관들에 문을 두드렸으면 해봅니다. 이런 기관들이 내밀어주는 손을 따뜻하게 부여잡고 저처럼 다시 희망과 웃음을 되찾아 새로운 삶을 위해 힘차게 일어섰으면 합니다.

저에게 희망을 주고 많은 도움을 주신 부산사하지역자활센터 임원 및 직원분들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무한한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아름다운 날 햇살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어두운 일부분 삶의 고통 속에서도 저소득층 여러분들 모두 아름다운 날 햇살 속으로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웃음 지으며 걸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희망의 그날이 오기까지 힘내시기를...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