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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이별을 고한 나의 자존심
  • 년도2012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박진숙
  • 조회수2,199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 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박진숙 님'의 이야기 입니다.



잠시 이별을 고한 나의 자존심...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언니, 오빠와는 터울이 많은 관계로 항상 받기만 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욕심이 많아 남보다 뛰어나야 했고, 무슨 일이든 항상 칭찬을 받아야만 했다. 또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재주도 있었다.


무역회사에 취직을 하면서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고,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무역업은 나에게 천직이라는 확신이 섰다. 거래처 은행 직원을 쥐락펴락 했다고 하면 믿을까? 암튼 회사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일을 했고, 내가 없으면 일이 안돌아갈 정도였다.
아마도 나의 착각일 수 있겠지만, 내가 맡고 있는 일만큼은 책임감 있게 똑 부러지게 처리했었던 것 같다.


나는 일뿐만 아니라 취미생활도 아주 열정적으로 했었다. 쉬는 날이 되면 배낭을 메고 전국 방방곡곡 산이란 산은 다 갔었다. 산을 오르면서 경치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가끔 부산으로 오는 버스를 놓치는 날에는 배낭을 맨 채로 출근을 하기도 했었다.


일에 상응하는 보수도 그 당시 꽤 괜찮은 편이었다. 날씬한 몸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멋을 부리기도 했고, 옷과 구두는 말 그대로 명품만 휘감았으며, 정말이지 내 인생은 아우토반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만남...
그 사랑이 현재 자활수기를 쓰고 있을 나를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부터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완강했었다.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몇날 며칠 부모님과 다투고, 나혼자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런 분들을 언니 2명이 힘을 모아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계속적인 언니들의 설득에 부모님이 승낙했다. 설득시킨 이유를 보면, 둘째 아들이라 시부모님을 모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그 사람에게 푹 빠져있었던 것 같았다. 또 주변에 친구들이 하나둘씩 시집을 가고 나혼자라는 생각에 결혼을 더 서둘렀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신이 있었다.


금방 기반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부족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에서부터 오는 확신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부푼 자신감을 가지고 31세에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아니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다.


축복받은 2세의 탄생 그리고 몰락...
장남에게 자식이 없었던 터라 우리 아이들의 탄생은 축복 그 자체였다. 큰 아이가 10개월쯤 되었을 때 우리 창고에 불이 났다. 창고는 200평 정도였다.
추석 대목을 보려고 쌓아 두었던 과일상자가 눈앞에서 까만 재로 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창고에 물건을 처리하는 데 비용만 480만원이 들었다. 우리는 잠깐 동안 실의에 빠졌지만 아이가 어리고 큰돈이 들지 않았기에 통장에 남아 있던 돈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힘들게 버텼던 날들...
그냥 그냥 살아가면서 어느새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이 되었을 때, 자주 복통을 호소하던 남편이 어느 날 병원에서 늦게 연락을 해왔다. 입원을 해야 한다며 아이들 학교 보내고 병원으로 오라는 거였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남편은 하루 밤새 중환자 몰골이 되어 있었다. 이미 진행된 황달로 눈과 몸이 온통 노랗게 변해 있었다. 병명은 담석으로 인한 담도 폐쇄였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의사에 말에 따르면, 20대 초반에 위 절제 수술로 인해 장기가 보통 사람과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과 폐 봉합 수술을 했기 때문에 빈혈, 시력도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


‘이런게 사기 결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왜 숨겼냐고 했더니 오히려 펄쩍 뛰면서 자신들은 몰랐다고 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잘 나가던 내 인생을 포기했다라는 억울한 생각까지 들면서 결혼을 반대했던 친정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에는 신문을 돌리고 저녁에는 세탁배달을 했지만 집에서 뒹구는 남편에게 한번도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던 내가 너무 한심했다.
내가 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내가 선택한 결혼이 자존심을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친정 언니가 왔다며 빨리 오라는 거였다. 나서려고 보니 내 수중에 10원짜리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황당했다. 아이들 저금통에 제법 모여 있던 100원짜리 동전은 온데간데 없고, 10원짜리만 잔뜩 남아있었다. 지인한테 오천원을 빌려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니 언니가 차비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복받치는 설움에 서로 돌아서서 한참을 울었다.


“언니야, 생활비가 없네... 우짜노?”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꼭 갚겠다며 초라한 자존심을 내세웠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니 큰 아이가 김치와 밥을 차려놓고 동생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다 같이 죽자며 펑펑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미안함의 표현이었다.
부모의 고통을 아이들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참 잘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못 할게 없었다.
그날 나는 나의 자존심에게 이별을 고했다. 훗날 꼭 찾겠다는 다짐과 함께...


초라해 지지 않기 위해 어깨를 펴고 진구청 사회복지과로 걸어갔다.
망설이다가 “저... 저기 생활이 어려워서...”, “아저씨는 뭐 하시는데예?”라는 직원의 물음에 대답도 못한 채 철없는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사회복지사는 “그만 우이소, 말씀을 해야 도와주지예.”라고 했다. 그 동안의 설움을 쏟아내고 얼마 후 조건부수급자로 선정되었다며, 간병사업을 추천해 주었다.


부산진자활센터에서 상담 후 진구 내 효사랑요양병원으로 배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적성도 안 맞고 비위도 약해 좀처럼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몇 주가 지나고 나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고, 또 먼저 온 선배들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고, 또 많은 일을 배우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일을 했고, 나만의 노하우도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을 정신없이 설치며 열심히 일했다.


안정된 삶 속 또 다른 일들...
정부의 지원으로 조금씩 생활이 안정을 찾아갈 쯤 남편은 시력장애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근로능력을 완전히 포기했던 시점이다.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서인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안해 하는 남편을 다독거리는 여유도 생겼다.


맞춤형 공동체?...
자활센터에서는 공동체로 전환할 것을 권유했고, 나는 완강히 버텼다. 간병사업의 특성상 야간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이들만 밤에 놔두고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간병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을 하면서 점점 간병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고, 다른 일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고, 아이들이 커서 안정될 때까지 일을 계속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2년이 되어갈 무렵 담당자의 배려로 정말 맞춤형 공동체로 넘어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던 까닭인지 간병 팀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왔을 때는 사소한 의견 충돌로 시끄러웠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많이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일하고 있다.
간병사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 같다. 아직 힘든 나지만 더 힘든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 또한 나를 이곳에 있게 만드는 이유이다.
가끔씩 들리는 소문에는 나를 마치 전설적인 인물로 설명을 한다고 한다.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복지국가를 희망하며...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가 선진국에 비해 모자라는 부분이 있지만 잘 해오고 있고 더욱 발전해 나가리라 생각한다. 오늘도 사회 봉사로 정부의 지원에 보답할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응원을 한다. 희망과 자신감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는 걸 배우게 해준 현실에 감사한다. 쉬운 인생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듯...
4년 전에 버렸던 자존심을 아직까지 찾아오진 못했지만 그 자존심보다 더 소중한 무엇을 나는 배웠다 생각한다.


항상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실무자 조상미씨에게 감사한다.
더 나은 자활을 꿈꾸며 오늘도 나는 씩씩하게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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