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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내는 사람
  • 년도2012
  • 기관명진해지역자활센터
  • 제출자백미향
  • 조회수2,349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 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백미향 님'의 이야기 입니다.


세금을 내는 사람 


2004년 1월의 어느 추운 날.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6년간 저축한 돈 65만원으로 허름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에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15만원짜리 방 하나를 구했다. 이삿짐이라고는 1인용 전기장판 1개과 살림도구 몇 개, 그리고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세상은 온통 암흑천지이고, 불안한 눈망울만 깜빡이며 엄마를 따라오는 두 아이의 어깨가 너무 가련하게 보여 가슴이 저몄다.

남편과 사별한 지 10년 만에 모든 것이 다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이 서른에 두 살, 네 살짜리 아들 둘만이 세상에 남았을 때도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었다. 어린 아들들과 함께 살아갈 수만 있다면 공장잡일이나 파출부, 그 어떤 일도 별로 힘든 게 아니라고…. 또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될 꺼야” 하며,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어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살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공장에 다니며 아이들을 돌보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비정규직 급여가 너무 박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은행에 융자를 받아서 작은 가게를 하나 차렸다. 작은 가게는 열심히 해서인지 운이 있었는지 잘되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가게 앞에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렇게라도 살면 더 바랄게 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생활이 이제 좀 여유로워지겠지”라고 마음을 놓을 때 쯤 계약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상가주인은 가게가 잘되어 시샘이 났는지 월세를 두 배로 달라고 요구했다. 부당함을 얘기하자 그 후에는 시도 때도 없이 가게에 와서는 계약기간이 끝나면 가게를 헐겠다는 등의 말로 몰아 부치거나 온갖 추잡한 소리로 희롱을 하고 가기를 몇 번 반복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아무 의논할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이 꼭 늪에 빠진 것처럼 주인 영감부부가 나타나지 않기만을 빌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주인 영감부부의 간섭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혼자서 아등바등 사는 것에 지긋지긋해져버린 것일까. 남편과 사별한 후 잠을 자기위해 마신 술들이 이제 가게를 하면서는 지쳐서 마시는 술로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고 가게를 마치면 폭음으로 이어져갔다.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젊어서인지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젊어서가 아니라 어리석어 미래를 너무 안이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잘못하면 지금보다 더 힘든 삶이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망각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IMF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들도 들려왔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오로지 마음속으로 이 가게의 늪에서 벗어나는 게 소원이라 다른 곳으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한 것이 실패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새로 사업을 확장한지 1년 반 만에 모든 것을 다 날리고 빚더미에 앉은 신세로 이렇게 사글셋방에서 지냈는데, 2004년 그 해 겨울은 어찌 그리도 춥던지 보일러도 돌리지 못하고 1인용 장판에 셋이서 오들오들 떨면서 옆방의 기름보일러가 따뜻하게 “웽~~웽~~” 돌아가는 소리를 처절하게 들으며 고통스런 긴긴 밤을 보냈다.


며칠 후 큰 애가 “앞집 아저씨가 우리 집에 기름을 넣어주었다”며 “담에 내가 커서 갚으면 된다”고 해서 너무 고마운 사람이라 생각했더니, 다음날부터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며 나를 자기 집으로 자꾸 와보라고 한다. 부인도 있는 사람이 왜 자꾸 그러는지 부담스러워 보일러도 돌리지 않고 하나 밖에 없는 공용 화장실도 사용하기가 두려워 잘 가지도 못하며 살고 있는데 며칠 후엔 우리가 없을 때 우리 방문을 따고 들어가서 누워있는 것을 사람들이 끌어내기도 했다.


너무 기가 막히고 무서워서 집주인에게 당장 달려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유혹을 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그 남자의 부인이랑 집주인은 나보고 그 부인에게 사과를 하고 기름 값을 변상을 하라고 해 “난 절대 그렇게 못한다고 기름 당장 빼가든지 알아서 하라고 그리고 당장 이사를 가겠다”고 하고 보름 만에 다른 집을 구해서 이사를 가는데 집주인은 15일간 살았던 전기요금과 수도요금, 화장실 요금을 보증금에서 5만원을 떼고 25만원만 돌려줬다.


아아,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여자 혼자서 아이들 데리고 힘들게 살면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하고 위협하고 싶어지는지,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이러다가 살인을 저지르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잘 계시라고 인사를 하고 25만원을 손에 꼭 쥐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게 내 인생의 끝은 아니야. 아니, 이게 끝이야”를 중얼거리며 그 집을 나왔다.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살고 싶은 의욕도 없지만 다행히 안전하고 친절하게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집의 계단 밑 방으로 이사를 하고 완전히 지쳐 쓰러졌다. 친절하신 할머니께서는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이리 됐노?” 하시며 아이들과 나를 많이 챙겨주셨다. 지금도 너무 감사드린다.


불쌍한 아들들은 엄마의 지쳐 넋 나간 모습에 충격 받고 위축감과 불안함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큰아이는 갑상선 항진증과 우울증으로 급속하게 야위어져가고 활달한 성격의 둘째는 의기소침해서 별로 말이 없이 지내던 어느 날 동주민센터에서 나와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동 복지사가 진해지역자활센터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건강이 좋지 않으니 힘든 일은 없을 것이라며 상담을 받아보라고 해서 진해지역자활센터에 갔다.


내 생전 이런 곳이 있는 지 처음 알았다. 부드러운 말씨와 친절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어떤 일을 원하는지 내 의향을 물어보며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고 했다. 언제부터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언제든지 내 뜻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교육을 받고 있는데 내일부터 나와서 교육부터 받으면 된다고 해서 “오늘부터 받으면 오늘부터 일당을 쳐 주나요?” 했더니 “그렇다” 해서 당장 교육장으로 갔다.


그런데 교육장에 들어서니 나의 눈에는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뿐이고 좀 젊게 보이면 장애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란 말인가? 드디어 내가 인생 막장인 곳으로 왔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가 아니면 이런 건강상태로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자활사업단에 참가하게 했다.


처음으로 자활사업단에서 사람들을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세상에 상처받고 멸시받아서 그런지 위축되고 마음속에 공격적인 성향이 있어보였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애써 자신을 위장하는 사람, 반대로 막무가내로 큰소리로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 등등 정말 시장판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이런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애를 쓰고 또 교육을 했다. 그러던 중 다른 것보다 더 좋았던 것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파카 한 벌 없이 힘들게 다녔는데 단체로 파카를 받은 것으로 너무너무 행복했다. 아울러 인간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것에도 너무 감사했다.


더 감사한 일들은 자활사업단에서 내 마음의 장애와 벽을 없앨 수 있도록 상담 심리교육이나 직업교육, 취미나 특기적성 등에 대한 교육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2005년 9월부터 학교에 장애인통합교육보조원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장애아동들을 돌보며,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구나. 나는 겉은 멀쩡해도 마음의 장애가 있었는데, 이 맑고 순수한 아이들을 보며 앞으로 마음의 장애를 벗어버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자세 덕분인지 자신감을 많이 회복한 나는 2007년도에 방송통신대학의 영문학과에 편입을 하고 예전에 좋아하던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주말에 도서관에서 피나게 공부하며, 컴퓨터와 관련된 공부를 해서 컴활자격증, 특수교육보조원자격증 그리고 자격증은 없어도 수북이 쌓여있는 각종 수료증들을 보면 가슴 뿌듯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작년 12월엔 드디어 토익시험에 도전을 해서 840점까지 성적을 취득을 하고 조금 늦었지만 올 여름에 방송통신대학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대학 졸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2월 내가 원하던 진해여자중학교에 특수교육보조원으로 취업도 되었다. 드디어 자활도 했다.


내 나이 4개월 후면 50살이 되지만 난 오십이 두렵지 않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40대 후반이면 은퇴를 생각하지만 난 요즘 주변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한때는 “내가 알코올 중독은 아닐까, 병원에 입원해야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내게 아이들 영어를 봐달라고 한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 아닌가!


아직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고 자활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행동을 못하고 있지만 난 진해지역자활센터에서 배운대로, 그리고 받은 꿈과 희망,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꼭 나눠주고 싶다. 자활사업단에 있으면서 내 꿈은 세금을 내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었는데, 드디어 난 세금을 내는 사람이 되었다. 이젠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자활센터장님과 실무진 여러분들에게 지금까지 배려해주시고 도와주신 것에 너무너무 감사드리며, 다른 분들에게도 인생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잘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어렵게 생활하시는 여러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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