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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은 희망이었다
  • 년도2012
  • 기관명울진지역자활센
  • 제출자김삼호
  • 조회수1,891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 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김삼호 님'의 이야기 입니다.



절망의 끝은 희망이었다 


사람에겐 일평생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는데, 젊은 시절 주어졌던 여러 기회들을 무의미하게 보내버리고 인생의 반환점을 저만치 돌아선 오십대에 마지막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이십 대에, 괜찮은 직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던져버릴 만큼 패기가 넘쳤지만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온 나라가 부도위기에 처했을 때 나도 예외일 수 없어서, 그동안 운영하던 사업장의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온갖 종류의 카드를 가지고 소위 ‘돌려막기’를 해봤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은 냉엄했다. 다 털고 나서 남은 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부채와 절망감 뿐 이었다.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어 세상을 포기하려고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지만, 아직 어린 세 아이들과 고생만 하고 살아 온 아내,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죽을 수 없었다.

수많은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다시 한 번 살아보자고 마음먹고, 1998년 4월부터 영업용 택시의 핸들을 잡았다. 운전만 할 줄 알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택시영업이 만만한 게 아니었다. 하루에 회사에 넣는 사납금 9만원에다 연료비 3만 여원, 식비까지 하면 하루에 최소 십이만원을 벌어야 본전이고, 그 이상 벌어야 집에 몇 푼이라도 가져갈 수 있었다. 채 먼동이 트기도 전에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쉼 없이 일해야 간신히 몇 만원 벌 수 있었다. 취객에게 뺨까지 맞아가며 열심히 일해도 한 달 수입은 백 여만원 안팎이었다. 아내가 맞벌이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여섯 식구의 생계를 꾸려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삶에 대해 또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삶은 점점 궁핍해져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만 팔년을 운행하던 택시의 핸들을 놓았다. 그리고 2006년 초, 울진읍사무소를 방문하여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했다. 면담과 자산조사, 심사를 거쳐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고 담당 직원의 소개로 ‘울진자활후견기관’ -지금의 ‘울진지역자활센터’-를 찾아가면서 황천호 센터장님, 황윤길 실장님 두 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자활’의 의미도 모른 채 찾아가서 처음 황윤길실장님을 만났을 때, 따스한 미소와 함께 어렵지만 힘을 모아 열심히 해보자면서 반가이 맞아주셨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한다는 건 낯가림이 심한 나에겐 적응하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내가 속한 곳은 ‘집수리사업단’으로서 어려운 가정들을 찾아가서 지붕, 화장실, 부엌 등을 개보수하여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망치질, 삽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던 내가 망치와 톱, 삽을 들고 현장에서 일 한다는 건 대단한 모험이었다. 어설픈 솜씨로 못을 박다가 손가락을 때려서 손을 움켜쥐고 팔짝팔짝 뛰는 일이 다반사였다. 삽질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힘으로만 하려고 들면 능률도 안 오르고 금방 지치기 일쑤였다. 분명히 똑바로 톱질을 했는데도 잘린 나무의 단면은 늘 삐딱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작업을 하다가 잘못 밟아서 방안으로 떨어질 뻔하기도 했고, 바지가 찢어지고 허벅지에 멍이 들고 무릎이 까이는 건 서툰 일꾼이 거쳐가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그러던 어느날, 작업 중에 큰 사고를 당해 왼손 검지 분쇄골절상을 입어 포항으로 후송돼서 두달 여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왜 내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절망하고 힘들어할 때 황천호 센터장님, 황윤길 실장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이 되어 주셨다. 치료가 끝난 후, 그분들과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고 다짐하고 집수리사업단 현장으로 복귀했다.

수년 간의 값 비싼 현장 실습으로 제법 일꾼의 틀이 잡혀갈 무렵, ‘자활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름하여 ‘고우이개발 집수리공동체’. 아직 공동체에 참여할 만한 능력이 안된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센터장님, 실장님 두 분의 권유에 등 떼밀려 공동체 여섯 구성원의 한자리를 차지하여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활공동체’는 자활사업 참여자의 경제적 독립을 위하여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구성원들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어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도록 하는 하나의 사업체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열심히 일해서 번 사업수익은 급여로 매달 일정액 나누어 갖고, 나머지는 적립했다가 연말 정산 후에 공동 분배하여 목돈을 받을 수 있어 가정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다.
주변의 도움으로 야간대학에 입학하여 늦게나마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장학재단의 ‘미래드림장학금’으로 2009년 3월 ‘경북전문대 울진캠퍼스 사회복지과’에 최고령자로 입학하여 훨씬 나이 어린 동기들과 함께 ‘주경야독’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때 늦은 나이에 하는 공부여서 어려움이 많았다. 낮에 현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나서 책상 앞에 앉으면 졸리는 눈꺼풀이 왜 그리도 무거운지... 졸린 눈 비비고 또 비벼가면서 교수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대충 출석만 체크하고 졸업장 받는 게 아니라, 제대로 공부해서 많은 이들에게서 받은 도움을 사회에 되돌려야 한다는 굳은 각오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2년 동안 동료들의 격려와 지원에 힘입어 도지사상과 성적 최우수상을 받고 졸업하면서 ‘사회복지사 2급자격증’과 ‘보육교사 2급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제 나도 다른 누군가를 도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2010년 9월부터는 울진군의 제1호 사회적 기업인 ‘Dream & Happy work’의 일원이 되어 또 다른 출발을 하게 되었다. ‘자활사업단’에서 ‘자활공동체’로, ‘자활공동체’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점진적으로 ‘자립... 자활’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적기업의 일원으로 일하던 중,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2011년 2월, (사)대한노인회울진군지회에서 ‘취업지원센터장’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면서 소신껏 답변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해서 사회복지사가 되었으니, 작은 힘이나마 지역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오던 내가 이제는 다른 이들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마냥 감사할 따름이다. 삶의 깊은 나락에 떨어져서 인생을 포기하려 했을 때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주어진 삶의 마지막 기회에서 그동안 내가 받은 도움과 사랑을 사회에 되돌려 드리는데 온힘을 쏟을 작정이다. 주변인들에게도 어려운 형편 때문에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자활시스템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들도 있지만, 적어도 내겐 자활센터를 통하여 이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에, 자활참여자들이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여 새로운 꿈을 통하여 ‘자활ㆍ자립’의 길을 열어가기를 소망하며, 오늘까지 함께하며 큰 힘이 되어주신 황천호 센터장님, 황윤길 실장님, 그리고 자활센터 모든 가족들과 직원여러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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