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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은 지금이다
  • 년도2012
  • 기관명광주북구일터지역자활센터
  • 제출자한동순
  • 조회수2,388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 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한동순 님'의 이야기 입니다.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은 지금이다

 

6남매의 외동딸로 태어나 식구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살았던 유년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처음 세상에 빛을 본 순간은 축복으로 가득했으나 ‘왜 이다지도 인생이 순탄하지 않은지!’, 지금 이 순간 지나간 세월을 생각해보니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절망 속에 힘겹게 살아왔던 날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빛났던 그 순간처럼.

제게 찾아온 첫 절망은 소녀시절 결핵이라는 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꿈 많고 활발하던 저에게 결핵은 제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제 인생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한결같은 가족들의 사랑은 믿음이라는 신념을 제게 심어 주었습니다. 항상 긍정적인 말들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가족의 노력은 저에게 다시 안정을 찾아주었습니다. 저는 조금씩 제 자신을 다독이며 삶을 추서러 가기 시작하였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상에 행복해할 무렵 혼기가 차서 중매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그를 믿고 인생의 반려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때만 해도 인생이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비록 어려운 가정형편에 9남매의 장남이지만 전기 일을 하면서 늘 열심히 살아가는 남편을 의지하며 금슬 좋게 신혼을 보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시댁어르신들과 시할머니, 8명이나 되는 시동생, 시누이의 뒷바라지는 꽤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도 신랑이 있었기에 의지하며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일 년 남짓 지날 무렵 남편이 심장판막증을 앓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일도 관둔 채 요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층층시하에 아직 어린 동생들이 저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실이 진저리 처지게 싫어 부정하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픈 남편을 간호하며 시댁어르신들 봉양을 하며, 시동생들을 보살피며 그렇게 절망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집안일 하랴 남편 병수발 들랴 가사노동만으로도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장남인 남편 대신에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식당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살다보니 자연스레 몸은 지쳐갔고 저 또한 결핵이 재발하여 각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프다고 일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시댁식구들과 남편, 3아이가 저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억척같이 일을 했습니다. 지혈제를 먹어가면서 식당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시동생 몇은 결혼하여 출가를 하고 목돈을 조금 모아 감자탕 집을 열게 되었습니다.
몸은 많이 힘들었지만 드디어 ‘온전한 나의 가게’를 열게 되어 참으로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이제 뭐든지 잘 될 듯싶었습니다. 남편의 병도 그럭저럭 관리되고 있었고, 아이들도 착하고 성실하게 잘 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비록 요양하며 집에만 있는 남편이었지만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남편이었기에, 그이의 죽음은 저를 깊은 절망 속으로 떨어트렸습니다. 장례 3일 내내 목 놓아 울어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가라앉질 않았습니다. 식당일도, 며느리 역할도, 엄마의 본분도 모두 잊고 6개월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드니 내가 책임져야할 3명의 아이들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하는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며칠 말미를 잡아 시어른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거냐고 걱정하셨지만 자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주로 이사 온 다음날 동사무소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상담을 하였습니다. 처음 이사 간 곳이 동구 서석동이었는데 동사무소에서 15일 만에 「동구빛고을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래 아이들을 위해서 다시 꿈꿔보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차비도 아껴보려고 살고 있는 서석동에서 복지관이 있는 소태동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다녔습니다.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도 하였습니다. 큰 아이가 공부를 곧잘 해서 학원이라도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행히 저의 바람대로 큰 아이는 공주대학교 사범대학을 수시로 입학하였습니다. 얼마나 기쁘던 지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지관 근무를 계속하였습니다. 오로지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런데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고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기니까 복지관에 오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보다 힘들고 불우한 사람들 천지였습니다. 독거노인이나 한 부모 아이들, 조손부모 아이들이 밥을 먹지 못해 복지관에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더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고 결식아동들을 위해 밤늦게까지 저녁식사를 도맡아 준비했습니다. 주방일 하면서 시간이 나는 날에는 종종 노인 목욕봉사도 하였습니다.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못한, 아니 나처럼 힘든 사람들을 함께 도우며 사는 것이 참 보람 있었습니다.


삶의 보람과 행복을 조금씩 찾아가게 될 즈음 또다시 절망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저에게 또다시 결핵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스페르종”이라고 하여 폐에 곰팡이 균이 너무 많다고 3개월 후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술비도 3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3개월 후 수술을 하고 재활치료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2차례 수술을 더하고 1년 반을 병마와 싸웠습니다. 수술 다음날부터 통증에 시달리는 내게 운동해야 한다면서 호랑이처럼 굴던 간호사가 어찌나 밉던지 속으로 욕을 꽤나 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점점 회복되면서 그 호랑이 간호사가 천사였음을 알았습니다. 저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악역을 맡아가며 저를 돌본 거였습니다.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간호사뿐만이 아니라, 복지관 동료들이 들고 온 “3만 7천원”은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독거노인들이 천원, 이천 원씩 모아서 복지관동료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돈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변분들의 도움과 격려로 재활을 잘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퇴원해서 2개월 정도를 쉬고 다시 복지관에 출근을 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받았던 사랑만큼 더 많은 사랑을 그분들께 돌려드리려 노력했습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몸이 안 좋아져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지관에서 주방식구가 필요하다고 하여 45일간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았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그렇게 동구에서 6년을 살다가 전세자금이 부족하여 각화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행정구역 변동으로 인해 더 이상 동구빛고을복지관 근무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들었던 일터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 무척 아쉬운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체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구에서도 복지관에서 해왔던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북구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다행히도 지인을 통해 이곳 광주북구일터지역자활센터에 상담을 오게 되었습니다.
초기 상담을 받고 「여럿이 함께」라는 인큐베이팅 사업단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음식 계통의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인큐베이팅 사업을 하라니 조금은 실망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큐베이팅 사업단에서 교육을 통해 자활사업에 대해 알아가고 자신의 자립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워가 보자는 담당자의 말에 믿음이 갔습니다. 이런 저런 복잡한 감정으로 시작한 인큐베이팅 사업은 저에게 많은 도전과 시행착오를 주었습니다.


오랜 식당일과 복지관 근무 경험에서 사람사이의 관계 형성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자활센터에서 만난 동료들과의 관계는 조금 달랐습니다. 워낙 다양한 성격과 생활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의견충돌이 가끔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각자의 의견교환을 통해 사업단 식구들끼리 더 과감히 뭉칠 수 있었습니다. 시범사업을 고민하다가 “막걸리”를 개발해보자는 의견을 모아 3차례 막걸리 주조를 시도하기도 하였고 다양한 아이템 회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느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큐베이팅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내 인생 설계에 대한 구체적 실현방안을 마련하기는 버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식당을 창업해볼까, 아니면 요식업 관련 일자리를 찾아볼까 하다가 모두 다 여의치 않아 자활사업단에 남기로 하였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려운 형편에 3아이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으로서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기농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해마루” 사업단에서 일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친환경 농산물들을 자라면서 봐왔던 것들이 많아서 친숙하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유기농, 저 농약 재료들로 만든 다양한 공산품들도 신기하고 멋져보였습니다.


그동안의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일이어서 더욱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환경이 어떻든 간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생활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달라진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항상 긍정적으로 생활하려 노력합니다.


북구일터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사회에서 보호와 배려를 받는 만큼 나도 누군가를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 졌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아는 사람을 통해 87세 된 독거노인을 만나게 되었고 주말과 휴일에 그분 댁에 방문하여 말벗도 되어드리고, 식사도 챙겨주고 돌봐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분이 “이젠 자네가 내 발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찌나 고맙고 행복하던 지요.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세 아이의 가장으로서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나를 위한 삶에서 벗어나 함께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행복 할 수 있는 지금 이순간이 제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늘 행복하고 빛나는 순간들로 가득 차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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